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갈라디아서6장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본문은 범죄자에 대해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하여 교훈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신령한 자곧 성령을 받은 자요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는 자이다. 성도는 범죄자를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충고하고 또 필요하면 책망도 해야 한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규모 없는 자들[무질서한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했다(살전 5:14). 히브리서 3: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도는 범죄자를 충고하고 책망하고 바로 잡되 교만하거나 거친 마음으로가 아니고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25에서도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였다.

 

성도는 또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은 너도 시험을 받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성도 각자가 시험을 받지 않고 범죄치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 각자의 성화가 중요하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것은 죄 안 짓는 거룩한 삶이다. 성도에게 성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가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5:16)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며(벧전 2:9)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벧전 3:1).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설교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마음의 기쁨과 평안과 힘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성도의 삶의 첫 번째 목표는 죄 안 짓는 것이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들을 서로 지라는 것은 남의 드러난 죄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라는 뜻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그런 다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죄의 용서를 상징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의 결점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서로 사랑하려면 서로의 결점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성도가 짐을 서로 질 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3] [이는]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속임임이니라].

 

우리는 짐을 서로 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남의 드러난 실수와 범죄를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고 고상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비슷하게 부족한 사람이며, 어느 날 우리 자신도 다른 이의 죄와 비슷한 죄를 범할지도 모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자신을 속이거나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4-5]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크게 여기지 말고 각자 자기 일을 살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자랑거리가 있으면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만 있고 남과의 관계에서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알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안다.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모든 좋은 것은 현세적인 좋은 것들을 가리킨다. 말씀의 봉사자들의 사역은 귀하고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시는 일이다. 우리가 영적인 것의 가치를 안다면, 육적인 것을 함께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 봉사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후한 공급을 하였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져 레위 지파 사람들의 생활비로 주어졌다. 한편, 제사장들의 수는 레위인들의 수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레위 지파가 받은 십일조의 10분의 1을 받았다. 그들은 십일조 외에도 백성들의 제물들의 일부분을 그들의 몫으로 받았다(18:12, 29). 이와 같이, 구약시대의 십일조 제도는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 곧 성전 봉사의 일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유여함을 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운영의 한 원리를 보인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가 없지만, 복음 사역과 교회의 일에 전무(專務)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가 구약의 십일조 정신으로 교역자들과 교회 직원들에게 물질적으로 공급한다면, 목사들은 성경 연구, 독서, 설교 준비, 심방 등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고, 목사 후보생들은 충실한 신학 교육과 목회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 직원들은 교회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 유여함이 교회 봉사자들을 해이하고 불성실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 간의 문제이다. 성도들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에서 보여주신 정신을 따라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물질적으로 너그럽게 공급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거둘 것임이니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원어는 단순히 속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아마 마귀에게나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속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들을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근거로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은 자연 세계나 영적 세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사무엘상 2:3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사 엘리에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7:12).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야 한다.

 

[8] [이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거둘 것임이니라].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은 육신의 죄성에 이끌려 행하는 행위들을 말한다. 그런 행위들의 결과는 썩는 것 곧 멸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것곧 성령에 이끌려 행하는 행위들, 곧 성령의 열매를 맺는 행위들은 영생에 이른다. 이것은 사람이 이런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자는 육체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한다. 그러므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 전도하고 선을 행하는 것 등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영생 얻는 자들의 표요 장차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들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이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디도서 2:14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 쉽다. 남이 그를 몰라주고 오히려 그를 비난할 때, 또는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좋은 결과를 볼 것이며, 또 최종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결과를 볼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는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더욱이라는 원어(말리스타)특히라는 뜻이다(KJV, NASB). 선행의 대상에는 구별이 없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모범이 되었다. 사도행전 2:44-45는 증거하기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했다. 또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증거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는 범죄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하며 때때로 범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한 마음으로 범죄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

 

둘째로, 성도는 자신이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며 조심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안 짓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죄를 안 지으려면 우리는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죄를 안 짓는 방법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셋째로, 성도는 다른 이의 결점에 대해 관용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참된 사랑과 용서의 심정이다.

 

넷째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씀의 봉사자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하여지는 길이다. 몸의 죄성을 따라 사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생에 이르는 성도들의 마땅한 삶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중요한 한 목적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일곱째로,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아야 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거나 도리어 오해를 당할 때 또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쉬우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어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6장: 자유자의 삶--선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