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신하의 아들의 치유

- 요한복음 4:46-54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4:49-50]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표적'이 있다. 모두 기적이지만, 요한복음의 경우 기적을 단순히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기적이 가리키는 중요한 것, 깊은 곳에 있는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특히 이 본문은 한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려서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봤을 텐데, 살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꼭 집에 와서 치료해 달라고 간청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결과적으로 이 아들은 예수님에 의해 살아나지만, 요한은 단순히 살아나서 다행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 속에 있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이 치유의 기적을 '2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고 믿는 믿음보다 듣고 믿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듣고 믿는 믿음'이 결코 쉽지 않다. 요한은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두 번째 표적'으로 이 글을 넣은 것이다.

'듣고 믿으라'는 주제는 이미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특히 4:39-42)에서 이미 예표가 되어 있다. 4:39부터 살펴본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여기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직접 듣고' 믿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으로 예수를 믿었지만(39), 42절에는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라고 말한다. , '듣고 믿는 믿음'이 강조되고 있다.

 

1.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배경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예루살렘 축제 기간 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23절에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실 때에 많은 사람이 예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라고 되어 있다.

 

왜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을까, 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기 때문'이다. '보고 믿는 믿음'을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를 보고 믿는 사람은 뒤집어 말하면, 불리한 결과를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동안에는 따라왔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점점 등을 돌리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갔다. 예수님은 그렇게 될 것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4:44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선지자'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말씀은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

예수님의 공생애의 대부분이 갈릴리에서 이루어졌는데, 원래 갈릴리라는 지역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스불론족, 납달리족에게 주어진 상속지였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 10개 지파와 남쪽 2개 지파로 나뉘게 된다. 그 북쪽 10지파 중에 스불론과 납달리의 땅이 있었다. 북쪽 10지파는 결국 북쪽의 강대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등 위대한 선지자들이 등장했지만, 북왕국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북왕국은 기원전 721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앗수르의 혼혈 정책으로 인해 이스라엘인인 그들은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결국 북왕국 북부에 있던 땅은 예수님 시대에는 갈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 아래 지역, 즉 중앙부는 사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모두 유대인들로부터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땅은 시골의 한가롭고 소박한 사람들의 지역이라기보다는 예로부터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백성들이 살았던 곳으로 성경은 자리매김하고 있다. 요한복음 4:44"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앞으로 가려고 하는 갈릴리라는 지역이 본래 선지자를 존중하고 선지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를 경멸할 정도로 선지자를 존중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그 갈릴리로 가려고 하셨을까, 예수님은 그 사실을 백번도 더 아시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전하고,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갈릴리 지방에는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과 가나,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가버나움 등의 도시가 있다. 이번 이야기는 본래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던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의 한 예로 한 가버나움의 신하가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다시 가셨을 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가버나움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결코 믿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매우 냉정하게 느껴진다. 가나의 혼인잔치 때도 그랬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을 때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다. 매우 차갑고 게다가 깨어 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결코 믿지 아니하리라"'너희'는 여기에 등장하는 관리들을 포함한 갈릴리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려고 하지만, 그 환영의 배경에 깔려 있는 얄팍한 속내를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 왕의 신하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그저 일방적으로 간청만 한다. 바로 이 관리는 갈릴리 사람들의 환영의 본보기와 같은 존재이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우리 집에 와서 아들이 죽기 전에 아들을 만나고 고쳐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빨리 와 주십시오.'라고 계속 부탁했다. 아버지의 필사적인 마음이 전해진다.

 

가나의 혼인잔치 때도 그랬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라고 매우 냉정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두 번째 표적' 기사에서도 아들의 치유를 간절히 간청하는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언뜻 보기에는 냉정하게 내쫓는 것처럼 보인다. 대화가 잘 안 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점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그에게 놀라운 일을 말씀하셨다. "돌아가라. 네 아들이 나았다('자오-'의 현재형으로 '살아있다')"라고 말씀하셨다. (50)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아버지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듣고 믿는 믿음'이다.

 

성경에는 표적과 기적을 '보고 믿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대부분 '보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듣고 믿는 사람'을 찾으신다. 왜냐하면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로마서 10:17).

 

2. '보는 믿음''듣는 믿음'의 차이점

 

애초에 '보고 믿는 믿음''듣고 믿는 믿음'은 어떻게 다를까?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물질계)가 기준이다. 반면 '듣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기준이다. 그래서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보이는 세계는 일시적인 것이고, 본질(진짜 세계)은 사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8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특히 후반부의 이해가 중요하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다'에서 '일시적'이라는 말은 피상적,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진실을, 혹은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다. 이에 반해 바울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말은 여기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우리의 복음'을 의미하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생각을 흐리게 하여 그 복음의 빛을 비추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복음의 빛''화해의 복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화해이다. 그 복음의 증거 중 하나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헌금을 보내어 지원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돕는 교제의 은혜이다. 그 은혜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극도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기쁨으로 아낌없이 베푸는 형태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지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을 통해 들은 복음의 진의를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의 비밀을 계시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열심히 자신을 바치려고 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믿음', '듣고 믿는 믿음'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다. 그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려고 하신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듣는 것에 달려 있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하나님에 의해 그 일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예수님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듣고 믿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확실한 세계에 우리를 참여시키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미 구약에서 사실 여러 번 반복적으로 예언되어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듣는 것에 달려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가능하다. 우리가 자기에게 편한 방식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을 지금까지의 우리 이해의 틀을 버리고 들어야 한다.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는 갈릴리 사람들의 대표이다. 그에게 요구된 것은 '듣고 믿는 믿음'이었다. 예수님은 그저 "네 아들이 살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는 그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불안감이 그를 덮쳤을 것이다. 역시 예수님을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돌아서려 했을지도 모른다. 가버나움 관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지배당해 절망의 나락에 빠졌을 것이다. 아들이 죽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하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해결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셔서 아들에게 직접 손을 얹고 치료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법은 '말씀'을 주시는 것이었다.

 

히브리어로 '말씀'을 뜻하는 어휘는 '다바르'인데, '말씀'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다. ,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 던져진 곳에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예수님의 "돌아가라. 네 아들이 나았다(현재형)"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마주할 때, 거기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사야 55:11절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입에서 나오는 내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말한 것을 성공시키리라."

보이는 세상은 '아들이 죽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듣는 세상은 '네 아들은 살아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간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치유된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

 

'듣고 믿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짐작하는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표적'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하십시오." (2:5). '그분',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물동이에 물을 채우라'는 것이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두 번째 표적에서 예수님이 왕실 관리였던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은 "돌아가라. 네 아들이 나았다(원문은 '살리라'이다.)"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그 말씀이 어떤 강렬함으로 역사할 때, 거기서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은 신비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 읽으면 누구나 그 말씀을 알 수 있지만, 더 직접적으로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역사하는 사건이 되는 것은 매우 신비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아들의 아버지는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http://meigata-bokushin.secret.jp/index.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