로마서 배경 연구
한천설/개혁신학연구원 신약학 교수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한 13서신 중 가장 중요한 서신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 서신은 기독교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신약성경의 어느 다른 책보다도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베드로전서나 히브리서에 영향을 준 것은 물론이고, 속사도시대의 저술들, 교부들의 사상,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의 사상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로마서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신칭의의 신학을 형성했던 루터는 말하기를, “로마서는 그 자체 안에 성서의 전체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신약 혹은 복음의 가장 완벽한 개요이다”라고 했을 정도이다.
로마서에 대한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견해는,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 집약서’라거나 혹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조직적 교리체계’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주장의 근거는 이 서신의 전반부에 복음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잘 설명되어 있고, 또한 후반부에는 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생활지침이 잘 제시되어 있는 등 구원론에 대한 체계적인 선포 때문이었다. 즉 바울의 이전 다른 편지들이 단편적이고 덜 체계적인데 반해, 훨씬 더 체계적인 이 로마서는 바울이 그동안 동방선교를 하면서 얻은 신학적 사상을 잘 정리하고 요약하여 체계화시킨 것이고, 이것이 기록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에도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는 이제는 더 이상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리집약서라고 생각되었던 로마서에 기독교 교리 중 중요한 교회론, 성례전, 육체의 부활, 교회정치, 혹은 종말론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거의 발견되지 않을 뿐더러, 기독론도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어떤 특정한 역사적 동기와는 무관한 하나의 신학적 논문이나 교리서, 또는 단순한 바울 사상의 개요서 정도로 보는 것은 로마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상황의 특수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며, 그 결과 로마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로마서 연구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많이 채색되고 왜곡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당시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그의 생각과 의도, 그리고 그가 했던 일을 그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돌아가서 정확히 밝혀내는 일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수도원이나 상아탑 같은 곳에서 평온한 사색 중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체계화시키고, 자신의 신학과 사상을 조직적으로 기술했던 서신이 결코 아니다.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 서신 또한 복음을 위해 애쓰던 선교의 현장에서 기록한 선교사의 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로마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세기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그리고 왜 이 서신을 기록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런 작업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바울의 의도나 기록 목적을 바로 파악할 수 없고, 따라서 로마서를 바로 설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의 바울의 상황과 로마교회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복원함으로서 로마서를 바로 설교하고자 하는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데 있다.
1. 수신자의 상황
로마서의 서론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왜 썼는가”하는 기록동기, 혹은 목적의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로마서의 집필 동기와 역사적 상황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로 다르게 주장되어져 왔다. 이런 많은 연구들과 이론들을 우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울 자신의 상황에서 그 기록동기를 찾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수신자인 로마 교회의 상황에서 그 동기를 찾는 시도이다. 즉, 로마서의 기록동기를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바로 알아야만 바른 접근과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1.1 로마의 유대인 사회
로마는 라인 강 서부와 다뉴브 강 남부의 유럽 전지역과 유프라테스강 서부의 서남 아시아 전지역, 즉 지중해 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로마제국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그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로마에는 주전 1세기 말엽부터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시민권을 획득하고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Harry J. Leon, The Jews of Ancient Rome, pp. 4-9). 아마 이들은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Pompey) 장군에 의해 전쟁포로로 로마에 끌려 왔던 유대인들로서 석방 후에도 계속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 유대인 사회의 강력한 구성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 당시 로마의 유대인 사회는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팔레스틴에서 최근에 이주를 해와서 회당을 이룬 히브리인들의 회당도 있었고, 헬라말을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었고, 또 고린도나 아시아의 각 지역에서 이주해와서 지역마다 나름대로 회당을 이루고 있는 등 아주 다양한 공동체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서로 다른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신학적, 집단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대 공동체가 로마에 공존했던 것은 후에 로마의 제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가 칙령(Claudius Edict, A.D. 49)을 발포하여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한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1.2 로마 교회의 기원
로마서 1:7과 15절에 의하면, 로마서는 로마에 거주하는 성도들에게 쓰여진 편지이다. 이 편지는 로마에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최초의 증거자료가 된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로마 교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바울이 직접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외에는 정확한 역사적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기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다.
얼마간의 초기 기록들이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창시자요 첫 감독이었다고 하기도 한다(Adv. Haer. 3.1.2; Catalogus Liberianus, A.D. 35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나 타당성은 거의 없다.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선교정책(롬15:20)으로 미루어 볼 때, 만일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설립했다면 결코 그 교회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능성 중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로마 교회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 로마로부터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후 로마로 돌아가서 처음으로 기독교회들을 세웠을 것이라는 것이다(행 2:10참조). 이러한 주장은 4세기의 라틴 교부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로마 교회의 기원을 이야기 할 때 의존해오고 있는 그는 말하기를, “로마의 교회는 어떤 특정한 사도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의식을 따라유대인들 사이에서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PL 17, col. 46).
조심스럽지만 로마교회의 기원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결론짓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로마의 교회는 어떤 특정사도나 전도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기보다는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해 설립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1.3 로마 교회의 상황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한다는 것도 역시 어려운 형편이다. 이는 로마 교회의 기원이 그러하듯, 로마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도 정확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상당히 신빙성있게 로마 교회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로마 교회에 대한 첫 역사적 증거자료는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애』(Life of Claudius, 25, 4)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크레스토스(Chrestos)때문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항상 폭동을 일어났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유대인 모두를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참조: 행 18:1-2). 여기서 ‘크레스토스’란 이름은 실제로는 '크리스토스'(Christos)일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모음이 잘못 기록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주후 1세기 헬라어에서는 e와 i를 거의 비슷하게 발음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분쟁과 폭동은 “예수가 곧 그리스도(Christos)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불신 유대인들 사이에서 생긴 견해 차이와 그로 말미암은 극한 대결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극한 상황이, 즉 모든 유대인이 로마에서 추방당할 만한 갈등이 두 부류사이에서 일어났을까? 그것은 로마 교회가 생겨나고 성장하게된 배경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로마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유대인의 회당에 규칙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당연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회당에서 전파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당시 회당예배의 규칙이 어떠했는지 안다면, 그것으로 미루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당시 회당예배의 규칙은 이러하였다. 성인 남자 열 명 이상이 모이면 예배는 시작이 되었고, 회당장이 그 안식일에 읽도록 정해진 구약 성경의 본문(lectionary)을 한 구절 읽은 후에는 “우리 중에 혹 이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위로나 권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청한다. 바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은 회중 앞에 나가서바울이 그러했듯이 “지금 여러분들이 들은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약속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당연히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도시들에서처럼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새롭게 등장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도에 우선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아마 이방인들이었을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부류의 이방인, 즉 할례를 받고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proselytes)과, 하나님을 믿지만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God-fearers)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방인 유대교도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를 받아들이자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고, 유대인 회당은 기존의 신도들을 많이 잃게되어 유대인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큰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끊임없는 분란과 폭동의 원인이 되어 결국은 정치적 불안감을 느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쫓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재구성은 로마 교회가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로마 교회의 구성이 당연히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염두에 두었던 청중들도 당연히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혼합된 청중이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의 주 구성원들은 역시 이방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당연히 이방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cf. 롬 1:5, 13; 11:13, 23-24, 28, 31; 15:7-9).
1.4 로마교회의 갈등상황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던 로마교회에 주후 49년에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추방 명령은 아주 결정적이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이 추방되어 생긴 빈자리에 이방 그리스도인들만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 중에서 분명히 유대 기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가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그들 중에 포함시킨다(행 18:1~2).
바울이 로마서를 저술한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로마로 귀환했다고 할지라도예를 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 교회의 성도들 명단에서 발견된다(16:3~4)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교회 내에서 다수가 되었고, 교회의 지도력이나 신학사상에 있어서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주후 54년경,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자 다시 로마로 돌아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자신들이 없는 사이 교회를 지키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차지한 우세한 위치와 이러한 상황 변화는 당연히 이 두 그룹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두 그룹의 갈등 양상은, 채식주의와 특정한 날 준수문제를 발단으로 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의 대립 양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갈등 상황이 로마 교회에 실제로 없었다고 한다. 그 근거로 이들은, 첫째 바울이 로마 교회의 상황을 알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런 실제적인 권면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들은 로마서(14-15장)와 고린도전서(8-10장)를 비교하면서, 바울은 본 서신에서 로마교회 내에 있는 두 갈등 분파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린도 교회의 실제적인 갈등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강한 자' 와 '약한 자'들이 어떻게 화목하고 바른 친교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관해 일반적인 진리를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들 간의 분쟁은 우상 숭배와 연관되는데 반해서(고전 9-10장), 로마서의 문제는 약한 자들의 채식주의와 특정한 날 준수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서 16장의 인사부분에 나타난 대로, 로마 교회 안에는 바울의 많은 동료와 친구들이 있었다. 아마도 바울은 그들을 통해서 교회의 형편과 상황을 소상히 들었을 것이다.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등장하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의 대립 양상은 로마 교회에서 일어났던 구체적인 상황이다. 특히 수신자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대 많은 학자들은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한 바울의 권면들 속에서 로마서의 중심목적을 찾고자 할 정도이다(14:1-15:3). 심지어는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로마서의 가장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기록 목적이 로마 교회 내에 발생한 분열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정도이다. 아무튼, 로마 교회의 분쟁은 음식 문제나 날자 준수 문제로 인해 불거져 나오기는 했지만, 다수를 점하는 자유분방한 이방 기독교인들과 소수 그룹에 불과한 보수적인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갈등에 그 근본원인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로마서 안에 나타난 유대인과 이방인출신의 그리스도인의 갈등, 또는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의 파쟁과 갈등을 염두에 두고 읽지 않는다면, 중요한 주제를 놓치고 말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출신의 그리스도인, 혹은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로 구성된 로마 교회는 갈등이 심화되어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할 위험에 직면했었고, 바울 앞에는 그 문제를 제거하여 다시 하나의 공교회(Catholic Church)를 만들어야 할 수신자의 실제적 상황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 그룹사이의 화해를 시도하며, 두 그룹 모두에게 권면한다. 먼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선민의 민족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것은 복음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것이라 논박한다(1:18-4:25).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갖는 자만심과 우월성도 복음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것이라 경고한다(9-11장). 이와 같은 바울의 관심은 믿음이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하면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14-15). 우리가 위에서 살핀 이러한 수신자의 상황은 바울의 상황과 더불어 로마서를 바로 보는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2. 바울의 상황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그는 복음의 사도로서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전환점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 동방에서의 선교 사역을 완성한 후, 이제 막 서방 선교에 착수하려는 시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 자신의 말을 빌리면, “...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서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15:19). 즉 동북부 지중해 지역 선교를 완전히 마쳤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복음 사역을 할 곳이 없어서,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가려고 하는 시점에 있었다(15:23).
이미 바울은 그 전에도 로마에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약 2-3년 동안을 에베소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다 해결되어서 고린도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서 모은 구제헌금을 가지고 이방 교회의 대표단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15:14-29). 그리고 헌금을 전달한 후에는, 그토록 기다려왔던 서방 세계에서 새로운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스페인 여행을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바울에게는 크게 두 가지의 염려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걱정이 되는 것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 가면서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의 이방 교회들로부터 모은 구제 헌금을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야 하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의 심한 박해는 이미 각오하고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과연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과 구제 헌금과 기쁘게 받아줄 것인지?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 대표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줄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은 우리 생각대로라면 바울이 직접 예루살렘에 가는 대신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시켜서 모금된 헌금을 예루살렘에 보내고 자신은 고린도에서 로마로 그냥 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그 헌금을 손수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극히 위험스러운 여행을 감행하려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구제헌금이 가지는 특성 때문이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에 특별한 관심과 정성을 쏟은 것은 그러한 구제 헌금을 통해서 바울이 세운 이방 기독교회들과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들을 해소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이 세운 이방 기독교회들의 구제 헌금을 수락한다면, 이로써 그들 사이의 연합과 친교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더욱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들의 구제 헌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그들이 이방 기독교인들을 그리스도 교회의 합법적인 구성원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중대한 신학적 의미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염려는, 스페인 선교를 위하여 먼저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재정적 지원을 보장받고 그들의 이해를 얻어야만 했는데, 과연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로마 교회가 새로운 후원교회가 되어 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의 선교사역의 지원교회는 안디옥교회였는데, 이제 선교 사역지를 로마제국과 그 서반부로 옮겨감에 있어서 안디옥교회는 지리적으로 너무 먼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을 전도하려면 로마교회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그들의 도움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가 자신의 새로운 후원교회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상황이었다(15:24).
하지만 문제는, 로마 교회들은 바울에 의해 세워지지도 않았고, 또 그곳의 성도들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도처에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을 통해서 좋지 않은 바울의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 고린도와 기타 지역들에서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이 끊임없이 의심을 받고 도전을 받지 않았었는가? 따라서 그러한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또 자신의 입장을 체계적으로 변호하며 자신 편이건, 반대편이건 누가 읽어도 오해의 여지가 없는 복음을 로마 교회에 재천명할 필요가 있었다. 즉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여 유대주의 자들의 비난을 격파하고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체계화 시켜 로마 교회에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3. 로마서의 기록동기
지금까지의 살핀 수신자인 로마교회의 상황과 저자인 바울 자신의 주변 환경들을 기초로 하여 바울이 왜 로마서를 기록했는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바울은 스페인 선교를 위해 서유럽 선교의 전략적 요충지인 로마 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바로 소개하여 그들의 도움과 지원을 얻으려 했었는데, 이러한 선교적 목적이 가장 직접적인 로마서의 기록 동기라 할 수 있다.
2) 로마교회에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과 유대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심화되어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였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믿음을 굳건히 하려고 하는 목회적인 목적에서 기록했다(1:8-15; 15:15). 즉 바울은 비록 자기가 설립한 교회는 아니지만 자기의 사도적인 사명을 따라서 로마 교인들에게 특별히 그들에게 필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4) 바울이 본 서신을 일차적으로는 로마 교회에 보내기 위해서 쓰고 있지만, 보다 폭넓은 역사적 상황에서 보면 이제 곧 방문하게 될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학적인 논쟁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를 저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대비한 사전의 준비로 다시 한번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확인하고, 유대교회와 이방교회가 하나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재천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로마서에서 체계화시켜 요약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로마서는 수신자의 상황과 저자의 상황이 함께 어우러져 기록된 서신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무시하고 이러한 요인들 중에서 어떤 한 요인만을 배타적으로 선택하여 로마서를 저술하게 된 동기로 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 모든 요인들이 나름대로 바울이 로마서를 쓰도록 작용한 동기로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더욱 분명한 것은 기록 동기가 어느 것이든,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양자를 동시에 설득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라는 사실의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 분리되어 있는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논지는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바로 알고 로마서를 해석할 때, 우리의 편견을 벗어나 로마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바로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4. 결 론
로마서는 바울이 그동안 선교 사역 중에 깨닫게 된 공통된 주제들을 신학적으로 더욱 숙고하여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들로 요약하고 다듬은 서신이라는 견해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생각이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는 단순한 기독교 교리의 요약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비록 여러 이유 때문에 주요 내용이 신학적이며, 다른 바울의 서신에 비해 상황이 적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로마서는 여전히 그 서신이 기록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실제적인 상황이 존재했던 상황서신(occasional letter)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채 로마서를 해석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의 전제와 편견 속에서 진정으로 로마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치 루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루터는 로마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그들이 서로 싸우는 가운데서 그들의 신앙과 교회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바울의 교훈을 듣게 되었다…그들은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화해의 방도가 없었다…그래서 바울은 목회자로서의 그를 신임하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그 모범을 보여주며 교육하였다”(루터선집 제4권, p. 65). 그는 로마서의 상황을 어쩌면 아주 정확히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았던 그것을 무시해버렸다. 왜냐하면 루터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로마서의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이었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바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하는 개인의 문제로 고민하던 루터는 로마서에 나타난 이러한 상황성을 무시해 버리고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서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루터는 로마서의 중심주제를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보고 있다. 이것은 루터 이후 개신교 신학의 중심이 되었고, 특히 서구신학의 큰 기초가 되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문제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는 로마서를 1세기의 바울과 로마 교회의 상황에서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시대의 상황에서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민족적인 차별이 없이 대하신다”는 하나님의 불편부당성(Impartiality of God)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의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워지는가”라는 루터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동등한가”라는 바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로마서 3:22의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라는 바울의 상황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정확히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루터의 연구가 수많은 공헌을 우리에게 남긴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오늘 우리 설교자들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그의 해석이 남긴 아쉬움을 거울삼아 이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로마서가 무엇이라 말씀하는가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바울의 입을 빌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해서는 되지 않는다. 우리 설교자들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상황에 기초하여 성경이 ‘그 때, 그리고 거기에서’(then and there)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바로 해석하고, 그리고 그 객관적 근거 위에서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설교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설교자들로 우리 한국교회가 가득 채워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Pastor. Ryu soon geun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