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정화와 무화과나무의 저주

- 누가복음 19:45-47 -

샬롬선교회 


[누가복음 19:45-47]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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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1:12-22, 마가복음 11:15-25, 누가복음 19:45-47

 

1. 예루살렘에 접근하는 예수님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

 

예수님은 유월절 축제에 모여든 사람들, 길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다는 소식에 "다윗의 자손이여 호세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외치며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이 현상을 냉담하게 바라보던 예루살렘 군중들도 일제히 소란스러워졌다. 특히 예루살렘을 좌지우지하는 율법학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불안해했다.

 

2. 예수님 자신의 반응

 

누가복음 19:41~44에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셨을 때, 예루살렘을 보신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운명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두기 위해 선택하신 곳인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방문의 때(약속된 메시아의 도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진정한 메시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종교를 먹잇감으로 삼았던 지도자들의 반응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오는 '성전 정화''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사건은 '하나님이 오실 때를 알지 못했던' 예루살렘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성전 정화'는 예수님 초기 선교 당시에도 있었지만, 그때에 비해 이번 '성전 정화'는 더 신랄하다. 예전에는 "장사하는 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질책이었다면, 이번에는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신랄함은 마지막 일주일, '고난주간'에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가증한 자들아. 위선적인 율법학자, 바리새인들"(마태복음 23:13, 15, 25, 29), "눈먼 자들"(23:16, 24)이라고 비판하시며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 이야기를 다시 성전 정화로 돌려보겠다. '너희가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은 성전 경내에서 장사하고 환전하여 폭리를 취하고,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배경에는 이를 용인하는 유대교 지배체제가 있었다. 제도화된 지배체제 아래서 '기도의 집''강도의 소굴'로 만든 자들 - 제사장, 율법학자 등 - 은 종교를 먹잇감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예수는 단호하게 그들과 정면으로 맞선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화를 냈을 뿐 아니라, 성전 정화 사건을 계기로 예수를 어떻게 죽일지 본격적으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4. 무화과나무의 저주가 의미하는 바

 

'성전 정화''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건이다. 무화과 열매가 열리는 계절도 아닌데, 배가 고파서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에 화가 나서 나무를 저주하다니........ '무화과나무' 이야기만 읽으면 예수님은 매우 이기적인 분처럼 느껴진다. 전후 관계에서 분리해서 성경 기사를 읽으면 이렇게 된다. 하지만 '성전 정화' 사건, 그리고 예수가 예루살렘의 곧 일어날 일로 눈물을 흘리신 것을 함께 생각하면 '무화과나무의 저주'의 이야기가 보인다.

 

5. 생명의 고갈은 율법주의를 낳는다.

 

'무화과나무'는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당시 유대교의 제도와 체계를 비유하고 있다. 이 제도화된 종교에 대해 예수님은 "앞으로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말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다음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성전 정화''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생명의 고갈이 제도화된 종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회의 3대 명절은 '크리스마스', '부활절', '오순절'이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이 축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혹시 생명력이 고갈된 형식적인 행사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교회에서도 하고 있고, 지금까지 계속 해왔기 때문에...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그것을 답습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생명의 고갈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령 이러한 절기를 전도의 좋은 기회로 여기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도 생명의 고갈을 초래할 수 있다. 일단 정해진 교회 행사를 '해야만 하는' 의무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것은 훌륭한 율법주의가 된다. 그 행사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면 율법주의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율법주의의 특징은 그것을 함으로써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명절에만 국한되지 않고, 예배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교회 봉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헌금을 제대로 드리고 있기 때문에, 전도를 위한 집회에 협조하고 있기 때문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훌륭한 크리스천임을 자처하고, 또 주변에서도 그렇게 평가받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낸다. 그런 체제 아래서 자신이 있는 것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율법주의의 함정이다. 거기서 진정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 만들어질 것 같지 않다. "앞으로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말라"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가혹한 말씀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의 초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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