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자랑치 말라
고린도전서3:1-15 -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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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육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다. 두 번째는 영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세 번째는 육신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본성의 죄악성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들, 곧 영적인 사람들을 사용하여 영혼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구원받은 영혼을 온전케 하심을 증거한다.
1. 육신적인 사람 (1-4절)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1절)
바울이 말하는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육신에 속한 자" 곧 ‘육신적인 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은 3절에도 두 번, 사본에는 4절에도 또 한 번 나온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육신적인 사람이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기는 하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본성의 죄악성에 지배를 받는 자, 즉 영적으로 어린 성도를 가리킨다.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2절)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라는 말에서, "밥"은 딱딱한 음식을 가리킨다. 갓난아기는 엄마의 젖을 먹지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도 듣기 쉬운 교훈만 받고 어려운 교훈들을 받지 못한다(히5:12-14).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자랄수록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연구하고 배우며 믿고 행하며 지식과 인격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고전2:6에서 "온전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영적으로 자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성경은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야 함을 가르친다. 엡4:13-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히5:12-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벧전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3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영적 어린아이라고 취급하는 까닭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악들 가운데 시기, 분쟁, 분열을 언급하였다(갈5:19-21). 그러므로 성도는 그것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그런 죄들을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할 것이다.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4절)
고린도교회의 내적 분열은 지도자들에 대한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서 나타났다.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하여 설립한 자이었고, 아볼로는 바울 후에 그 교회에 와서 성경 말씀을 가르친 목회자이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육신에 속한 증거이었다. 교회에서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들은 사람에게 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파당과 분열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으로, 곧 하나님의 진리를 중심으로 일치 단합해야 하는 것이다.
2. 교회의 바른 건립 (5-15절)
(1)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5절)
"사역자(使役者)"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섬기는 자, 일꾼, 봉사자’라는 뜻이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믿음에서 자라게 한 복음의 일꾼들이었다.
일꾼들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복음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일꾼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그를 보내신 분, 곧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할 것이다.
(2)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6절)
바울은 복음 사역을 씨를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에 비유하였다. 씨를 심는 것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가리켰고, 물을 주는 것은 세워진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가리켰다.
씨를 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초로 뿌리는 것이요, 물을 주는 것은 그 뿌려진 씨가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일이다. 농사에서 심는 일도 가꾸는 일도 다 중요하듯이, 복음 사역에서는 전도도 목회도 다 중요하다. 그러나 씨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사람이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고 한 영혼도 성장시킬 수 없다. 개인의 구원과 성장도, 교회의 설립과 성장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3)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7절)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은,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복음의 일꾼 자신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구원 사역에 무엇을 대단히 기여한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들을 사용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복음 사역자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복음 사역자 자신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무익한 종들에 불과함을 항상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눅17:10).
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하다가 어느 날 뇌졸증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한 장로님이 고백하기를,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4)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8절)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라는 말은, 복음 사역자들은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성경은 상에 대해 종종 말한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을 두고 그것을 말한다.
상급은 구원과 다르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한다.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해결되었다. 그 해결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법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의롭다 하심이다. 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될 것이다(롬8:30; 빌3:21). 그것이 구원의 완성과 목표인 영화(榮化)이다.
그러나 상급은 다르다. 상급은 선행과 봉사, 특히 복음 사역에 대해 약속된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구원에 차등이 있다고 말할 것은 아니나, 상급에는 차등이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으며(롬3:24), 마지막 날에 모든 성도는 다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을 할 것이다(롬8:30). 그러나 상급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즉 자신의 선행과 봉사와 충성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질 것이므로 거기에는 분명히 차등이 있을 것이다.
(5)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9-10절)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이란 말은, 바울은 복음 사역을 이렇게 농사에 비유하고 또 건축에 비유한다. 복음 사역은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과 같고, 또 터를 닦고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복음 사역자들은 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밭과 같고 하나님의 집과 같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라는 말은, 바울은 건축의 비유를 좀 더 자세하게 말한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기초를 닦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교회의 터를 닦은 자로 표현하고, 자기 뒤에 일하는 사역자들을 그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로 묘사한다. 바울은 터를 바르게 잘 닦아 놓았기 때문에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은 조심스럽게 건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를 닦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여 영혼들을 구원함으로 교회를 시작한 것을 말한다. 이제 기초가 잘 닦여진 고린도교회는 더욱 튼튼히 세워져야 한다. 목회는 집을 완성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집을 완성하는 자이다. 그것은 외형적인 예배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말한다.
물론 복음 전파를 통하여 죄인들이 계속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고 신앙을 가진 자들은 충실한 가르침을 통하여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믿는 자는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자라고 훈련되어 그리스도의 형상, 곧 거룩하고 경건하며 진실하고 온유, 겸손한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6)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1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라는 말은,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 외에 다른 터는 있을 수 없다. 만일 다른 터를 닦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다른 집단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반석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교회의 기초이다.
(7)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2절)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집을 짓는데 필요한 건축 자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은유법을 사용하고 있다. 만일 전체적인 상부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초를 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금으로 다져놓은 기초 위에 값싼 재료들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의 터 아래 매장시키는 악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는 ‘금이나 은’, 그리고 ‘보석’의 교훈으로써 그리스도를 방어할 뿐 아니라 그런 기초와의 조화에서 상부구조를 의미하고 있다.
여기까지 바울의 의도에 대한 충분한 일치가 있었으므로 다른 한편, 나무나 풀, 짚으로 묘사되어 온 그 가르침은 기초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귀결이 나온다. 말하자면 그 가르침은 인간에게서 날조되어 나온 것이며,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인간의 날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에 의하여 이룩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무엇이나 건축하는데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평하는 방법이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비록 그것이 일시적으로는 숨겨져 있을지라도 각자의 사역의 특색이 분명히 나타날 것임을 알게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곧 ‘악한 사역자들이 참으로 속임수를 쓰는 일들이 지금 일어날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사역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신실하게, 혹은 거짓되게 일하고 있는가를 지금 당장은 분별할 수 없다.
그러나 말하자면, 지금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것이 마지막에는 빛 속에는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현재 사람의 눈에 찬란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타도를 당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건축 자재에 따라 교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누일 것이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진 내구성(耐久性)과 영구성(永久性)이 있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어진 내구성과 영구성이 없는 교회이다.
이것은 또 두 종류의 목회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는 목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 목회이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크고 웅장하게, 또 빠르게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고 기술도 많이 필요해서 아마 집을 짓기가 힘들고 그렇게 웅장하지도 못하고 또 더딜 것이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교회를 짓는 목회만이 참 목회요 그렇게 지어진 교회만이 참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바른 교훈을 통해서 세워진다. 바른 교훈, 건전한 교훈, 견고하고 확실한 교훈이 없다면, 참되고 바른 교회가 세워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섞이지 않은 바르고 순수한 설교는 바른 교회 건립에 필수적이다.
(8)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3절)
"공적"이라는 원어는 ‘일, 일한 바, 성과’라는 뜻이다. 복음 사역자들의 사역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 날이든지 그 직전에 있을 대 환난 날이다. 그때 복음 사역자들의 사역이 바른 사역이었는지 아니면 겉보기에만 굉장한 것 같은 사역이었는지, 참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고 양육한 사역이었는지 아니면 생명 없는 사역이었는지 판별될 것이다.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여기서 불은 그 교훈이 과연 금 같은 것인가, 아니면 마른 곡식 그루터기 같은 것인가를 시험하는 하나님의 성령인 것이다.
(9)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4-15절)
사도 바울은 여기서, 언제나 기초를 유지하고 있으나, 건초와 금을 혼합하고, 마른 풀을 은과, 그리고 나무를 보석들과 혼합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이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하기는 하되, 그러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인간적인 견해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혹은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한 순수성에서 약간 빗나가 곁길로 가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과거의 많은 성도들, 곧 시프리언, 암브로스, 어거스틴과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오늘날 우리와 아주 가까운 시대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곧 그레고리와 버나드,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이 그런데, 그들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서 건축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서 건축하는 올바른 건축 방법에서 빗나갔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만일 하나님이 그들의 무지를 일소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그들을 정결케 하신다면, 이것이 바로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이런 사람들의 구원의 소망을 탈취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들이 자신이 행한 사역의 실패를 솔직히 인정하고, 또 금이 용광로에서 정련되듯이,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을 정결케 하신다면 더구나,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의 백성들을 고난으로 연단하실지라도, 나(칼빈)는 여기서 "불"을 성령의 시험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의 무지를 고치시고 또 제거하시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임시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십자가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해석이 모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을 만족시키라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구절을 연옥설을 내세우는 논증으로 펴고 있는 가톨릭교도들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도록 결론을 내려야겠다.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이 불 속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리기 위하여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이 주신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형벌에 대하여 또 그 형벌로부터 해방되는 수 없이 많은 그들의 논쟁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사실상, 이 불을 통과하여야 할 사람들이 과연 누구냐고 나는 묻는다. 바울 사도는 사역자들에 대해서만 아주 결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그러나, 동일한 생각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쓸데없는 사소한 일에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해를 받으리니"라는 말의 원어는 ‘손실을 당한다, 잃는다’는 의미이다. 복음 사역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에게 상을 약속하신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절).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의 일한 바가 불 시험을 통과하면 상을 받을 것이다. 즉 그가 목회했던 교인들이 불같은 환난을 잘 통과하면 그는 성공적 목회를 한 자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록 그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 하여도 그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목회 사역에 대한 상을 잃게 될 것이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