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당할 때에
눅8:43-48 -
서언;
*시련(試鍊)의 의미는 ?
- 시련으로 번역된 헬라어 ‘도키미온’(dokimion)은 악을 행하려는 유혹의 의미보다는 신앙이 나 실력을 인가할 목적으로 어떤 것을 시험하여 본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약 1:2-4; 벧전 1:7).
* 믿음의 시련 :
-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낸다고 말하며 시험을 당할 때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권면하였다(약 1:2-4).
- 또 베드로는 믿음의 시련이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하였다(벧전 1:7).
-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信仰の試練は、火を通して精練されてもなお朽ちて行く金よりも尊いのであって、イエス・キリストの現われのときに称賛と光栄と栄誉に至るものであることがわかります。
- 금과 은을 불 속에서 제련하여 연단하는 것과 같이 성도는 시련을 통하여 순전한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롬 5:3-4).
- [롬5:3-4]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3 そればかりではなく、患難さえも喜んでいます。それは、患難が忍耐を生み出し、4 忍耐が練られた品性を生み出し、練られた品性が希望を生み出すと知っているからです。
본문;
1. 한 여인의 시련; 12년간 혈루증에 걸려 고통을 당한 여인
- 12년의 세월, 혈루증으로 인한 고통
- 해결되지 않는 절망
2.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 옷가(눅8:44)는 곧 옷자락은 히브리어로 “찌찌트”라고 하는데 - 민수기15:38에 “옷단 귀에 술” 곧 “찌찌트”를 칠십인역은 헬라어로 “크라세페돈”으로 번역하였는데, 누가복음에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여인이 만진 예수님의 옷자락은 바로 “옷술”을 만진 것이다.
- 왜 다른 부분이 아닌 옷술(찌찌트)을 만졌다는 것이 중요할까?
예수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기도쇼울(탈리트)과 옷술(찌찌트)가 달린 옷을 입었다. 전통적으로 탈리트와 옷술은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었고, 가족 관계가 아닌 외부인이 만질 수 없는 것이었다.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만진 것은 가족 외에는 만질 수 없는 그 옷술을 만진 것이다.
3. 예수님은 그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셨다.
-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찾으신 후에 “딸(슈라테르)”라고 불러주셨다. 그 여인이 예수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결혼한 여인을 뜻하는 “여인(구네)”라는 말로 부르지 않고 “딸”이라고 불러주셨다.
-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딸”이라고 부른 것은 그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술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치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놀랍게도 사복음서에 많은 치유의 사건이 나오지만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딸”이라고 부른 경우는 혈루증에서 놓임을 받은 이 여인뿐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곧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私たちが神の子どもと呼ばれるために、―事実、いま私たちは神の子どもです。―御父はどんなにすばらしい愛を与えてくださったことでしょう。世が私たちを知らないのは、御父を知らないからです。
4.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셨다.
어떠한 믿음이 그 여인에게 구원을 받게 하였을까?
- 예수님께서 “딸”이라고 하신 것은, 그 여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 우리 모두를 향하여 “너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그리하면 너희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하시는 가르치심이 아닐까?
결언:
-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였다.
主はその御目をもって、あまねく全地を見渡し、その心がご自分と全く一つになっている人々に御力をあらわしてくださ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