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기도(1)

'자신을 위한 기도'

- 요한복음 17:1-5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7:1, 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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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의 전체 의도를 요약한 17장 예수님의 기도 ++

 

요한복음 17장은 제자들에 대한 고별설교 후에 하신 기도이지만, 설교 전체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교회 예배에서 설교자가 설교 후에 드리는 기도를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에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모든 요소들이 담겨 있고,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간결하게 기도라는 형식 안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17장의 기도로부터 시작하여 요한복음 전체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 요한복음 17장의 구조: 전체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다음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 그 내역은 세 부분(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제자들이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받게 하소서, 제자들이 성결하게 하소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은 '제자들에 의해 믿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 여기서는 첫 번째 부분인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 부분에는 몇 가지 '중요한 어휘'가 나옵니다.

(1) '아버지' (2) '영광' (3) '영원한 생명', 이 단어들은 모두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아들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맡긴 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아들은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아버지''아들'의 아름다운 관계

 

예수님의 기도는 항상 눈을 들어 "아버지여, 내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이 항상 내 소원을 들어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를 함으로써 주변 사람들(군중)이 자신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1:41-42).

 

여기 17:1에서도 마찬가지로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아들'이라는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아들'의 존재 없이 '아버지'라는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는 것은 동시에 자식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그 아름다운 파트너십)를 아는 것입니다. 그 관계로 초대받는 것이 요한복음은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구절을 찾아봤습니다.

(1) 마태복음 45/ (2) 마가복음 4/ (3) 누가복음 17/ (4) 요한복음 17

(4) 요한복음 113/ (5) 바울서신 41/ (6) 공관복음 3/ (7) 요한계시록 5

 

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요한복음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고별설교(13-17)에는 '아버지'라는 어휘가 무려 52회나 등장합니다. '아버지''당신'이나 '하나님'으로 칭하는 표현까지 합치면 그 수가 어마어마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서처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라는 식의 표현이 아니라, 거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속에서 사용됩니다. 여기에 요한복음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아들'의 존재나 '아들'의 사역을 설명할 때,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독생자"

"아버지의 품에 계신 독생자가 하나님"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

"아버지가 ... 하는 것 같이 아들도 ... 하리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치신 대로 ... 하고 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

 

+ ... 이런 식으로 '아들'은 모두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양자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알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자식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하고 밀접한, 분리할 수 없는 사랑의 관계야말로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인 '영원한 생명'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의 현현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 안에, '영광의 빛' 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함께 초대받아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꿈(Vision)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것이 실현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게다가 드디어 실현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2.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때가 이르렀다'''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이며,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바로 아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공관복음서가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의 죄의 고통을 짊어진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로 드러나는 시간으로 자리매김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9-10에도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그 '모형'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가 최고조로 증거되는 때이며, 공관복음서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곳에 있다'는 궁극적인 증거의 때였습니다. 이것이 요한적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란 무엇일까? 그것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가장 무거운 일이라는 것입니다(참고로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의 의미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제 생각에 그것은 '사랑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만의 어휘로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원히 아는 관계', '영원한 신뢰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17:3에 나오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정의를 살펴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항상 친밀하게, 그리고 영원히 알아가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안에 우리가 초대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안에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오면서 그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계획, 그것을 이루는 능력과 사랑, 지혜와 지식의 모든 부요함'을 의미하는 거대한 폴더입니다.

 

+ 17:3'아는 것이니이다''알다''기노-스코-' γινωσκωσιν이 사용되었습니다. , 3인칭 복수 현재형입니다. 그리스어의 '현재형'에는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 '하나됨'입니다. 이 일은 하늘에서 가장 무거운 일입니다. 그것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이 가지고 계셨던 영광의 광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지루할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증가하는 주님의 영광, 즉 무한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알아가는 끝없는 사랑의 관계, 영원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아들을 믿는 자 안에서 현실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7-19)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이 교회라는 관계 속에서 증거되기를 바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은 바다 속 한 방울의 물방울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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