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주석(전권) 존 칼빈주석 중심으로 + 성경구절을 클릭하세요 + 의로운 자의 삶
- 로마서5:1-11 -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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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삶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담대히 교제하게 할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대에서의 구원도 확신케 한다.
1.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 (1-2절)
(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1절)
‘화평은 양심의 평정을 의미하며,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화목되었다는 것을 아는데서 시작된다.
(2)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2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누리는 바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리스도에게 의존한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우리 모두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이 은혜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복음이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즉시로 뒤이어, 우리의 구원이 요지부동하고 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은혜가 계속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그는 우리의 견인이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근면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위에 기초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있는"이라고 동시에 그가 말함으로 해서, 복음이 얼마나 깊이 경건한 사람들의 심령 속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가를 지적해 주고 있다. 복음이 깊이 뿌리박아야만 복음의 진리에 의하여 경건한 사람들이 강하여질 수가 있고, 그리고 혈육과 마귀의 모든 궤계들을 대항하여 견고하게 설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 "서 있는"이라는 이 말은 믿음이란 일시적인 한 날의 덧없는 설득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하여 지속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이라는 말은 내세의 소망의 나타남과 우리가 그 소망 안에서 감히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확실한 초석 위에 근거하는 데 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신자들이 지금은 세상에서 나그네들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확신에 의하여 하늘에 오르며, 그리하여 고요하게 그들의 품 안에 그들의 장래의 기업을 간직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궤변가들의 가장 골치 아픈 두 가지 교리를 분쇄한다.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식별함에 있어서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도덕적인 짐작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교리와, 둘째로는, 우리의 최종적인 견인에 관하여 우리 모두가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교리를 분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현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항구적이고 서슴없는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자랑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빛을 비추었다. 이 복음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증거하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1:4, 요일3:2)
2.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3-4절)
(1)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3절)
성도들이 그들의 당하는 환난을 자랑한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그들이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거나, 역경이 닥쳤을 때 그것이 주는 아픔으로 인하여 고통을 비탄에 잠기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만일 그들이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런 인내도 그들이 당하는 환난에서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난은 인내를"이라는 말은, 인내란 환난의 당연한 결과는 아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환난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터뜨리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내면적인 순종-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불어 넣어진 것이다-과, 위로-이것은 바로 그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가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대신하게 되었을 때에는, 환난들은-완악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이 환난들은 다만 분노와 불만만을 산출해 낼 뿐이다-인내를 낳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2)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4절)
"인내는 연단을"이라는 말은, 이와 비슷한 점층법을 써서 야고보가 다른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는 그가 말하기를,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약1:3)고 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을 조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연단"이라는 단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에 대해서 갖는 체험이다. 야고보는 성경의 일반적인 용법에 따라서, 환난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바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환난에 의하여 자기 종들을 시험하시고 시련을 겪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련들이 흔히 시험으로 불리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인내를 하게 된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인내심을 바르게 향상시킬 수가 있게 되며,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없이는 우리가 결코 살 수 없으리라는 장래에 대한 소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소망이 체험(연단)에서 나온다고 덧붙이고 있다.
3.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 (5-8절)
(1)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5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이라는 말은, 우리는 환난에 의해서 자극을 받아 인내하게 되며, 인내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격려하여 소망을 품게 한다. 이는 아무리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지쳐 탕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풍성한 위로이며,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갈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실 때에는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재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실 때에는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재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실 때, 우리의 바로 그 재난들은 분명히 번영과 기쁨으로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부성애(바울은 이 점을 8장에서 거듭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를 인하여, 십자가의 모든 고난들을 뒤엎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지식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좋은 선물들이 인간들의 귀와 눈과 마음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성령만이 그 선물들을 나타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분사인 “부은바 됨이니”라는 말은 아주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가 너무도 풍성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렇듯 그 사랑이 우리 몸의 전체에 넘치도록 부은바 된 까닭에, 그 사랑은 역경 중에서 우리의 슬픔을 달래주며, 달콤한 조미료처럼 우리의 환난에 감미로움을 더해 준다.
바울은 또한 말하기를, 어거스틴이 잘 지적한 대로, 우리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성령이 수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신’, 즉 부여된 것이라고 하였다.
(2)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6절)
어떤 주석가들은 "연약할 때"라는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처음 세상에 나타나시기 시작하던 시기를 뜻한다고 주장하며, "아직 연약한 사람들"이란 율법을 수학하던 자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본문의 말씀은 모든 기독교 신자를 가리키며, 여기에 언급된 때는 각 신자가 하나님께 화목되기 전의 시기이다. 우리 모두는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기까지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연약한" 자들이란 죄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는 곧 이어서 바울이 그들을 "경건치 않은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연약하다는 말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할 때, 즉 우리가 전혀 무가치하고 하나님에 의해 귀여움 받기에는 부적합한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믿음은 경건의 시작이다.
(3)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7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그러한 종류의 자비를 인간들에게서는 결코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한 것은 사도바울의 목표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영혼의 확신과 안전을 확립시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확증, 즉 선언하시는 것은, 그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떤 사랑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바 없이, 요한이 우리에게 말한 대로(요3:16) 그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죄인들"이라는 단어는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처럼)전적으로 부패하고 죄에 젖은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달려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4.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한다. (9-11절)
(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9-10절)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때문이었다는 점을 우리가 깨닫는 것 말고는 달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이 죽으심이 하나님과의 우리의 화목의 시작이 되어, 그의 죽으심으로 성취된 속죄로 말미암아 전에는 우리를 적대시하던 것이 정당했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2)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이요 천국을 소망하며 항상 기뻐하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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