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에주어

弟子たちに与え
막 6: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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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오병 이어(五餠二漁)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평행 본문은 마 14:13-21과 눅 9:10-17에 있다. 한편 본 이적은 사복음서(6:1-15) 모두가 소개되는 유일한 기사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장소는 게네사렛 호수 동쪽 해안 지대일 것이다. 마가의 기록에서 특징적인 것은 서론이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을(8:1-10) 그 후편으로 다루고 있으며 제자들과의 대화가 좀더 많은 점이 돋보인다.

    

=6: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고하니.--- 이 구절은 13절에 이어지는 것이다. 즉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복음 전파와 치병 기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활동 기간이나 그 활동 내용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예수의 위임을 받아 갈릴리 전역에 흩어져 선교 사명을 완수하고 동아 온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그들이 감격어린 음성으로 전하는 모든 선교 활동의 보고를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시는 성실함을 보이셨다(9:10).

    

=6:31 따로 한적한 곳에...쉬어라. --- 제자들의 활동 보고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상당히 피로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제자들을 아끼는 스승으로서의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장소가 매우 분주한 장소인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의 전형적인 묘사법으로서 예수가 가는 곳에는 항상 군중이 쉴새없이 모여들고 있는 생동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32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예수와 제자들이 무리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육지에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아마도 그들은 호수 북동쪽으로 갔을 것이다. 이때 예수를 좇던 무리들은 황급히 요단강 본류에서 갈릴리 호수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얕은 곳을 따라 요단강을 횡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6:33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 이 구절로 보아 군중들이 배가 떠난 뒤 뒤늦게야 배에 탄 자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문맥상 적절치 못하다. 호히려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예수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호수 주면에 있는 여러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마을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가는 배를 보고(아마 당시 역풍으로 인해 배의 진행이 지체된 듯함)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徒步)....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으로 휴식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는 예수의 일행과 그 일행을 따라 달리는 군중들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 앞 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군중들이 예수가 탄 배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 예수 일행이 도착하기 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예수는 배를 대고 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다. 이것 역시 마가의 특유한 묘사이다. 항상 배, 바다, 군중이 함께 증장한다(3:7-9 ; 4:1,36 ; 5:2, 21).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 자신을 만나려고 모여드는 군중들을 보고 예수는 휴식의 장()을 빼앗긴데 대한 불쾌한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와 제자들의 피곤함을 모두 잊고 깊은 감동과 연민의 정을 강하게 느끼셨다.

실로 예수의 이 불쌍히 여기는연민의 정이야말로 모든 구원과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14:14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목자 없는 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 이는 민 27:17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간혹 사용하신 표현이다(9:36).

이 말은 먼저 자기 의무를 잊은 거짓 목자에 대한 비판적 이해할 수 있다(왕하 22:17 ; 34:5). 왜냐하면 당시 율법학자, 바리새인, 서기관 증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무리들이 예수를 이렇게 열성적으로 따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 행위가 당시 종교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이 무리들에게 진리를 공급해주지 않았음으로 무리들은 진리에 심히 굶주려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6:35-36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 급식 이적의 치밀한 도입부를(30-34) 거쳐 이제 본론부에 들어선다.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언제쯤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동안 예수가 가르쳤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시각은 일반적으로 저녁 먹을 시간 곧 초저녁 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가르치느라고 시간이 지난 것을 못 느끼는 듯하며 그 시간의 경과를 제자들이 예수에게 보고하며 제안하고 있다. 그 제안은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고 사람들을 해산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곳이 빈들곧 보통 때는 인적이 없는 한적한 광야이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6: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예수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여 청중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는 강조적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너희가”(훼메이스) 먹을 것을 주라 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능력을 과시한 명령이기 보다 오히려 제자들의 절대적 무능을 일깨우고 또 그들의 당신께 대한 영적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라 본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의 명령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가 필요하다는 조로 예수께 반문을 한 것이다. 제자들은 청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이 파악한 청중의 숫자를 통해 식사에 필요한 예산을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200데나리온은 당시 한 사람의 하루 임금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경우 한 사람이 약 8개월 정도 벌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혹자(Bruce)의 주장대로 당시 제자들에게 이 만한 돈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제자들에게는 매우 큰 돈이었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요 6:7에서 빌립이 200데나리온을 사용해도 청중들을 먹이기에 부족하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계산에 밝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불합리하게 보이는 명령을 내리고 계신 그분의 뜻과 그분의 초합리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無知)했다는 사실이다.

    

=6:38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 예수는 직접 문제 해결에 참여한다. 먼저 예수는 즉시 구할 수 있는 떡이 몇 개인지 제자들에게 알아보라고 명한다. 제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신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자신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 예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문제의 해결자로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예수께 전적인 의뢰를 하는 참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비록 하찮은 존재이나 예수의 도구로 사용되기만 하면 위대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요(4:17),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27).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다. 떡과 물고기의 숫자는 4복음서 모두 동일하다.

다만 요한 복음에서는 떡이 구체적으로 보리떡이고 소유자가 어린 아이임을 덧붙이고 있다(6:9).

    

=6:39-40 명하사....떼를 지어...앉게 하시니....앉은지라. ---- 예수의 행동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으로 나아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청중들을 무리지어 앉게 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데를 지어”(쉼포시아 쉼포시아)란 마치 집안에서 식탁 주위에 앉은 것처럼(주로U자형으로 앉음) 옹기 종기 모여 앉은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게 모여 앉은 한 때가 50명 혹은 100명씩 되는 규모였다.

    

한편 마가는 그들이 앉은 장소가 푸른 잔디위임을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50명씩 앉게 하라고 명하나(9:14) 푸른 잔디라는 말은 없다. 마태와 함께 푸른 잔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다. 먼저 35절에서 언급한 빈들이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신선하고 생동감 있는 들판임을 암시해 줌으로써 식사를 위한 준비와 함께 한층 더 희망적인 분위기를 창출한다.

푸른 잔디에 앉게 하는 예수의 지시는 시 23편을 연상케 한다. 즉 목자가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듯한 모습을 이 구절에서 보게 된다.

    

결국 예수는 설교도 하시고 푸른 초장 위에서 음식까지 먹임으로써 민중의 손색없는 목자가 된다. 이는 34절에 나오는 예수의 탄식과 잘 어울린다. 푸른 잔디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편히 과 평화로운 풍경이다.

참으로 예수 앞에서 쉼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마가는 그려내고 있다. 그와 더불어 푸른 잔디는 그 때가 팔레스틴의 우기가 막 끝난 후인 3,4월경이었음을 보여준다(14:19). 특히 요한은 이 때를 유월절이 가까운 때(니산월 14, 태양력으로 3, 4월경)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6:4).

    

=6:41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제자들에게 주어. ---- 예수는 유대의 전통적인 공동 식사 관습에 따라 자신이 가장의 위치에서 그리고 그 모인 무리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고 먼저 하늘을 향해 감사와 찬양을 한다. 특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상징한다(11:41 ; 17:1).

그리고 이때 드리는 기도의 형식은 찬송하리로다! 땅에서 양식을 내신 만유의 왕이신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 !”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한 다음, 직접 떡을 떼어 제자들로 하여금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고 또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다. 이것 역시 유대 공동 식사의 관습 곧 가장 또는 그 식탁의 주빈이 음식을 떼어 나누어주는 전통적 관례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떼어”(카테크라센)란 직설법 부정 과거 시상으로서 그 행위의 사실성도 장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언급된 주어”(에디두)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눠주어 분배케 하셨음을 암시한다. 실로 그 떡은 떼시는 예수의 손 안에서 계속 커져서 예수께서 무리들을 모두 먹이실 때까지 불어났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이적 사역을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 아직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단어는 기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가 골고루 돌아갔음을 밝힘으로써 창조의 능력으로 만물을 주장하시는 예수의 초월적(超越的)인 권능을 단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

    

=6:42 다 배불리 먹고. --- 이 표현은 매우 함축적 의미를 시사한다. 우선 이제까지 진행되어온 이야기를 총 마감하고 있다.

즉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사실상 불가능했던 환경, 그리고 궁여 지책(窮餘之策)으로 등장한 아주 작은 양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38정 주석 참조)의 빈약함에 대조되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부르게 되었다는 말로 기적을 완결을 짓는다.

또 다른 의미는 배부르다는 말은 충분히 만족해 하는 표현이다. 즉 더 이상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다. 충분한 식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세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식사가 공동체 안에서 교제의 장이 된다는 점이다.

    

=6:43 남은 떡 조각..... 열 두 바구니에 차게.---- 앞 절에서 밝힌 기적의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 그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즉 모두가 배불렀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남았다는 말은(그것도 최초의 음식 양보다 훨씬 많게) 넉넉한 공동 식사였음을 확인해 준다.

    

여기서 남은 떡과 물고기를 거두어 담은 바구니”(코피노스)는 유대 사람들이 평소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으로서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휴대용 작은 바구니이다.

    

=6: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 식사가 끝났을 때 군중의 수효가 밝혀진다. 아마도 50명 또는 100명씩 모여 앉았었고 식사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천 명의 수를 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마 14:21에서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으로 그들은 남자 장정만을 공식적인 통계에 넣는다(1:3).

따라서 본문에서 가리킨 남자는 청중이 모두 남자로만 구성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남녀로 구성된 청중 중 남자만 수효를 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급식 대상이 된 사람의 수효는 약 2만 명 정도로 훨씬 불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