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결혼, 유언과 고별사


칼빈의 결혼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결혼했다. 그의 친구 파렐은 칼빈에게 부자요 매력적인 여인을 소개했지만 그는 자신의 결혼관을 이렇게 피력했다. “여성으로서 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우아함이란 교양, 부드러움, 겸손, 훌륭한 가사관리, 인내 등입니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96. 칼빈은 자기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 중 재세례파 교인으로서 벨기에에서 스트라스부르그로 왔던 미망인 이들레뜨 드 뷰렌 (Idelette de Buren)15408월에 결혼했다. 이 미망인은 칼빈의 성경 주석에 영향을 받아 개종한 여인이었다. 칼빈과 뷰렌은 세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다 출생 직후 사망했으며, 1549년 뷰렌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그녀와의 결혼생활도 9년을 넘기지 못했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던 칼빈은 아내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비록 아내의 죽음이 나에게 쓰라리도록 고통스럽지만, 아직 할 수 있는 한 슬픔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마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력한 자기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오래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나의 슬픔은 보통의 슬픔이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좋은 동지를 잃었습니다. 어떠한 가혹한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녀는 나의 자발적인 반려였을 것입니다. 망명과 가난 속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음 속에서조차 말입니다. 생전에 그녀는 내 사역의 충실한 조력자였습니다. 그녀에게서 나는 아주 사소한 방해조차 결코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병들어 누워 있는 동안 그녀는 줄곧 자신보다도 자녀들에 관해 더 걱정했습니다. 그녀가 근심을 억제하느라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힐까 두려워, 임종 삼일 전 나는 기회를 보아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나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즉시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이미 하나님께 맡겨 두었습니다.” 154947Viret에게 보낸 편지. W. J. 부스마, <칼빈> 이양호, 박종숙 공역 (도서출판 나단, 1991), 54.


................................................................................................................... 


칼빈의 유언과 고별사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칼빈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질병에 시달렸는데, 그것도 한두 가지 질병이 아니라 위장병, 폐결핵, 에스마, 관절염 등 많은 병으로 고생했다. 가정적으로는 결혼생활이 9년을 넘지 못했고, 세 아이들도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부유하고 감동적인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가 남긴 유언장에서 그의 영적 부유함을 볼 수 있다. 1564425일 칼빈은 자신의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유언장을 구술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네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 된 나 요한 칼빈은, 많은 질병으로 연약했지만, 보잘것없는 피조물인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죄와 연약함 가운데 있는 나를 참아오신 하나님께, 더욱이 나의 부족한 사역을 통해 그분을 섬기는 놀라운 은총에 참여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나님의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이나 피난처를 내가 갖고 있지 않음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주신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또 나의 모든 죄과가 도말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공로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피 흘리신 우리 구속주의 위대한 보혈로 하나님께서 나를 정결하게 하셔서, 그분의 면전에서 서게 될 때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도록 해 주시기를 겸손히 간청합니다. 이에 더하여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의 분량에 따라 신실하게 성서를 해석하고자 노력하였음을 밝힙니다. 진리의 적에 대항하여 주도했던 모든 논쟁들에서 나는 어떤 교활한 술수나 궤변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싸웠습니다. ! 그러나 나의 의지, 나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차갑고 게을러서 나는 모든 점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함이 없다면, 나의 모든 열정적인 노력은 단지 연기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그분이 나에게 주신 은총이 나를 더욱 죄인으로 만들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의뢰하는 유일한 것은 그분이 모든 비참한 죄인들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자비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나머지 일들에 관해서는, 내가 죽은 후에 축복된 부활의 날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나의 육신이 관례에 따라 매장되기를 바랍니다. Hans J. Hillerbrand(ed.), The Reformation: a Narrative History Related by contemporary Observers and Participants(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207-208.

 

칼빈은 1564(55) 425일 유언장을 구술했다. 이 유언장은 단순한 유언장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그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진솔하게 표현하는 유언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칼빈의 고별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유언장의 내용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말씀의 종, 칼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했다. 여기서 종이라는 말은 노예라는 말이다. 우리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살든지 아니면 세상의 노예(정욕의 노예, 물질의 노예, 권력의 노예)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다.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다. 사도 바울은 고난이 가득 찬 영광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선택함을 받았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였다. 그는 노예로서 일생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일생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았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말씀의 종인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에 있는 서신 중 2/3를 기록했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칼빈도 자신을 말씀의 종(I, John Calvin, minister of the Word of God)으로 소개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설교했던 그는 말씀의 종으로서 거의 모든 성경을 주석했고, 수많은 논문과 편지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한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사심 없이 선포하고 그대로 순종하면서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위대한 말씀의 종이다.

칼빈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으며,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1.7.4. 우리는 이 사실을 논리나 철학적인 추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로 확신한다. 성경이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들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읽어야 한다. 이 말은 성경을 문학 책이나 철학 책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던 롯의 사위들은 어떠했던가(19:14)? 그들은 유황불에 타 죽었다. 그렇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 성경을 올바로 읽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그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된다. 바로 이 진리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한다(8:32). 칼빈은 말씀의 종으로서 자기의 심장을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섬겼고 또 그 말씀대로 살았다.

 

2) 하나님께 감사


칼빈은 겁 많고 소심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을 잘못된 우상숭배와 죄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고, 오래 참아 주시고, 끝까지 인도하시고, 당신의 복음역사에 쓰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은총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이 칼빈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덴마크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인 소렌 킬케고올(Soren Kierkegaard)은 그 마지막 저널에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감사드리는 것이라고 했다(All we have to do is to give thanks to God because everything is out of his love). 그렇다. 우리가 일생을 마치는 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이다.

 

3) 올바른 구원론의 재정립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문제는 구원의 문제였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구원론을 재정립하였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기독교 강요>(1536)의 제목에서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강요> 제목은 기독교 강요, 구원론에서 알아야 할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빠짐없이 다룬다. 경건에 열심히 있는 사람도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며, 최신판이다.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서언에서 이 책은 하나님의 신앙고백으로 왕에게 헌정하고 있다(저자: 노용의 칼빈, 바젤, MD XXXVI)”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해 있다. “나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나님의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이나 피난처를 내가 갖고 있지 않음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해 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 근거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예정을 믿음을 통하여 복사할 수 있다고 칼빈은 에베소서 1장 설교에서 말했다.

 

4) 성경해석


칼빈은 진리의 대적들에 대해서 어떤 교활한 수단이나 술수나 궤변도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싸웠다. 그는 설교, 저작, 주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고 순결하게 선포하기 위해서, 성경을 충성스럽게 해석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 말은 칼빈이 성경해석에서 믿음의 유추(analogia fidei, 12:6 믿음의 분량대로)에 충실했음을 말해 준다. 칼빈 자신은 이 말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잔대학의 신학 교수인 윌리암 바카누스(William Bucanus)는 교리문답서인 그의 노작 신학강요”(Institutions Theologiae: Geneva, 1605)에서 신앙의 유추란 성경 여러 곳에서 해석되었으며, 사도신경과 십계명에 일치한 성경의 영원한 의미이며, 또한 신성의 모든 부분의 원리요 일반적인 견해이다라고 정의했다. <기독교 강요>, 김종흠·신윤복·이종성·한철하 공역(생명의말씀사, 1991), 46.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가르쳐 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로 이해했다.

 

5) 장례식


흰 수의가 입혀지고 소나무 관에 눕혀진 칼빈의 장례식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평범하였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비문도 쓰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불과 몇 달 후에 외국학생들이 칼빈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무덤들 사이에서 그곳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칼빈의 생애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6) 재산분배


칼빈은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가족에게 전부 분배했다. 이것은 칼빈이 극히 검소하게 일생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상한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7) 시의회 의원들에게 한 고별사


칼빈은 시의회에 가고자 했으나 건강 때문에 시의회 의원들이 칼빈을 찾아왔다. 그때 칼빈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고별사를 했다. 첫째, 자신이 하나님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움을 준 시의회 의원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자신은 제네바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일했다고 말했다. 둘째, 자신은 교리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하게(purely, 오염되지 않게), 성실하게(faithfully, 정통신학) 가르쳤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약 올바르게 전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에게 임할 것을 각오하면서 전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했다. 셋째, 칼빈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며 고별사를 마쳤다. “하나님만이 왕들과 국가의 존폐를 좌우한다.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그리고 겸손하라, 하나님만이 왕 중의 왕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자는 하나님이 그를 반드시 영화롭게 한다. 성경대로 예배하라. 서로 사랑하라.” 칼빈이 그들을 위해 축도(祝禱)하니 시의회 의원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John Calvin, Tracts and Treatises on the Reformation of the Church, Vol. I, "Life of Calvin," cxxvii-cxxxi.

 

8) 제네바 목사들에게 한 고별사


1564428일 제네바 목사들이 칼빈을 방문했다. 그때 칼빈은 그들에게 고별사를 했다. “그대들이여,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시오.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다.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시오(embrace each other with mutual love).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긴 교회에 무엇인가 빚지고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시오. 교회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교인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힘을 기울이시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는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쳐서 교인을 떠나게 하는 것임을 늘 명심하시오(think again and again).” Tracts and Treatises on the Reformation of the Church, cxxxi-cxxxii. 칼빈은 목사들에게 이렇게 권면한 후 눈물을 흘리는 목사들과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9) 칼빈의 죽음


1564527일 저녁 8시 하나님의 종 요한 칼빈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베자는 칼빈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죽은 사람이기보다는 잠자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의 죽음과 동시에 공교롭게도 태양이 지고, 하나님의 교회의 한 위대한 빛이 하늘로 취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208에서 재인용.

 

베자는 계속하여 칼빈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네바 시의 표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날 밤과 다음 날, 도시는 온통 비통의 도가니였다. 시정부가 주의 선지자를 위해 슬퍼하였고, 가련한 양떼들은 그들의 신실한 목자를 잃은 것을 애통해 하였다. 아카데미는 학교의 참된 박사요 지도자인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요 하나님 다음 가는 이 위로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함께 울었다. <하나님의 사람 칼빈>, 197-98. Hillerbrand, The Reformation, 208-209.

 

제네바 시의회의 서기는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에 그러한 고상함을 각인하셨다라고 기록했다(Dieu lui avait imprime une caratere d'une si grande majeste). <하나님의 사람 칼빈>, 208. 칼빈의 유언대로 그 무덤에는 비문도 비명도 없었다. 칼빈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위대한 학자인 두메르그는 칼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쯔빙글리,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요, 희랍 정신을 지닌 영웅, 다음 세대에서야 비로소 그 가치가 완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원대한 스케일의 계획을 가진 정치가. 그의 운명이 우리에게 고대 희랍 비극의 종말을 연상시키는 이 사람은 불길한 패배를 당한 채 전장에서 죽었다. 하늘의 구름이 그가 죽은 곳에, 그의 조국에, 그의 필생의 사역 위에 모여든다.

루터, 독일 서사시의 챔피언, 보름즈의 영웅, 오늘날까지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의 경건과 언어, 그리고 시문을 풍부하게 살찌운 이 사람은 피곤에 지치고 불길한 염려에 가득한 채, 자신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는 후계자를 발견하지 못한 채 죽었다. 또 다시 하늘의 구름이 그 무덤 위에, 그의 조국 위에, 그리고 그의 필생의 사역 위에 모여 든다.


칼빈은 죽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모든 일들이 그대로 고요히 남아 있었다. 평화와 절대적인 질서 속에서 그는 국가와 교회를 떠났고, 설령 베자보다 덜 탁월했다 하더라도, 그의 후계자는 별 어려움 없이 칼빈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일들이 그대로 고요하게 머물렀으며, 또한 그런 상태가 계속 될 것이다. 반죽이 빚어졌다. 반죽을 빚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죽은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오른다. 많은 나라들에서, 여러 해 동안, 수세기 동안, 심지어는 신세계 저편에서도 누룩이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그가 증거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과 같이, 그의 사역과 말들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반죽을 빚은 이 사람이 자신을 넣은 이 누룩의 활동 속에서 최소한의 자신의 몫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확신을 가진 채, 그의 신념이 옳았음을 인정받은 채, 이 제네바의 개혁자는 어떤 묘비도 눈에 뜨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무덤 속에 누워 있다. 그가 원했을 유일한 한 구절, 겸손하면서도 승리에 넘치는 한 구절만이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하나님의 사람 칼빈>, 210-211, (각주 214)에서 재인용.


http://shmission.com/xe/38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