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묵상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마태복음 6:9-13 -
샬롬선교회
〔마태복음 6:9-13〕“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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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어휘]의 미묘한 차이점
마태복음 6:11 “우리가 우리에게 죄(負いめ;빚)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누가복음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罪)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세 가지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마태복음의 '죄(負いめ;빚)'가 누가복음에서는 '죄(罪)'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의 '용서했다' ἀφήκαμεν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서는 '용서한다' ἀφίομεν라는 표현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는 없는 '모든'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 번역어와 원어
'빚진 자'로 번역된 '오페일레-마' όφείλημα는 명사로 복수형이며, debts.
'빚진 자' όφείλετης는 명사형 복수형이며, 채무자.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아' άμαρτια는 '잘못'을 뜻한다. 명사로 복수형 sins.
'용서하다'라는 동사 '아피에-미' αφίημι. 탄원형 '아페스' αφες, 용서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이 기도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차이를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하다.
1.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의 밀접한 관계
'주기도문' 후반부의 두 번째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빚(죄)의 용서'가 '자신들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한 것이다. (에베소서 4:32), "서로 용서하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골로새서 3:13)라는 말씀처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무조건적인 용서가 대 전제이고, 그 전제 위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가 선행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의 밀접한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왕)의 긍휼로 막대한 빚을 탕감받은 종, 그 종이 자신이 탕감을 받은 빚에 비하면 아주 작은 빚을 진 자를 용서하지 않고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던져 넣었다는 예수님의 비유(마태복음 18:21~35)에서 보듯이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부채, 빚, 잘못을 온전히 용서받은 것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에게 빚진 자, 혹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는 것과는 동의어로 쓰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다 용서하오니"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더구나 용서하는 것은 잠시도 쉬지 말고 즉시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가기 위해 이 기도는 매우 중요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2. 이 기도는 평화를 만드는 자(Peace Maker)가 되기 위한 기도이다.
또한 이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가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기 위해서도 중요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으로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늘의 사자들은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로다.
땅 위에는 평화, 그 뜻대로 행하는 자들 위에 있을지어다." (천군찬가)
이 '천군찬가'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찬송가에 수록되기 시작한다. 찬송가 98장에서는 '영광이 하나님께 있으라, 평안이 사람에게 있으라', 찬송가 119장에서는 '비는 내리고, 하나님께 있으라, 평안이 사람에게 있으라'고 하는 것처럼 '평화'가 '편함'이나 '온화'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안타깝게도 성경이 전하는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 평화에 대한 생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로마식 평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실현되는 억지적 평화이다. 이 평화관은 오늘날에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의 국가 전략으로 존재한다.
두 번째는 '그리스적 평화'로 마음의 평온, 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평온적 평화, 이 평화관은 많은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다.
세 번째는 '히브리적 평화' 혹은 '성경적 평화'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공동체적 사회적 평화이다. 단순히 다툼이 없는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화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하나님의 주권으로 창조되는 축복이 넘치는 평화로, '샬롬'이라는 단어가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평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편지에는 그 '평화'의 개념을 표현하는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화평이시며, 둘을 하나로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자기 육체 안에서 적대감을 버리신 분이시다. 적대감은 여러 가지 규정으로 세워진 계명의 율법이다. 이 일은 두 사람을 그분 자신 안에서 새로운 한 사람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며, 또한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함이다. 적대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라졌다." (에베소서 2:14~16)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성경은 인류를 이 두 범주 안에 두고 있다) 사이에 뿌리 깊은 '장벽'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장벽'은 평화를 가로막는 분열의 뿌리이며, 그 안에 편견과 적대감을 품고 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적대감을 갖게 될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을 때, 자신이 상처받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이 손상되고 파괴되고 빼앗기려고 할 때, 그런 위험을 느낄 때다. 적개심은 철저하게 적을 제거하려는 감정이며,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적개심은 '지극히 자기방어적인 본능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적대감을 가질 때 사람은 몸을 굳게 하고 방어한다. 공격에 대비하고 즉각적인 반격에 나설 수 있도록 대처한다. 적의가 증오를 낳고, 증오가 증오를 낳는 연쇄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왔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도 이 '적대감'이 존재했다. 유대인의 자기방어적 감정으로 이방인과 자신들 사이에 '장벽'을 만들었는데, 그 장벽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양한 방법을 규정한 '계명의 율법'이었다. 이 '계명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폐기하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벽이 무너지면서 적대감이 들어올 틈이 없어진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선언이 성립된다. 자신을 스스로 지키려고 할 때(설령 하나님의 일이 수반된다고 해도) 적대감이 생기고,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자신을 스스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적반하장'적인 죄이다. 죄의 본성인 자기방어 본능이 하나님께 맡겨지고 하나님의 방어가 보장되지 않는 한 적대감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다양한 영역에서 적대감은 존재한다. 교회 간에도 그렇다. "저기 교회에 가면 안 돼. 신앙이 이상해지기 때문이야. 저기 가면 신앙이 이상해지니까. 저기는 성경적이지 않으니까"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학에 의해 적대감은 쉽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적 심리가 숨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도 '벽'을 만들고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 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의지하는 전통이나 신학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만이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적대감을 버리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갈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도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다 용서하옵나이다. -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화평케 하는 자',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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