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 요한복음 14:7-11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4:7-11]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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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에는 '믿다'라는 동사와 지각동사인 '알다', '보다', '듣다'라는 단어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사용되고 있다.
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요한복음 14:10,11) -
요한복음 10:30에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에고- 카이 호 파테-르 엔 에스멘' ἐγὼ και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음미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점이 바로 기독교의 이단과의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보통 '하나'는 동일하다는 뜻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는 '나'와 '아버지'가 각각 존재의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라는 신비한 관계이다. 요한복음은 이 진리를 곳곳에서 다루고 있으며, 이 신비로운 관계에 주목하게 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려고 한다.
각각 고유한 두 존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이니라"(10:30)는 표현은 요한복음 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요"로 번역된다. 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다.
ὁ ἑωρακὼς ἐμὲ ἑώρακεν τὸν πατέρα: - The One having seen me has seen the Father.
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있고 아버지가 내게 계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ἐγὼ ἐν τῷ πατρὶ καὶ ὁ πατὴρ ἐν ἐμοί ἐστιν;. -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is.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반드시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로 말씀하심으로써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구조이다. 관심이 없으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예수님의 전술이었던 것이다. 관심이 없는 자는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3:13)라는 일이 일어난다. 이는 이미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신 말씀이다(이사야 6:9-10). 참고로 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그들에게 이사야 6:9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너희 눈은 보고 있으니 다행이다. 또 너희 귀가 들으니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며 '비유'의 의미를 알려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잠자리를 함께한 제자 빌립으로부터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나이다."(14:8)라는 말에 대해 예수님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으로서는 빌립의 말에 실망하셨던 것 같다.
9절의 예수님의 이 실망의 목소리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과연 아들을 보고, 아들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이해하고, 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아들과 아버지가 사랑으로 마주하고 있는 그 신비로운 모습,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고 계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14:10)을 믿으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요한복음이 가장 전하고 싶은 내용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미 요한복음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요한복음 6:46에는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항상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그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랑의 관계를 요한복음은 '영원한 생명' 혹은 '아버지의 집에 오는 것',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것', '아버지께 머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 특유의 표현인 '영생을 얻는 것'과 '아버지의 집에 와서 그 집에 거하고 머무는 것'은 동의어인 것이다. 그러나 이 내실(內實)을 말로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믿는다는 형태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이다. 혹은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내가 아버지께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1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말은 머리로 이해하거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믿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보는 얼굴'. 즉, '나'와 '너'가 마주보고 있다. 요한복음 1:1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서로 얼굴과 얼굴이 마주보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님이신 성령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마주 보는 얼굴'이 없다. 예수님이 성령을 향해 '당신'이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굴과 얼굴이 마주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실제로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은 사실이다. 즉, 성령은 스스로 '나'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분이 아니라, 항상 곁에 있는 형태로 존재하고 곁에 있는 사람에 의해 증거되는 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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