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례와 족보의 의미

- 누가복음 3:21-38 -

샬롬선교회 


[누가복음 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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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례와 다음 족보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묵상해보고자 한다. 언뜻 보면 두 가지가 별개의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누가는 어떤 의도로 예수님의 족보를 여기에 가져왔을까?

 

예수님의 세례는 다른 사람들처럼 '회개에 의한 세례'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세례도 아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위 그림에서 보듯이 죄인인 우리 인류와 하나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일치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재시도'하기 위한 일체화의 세례인 것이다.

 

1. 예수님의 취임식으로서의 세례

 

(1) 기도와 성령의 관여

 

예수님의 세례 기사는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누가복음에 있고, 마태복음에는 없는 부분이다. 그 부분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신다'는 부분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는 것은 마태나 누가도 마찬가지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기도할 때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덧붙인다는 것은 누가복음은 앞서 쓰여진 마태복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와 성령의 관계는 누가복음에서 강조되고 있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사건은 제자들이 기도에 전념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말씀하신 11장에서도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4장에는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가셔서 40일 동안 기도의 시간을 보내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종종 광야로 물러나서 기도하셨다. 기도와 성령의 밀접한 관계를 누가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강조하고자 한다.

 

(2)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이제 공식적으로 본연의 사명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이 비둘기로 상징되는 '온유한 자'로서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르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며, 아들이 행하는 모든 기적은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은 아버지와 전혀 다른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아버지를 의지하며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심지어 십자가의 고난까지 따르신다. 이러한 온유함을 지탱하는 것이 예수님 곁에 계신 성령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인류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비둘기로 상징되는 '온유함'은 하나의 힘이다.

 

(3)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예수님의 세례 후 하늘로부터의 성령의 강림과 아버지의 음성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임직식을 의미한다. 임직식이라고 해도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었다. 아버지의 음성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이다. '사랑하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가페토스' αγαπητος(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또한 '기뻐하다'는 만족한다, 뜻대로 된다는 의미이며, 게다가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그런 존재로 이미 결정되어 있고, 현재도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 아버지의 음성을 잘 듣고 걸어가는 것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어릴 때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과 비슷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이 사랑의 음성을 날마다, 매순간마다 듣고 걸으셨기에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훌륭한 취임식, 임명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 누가가 기록한 족보가 의도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유명한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있지만,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상당히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를까?

 

(1) 족보의 방향(흐름)

 

마태복음의 경우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무려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여성의 이름 유무

 

마태복음의 경우 4명의 여성 이름이 등장한다. 모두 각각 사연이 있는 여인들인데, 그 중 두 명은 이방인(라합은 가나안 사람, 룻은 모압 사람)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경우 한 명의 여성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여성을 소중히 여기는 누가복음의 모습이다. 그 점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요셉의 아버지가 '헬라의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헬라의 아들'은 마리아의 아버지로, 요셉으로 치면 의붓아버지에 해당한다. ,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의 모계 족보인 것이다. 그것을 계속(거의 모르는 이름이 계속 이어지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 다윗의 한 단계 전의 이름은 '나단'이라는 이름이다. '나단'은 다윗의 아들이다. 다윗과 다윗이 결혼한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5명이지만, 첫 번째 아이는 다윗의 죄로 인해 죽었고, 그 다음이 솔로몬, 그리고 그 다음이 '나단'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나단'의 후손이다.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의 족보는 같은 다윗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음 세대부터 갈라진 것이다.

 

(3) 인간의 죄의 근원

 

그런데, 누가복음의 족보의 중요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태가 아브라함에서 멈춘 반면,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인간의 죄의 근원인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재시도'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마태복음의 경우, 아담으로 시작하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이스라엘 전체에 시선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아기 예수의 이집트 탈출, 세례, 40일 광야의 유혹, 5번의 설교, 십자가와 부활 등의 사건은 각각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집트에서의 고난', '출애굽과 홍해 횡단', '40년 광야 방랑', '모세 5', '포로와 해방' 등의 사건에 대응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예수님이 '재시도'하는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해 누가의 경우는 '예수를 마지막 아담으로 위치시켜 아담이 가져온 죄의 짐에서 인류를 해방시키는 구세주임을 가리키고자 한다.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보는 사상은 이미 사도 바울이 가르쳤다. 누가는 바울의 제자이며, 바울과 함께 유럽에서 복음 선교를 한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의 사상에 익숙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울 서신은 누가복음이 쓰이기 훨씬 이전에 쓰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2 이후에서 히브리인 특유의 집합적 인격 개념을 사용하면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각각 다른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담은 죄로 인해 죽음을 가져온 존재의 시작이고, 그리스도는 자신으로 인해 생명을 가져오는 존재의 시작이다. 바울은 말한다. "한 사람(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9)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첫 취임식에 이어 이 예수야말로 '마지막 아담'으로서 죽음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족보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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