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거룩한 만찬
생명의 양식 나누는 ‘영적 잔치’
- 요 6:47-51 / 마 26:17-30 -
요한 6: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 그리스도의 몸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 얻는 약속을 확증하다.
1.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의 영적 잔치
세례의 표징인 물에는 ‘씻음’(ablutio)이, 성찬의 표징인 떡과 잔에는 그리스도의 ‘무름’(satisfactio)이 표상된다. 이러한 표상의 실체가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물과 피였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오셨다고 한 말씀에는(요일 5:6) 성례의 ‘숭고한 신비’(sublime mysterium)가 이미 제시되어 있다(4.14.22).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지 외면적, 형상적이지 않으며 내면적, 영적이다. 그것은 성례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바깥에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사신다. 그 분께서는 각인에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하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놀라운 교통을 하신다.
그리하여서 그 분께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기까지 우리 속으로 들어오셔서 한 몸이 되사 날마다 자라 가신다(3.2.24).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의 은혜로써 성도 안에 사시고, 성도가 그 분 안에 산다.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을 통한 성도의 ‘교제’(communio)와 ‘교통’(communicatio), 성찬은 이 ‘신비한 복’(mystica benedictio)을 마치 인(印)과 같이 확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부어주신 영으로써(행 2:33; 롬 8:9), 우리 안에 사신다(갈 2:20). 그 분께서 ‘우리 밖에’(extra nos) 계시나, ‘우리 안에’(intra nobis) 사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고리’(vinculum)가 되어서 우리를 그 분과 연합시키고, ‘수로’(canalis)가 되어서 ‘그 분 자신과 그 분께 속한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찬의 ‘물질적인 표징들로써’(corporeis signis) 제시되는 ‘영적인 진리’(spiritualis veritas)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초월하시면서 내재하시는 임재의 비밀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아버지’(optimus pater)로서 자신의 자녀들을 일생 동안 쉼 없이 ‘기르신다’(alere).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능력에 맞추어서’(ad modulum) 성찬을 제정하셨다.
그리하여서 자신의 호의에 대한 ‘보증’(pignus)을 삼으셨다. 성찬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과 음료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분께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증하는 ‘영적 잔치’(spirituale opulum)이다.
성찬의 ‘떡’(panis)과 ‘포도즙’(vinum)은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얻게 되는 ‘보이지 않는 자양분’(invisibile alimentum)을 표상한다. 우리를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께서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unicus animae nostrae cibus)이 되신다.
그 양식을 먹는 자마다 ‘생명을 살리는 죽음의 능력’(vivificae mortis virtus)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게 된다. 이러한 ‘은밀한 연합’(arcana unio)이 떡과 잔의 표상으로써 기념되었다(4.17.1).
성찬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까지 자라가며 그 분께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으로 삼게 되는 은혜에 대한 증거를 얻게 된다.
떡과 잔이라는 성찬의 표징들을 통해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시되신다’(exhiberi).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큰 확신과 달콤함’(magnum fiduciae et suavitatis)을 얻게 된다.
주님께서 인자가 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에 오를 길을 여셨다. 친히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 무력해지심으로 우리가 강해지고, 빈곤에 처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 죄의 짐을 지심으로 우리가 의를 덧입게 하셨다.
살과 피를 취하시고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부활의 육체 가운데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4.17.2, 11).
성찬의 주된 기능은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양식’, ‘참된 음료’로서 그 분의 몸을(요 6:55)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요 6:54) ‘약속을 인치고 확증하는데’(promissionem obsignare et confirmare) 있다. 십자가에서 이 약속이 수행되었으며 다 이루어졌다. 주님께서 죽음을 삼키는 죽음을 당하셨다(벧전 3:22; 고전 15:54).
그리하여 그 분의 살과 피를 영생의 양식으로 제공하셨다(요 6:48, 50). 그 양식으로써 마지막 부활의 때에 우리의 육체는 ‘썩지 아니함’과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된다(고전 15:53-54).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 그리하여서 ‘그 분의 실체에 참여하는 자들’(participes substantiae eius)이 되게 한다.
“받으라, 먹으라,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accipite, edite, bibite; hoc est corpus meum, quod pro vobis traditur; hic est sanguis, qui in remissionem peccatorum effunditur)”(마 26:26-28; 고전 11:24; 막 14:22-24; 눅 22:19-20).
이러한 제정의 말씀을 통하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이 ‘우리의 것’(nostrum)이며 ‘우리를 위한’(pro nobis) 것임을 선포하셨다(14.17.3-4, 11).
2. 영적 그러나 실재적인 현존(praesentia spiritualis sed realis)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믿음이 없이는 성찬의 복을 누릴 수 없다. 성찬은 대리적 속죄의 의가 성도의 구원에 역사함을 확증하되, 오직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그러하다. 믿음 가운데 성찬에 참여함에 있어서, 표징 자체를 업신여겨서도 과도하게 찬양해서도 안 된다.
주님께서는 표징의 의미를 단지 관념상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성찬에 있어서, ‘먹음’(manducatio)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분을 마음에 모신 성도가(엡 3:17)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양분’(alimentum)으로 ‘능력’(virtus)과 ‘생기’(vigor)를 얻는다. 그러므로 성찬의 신비를 단지 성령의 내적 감화를 받는 정도로 여겨서도 안 된다(4.17.5, 7).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요 1:1, 4; 요일 1:1-2).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원천이며 기원’(vitae fons et origo)이셨다. 그 분의 살은 생명의 떡이요 그 분의 피는 생명의 음료였다(요 6:48, 51, 56).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육체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부활의 삶을 소망하는 성도에게 ‘놀라운 위로’(eximia consolatio)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생명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그 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다. 우리는 그 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다(엡 1:23; 고전 6:15). 우리는 그 몸의 뼈와 살을 이룬다(엡 5:30; 창 2:23). 이러한 한 몸 됨의 비밀이 크다(엡 5:32). ‘이 비밀을 설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찬미하는 것이 낫다’(eam admirari quam explicare malit)(4.17.7-9).
성육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성의 따라서는 특정한 곳에 계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살과 뼈를 가지셨다(눅 24:39; 요 20:27). 그 ‘유한한 몸’(corpus finitum)으로 마지막 날 까지 하늘에 머물러 계신다(행 3:21).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내려주심은 이제 그 분께서 육신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이 땅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신다(마 26:11; 요 12:8; 막 16:19).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엄위와 섭리와 형언할 수 없는 은혜’(maiestas, providentia, ineffabili gratia)에 있어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28:20).
주님께서는 몸으로 하늘에 ‘올려져’ 가셨다’(행 1:9; 막 16:19; 눅 24:51). 그리고 ‘거기로부터’(빌 3:20)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행 1:11). 그리스도의 ‘거주지’(domicilium)는 하늘이다(4.17.12, 26-27).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 신성에 따라서는 그 분은 ‘어디에나’(ubique) 계신다. 그러나 인성에 따라서는 하늘에 계신다. 부활로써 육체에 불멸성이 부여되었으나, 그것의 고유한 속성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육체의 현존’(praesentia carnis)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승천 후에도 인성에 따라서는 ‘지역적으로’(localiter) 현존하신다. 성도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게 됨은 ‘성령의 은밀한 능력’(arcana virtus)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은 성례의 약속을 효과적으로 실현한다. 성령께서는 표상에 의해서 ‘의미되는 본체’(res signata)를 ‘드러내시고 제시하신다’(praestat et exhibet).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심령에 ‘증거하시고 인치신다’(testatur et obsignat). 성령의 ‘작용’(efficacia)은 객관적인 성례의 거행과 주관적인 성도의 감화에 동시에 미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승천으로 인성에 따라서 육체가 지상을 떠나셨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그 육체의 ‘영적인 현존’을 이루기 위해서였다(4.17.10, 28).
성찬에는 ‘말씀의 선포’(praedicatio verbi)가 필수적이다. 제정의 말씀에 따른 약속은 표징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을 향하여 주어진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그 약속을 ‘믿음의 분수대로’(analogia fidei)(롬 12:6) 받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만이 성령의 ‘은밀한 힘’(vis arcana)으로 그 분과 하나 된 가운데 ‘영적인 먹음’(spiritualis manducatio)을 통하여서 그 분의 살과 피에 참여한다. 이 먹음은 영적이나 ‘참되고 실재적이다’(vera et realis).
이러한 성찬의 신비는 이해되기보다 경험된다. 그 역사는 오직 성령의 ‘불가해한 능력’(incomprehensibilis virtus)으로 말미암는다(4.17.32-34, 39-40).
성찬은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대로 ‘마음을 들어 올려’(sursum corda) 하나님의 영원한 영적 양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4.17.31, 35-36).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동시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화목과 평강을 고백하는 예식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의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자라가는 거룩한 잔치이다(4.17.38, 42).
-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중에서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