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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教会=Heian Church


믿음으로 된 의

- 로마서4:9-16 -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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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믿음과 행위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1. 아브라함의 의는 믿음으로 된 의이다.

 

(1) 아브라함에게는 무할례시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9-10)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9-10)

바울이 할례무할례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당면한 유일의 문제는 율법의 의식들을 지킴으로써 의를 얻는 것이라고 지혜롭지 못하게 결론내리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원리가 진술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사함이 모든 행위에 선행하지 않는 한, 이것은 충분치가 못하다. 이 행위들 중에 첫째가 할례였다. 이 할례로 말미암아 유대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할례가 여기서는 율법의 최초의행위로 고려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다루고 있는 논쟁점은 단지 의식 하나 만에 대한 것이 아니고, 율법의 모든 행위 즉, 보상을 받아야 하는 모든 행위가 이 부류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할례가 특별하게 언급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율법의 의의 기초이었기 때문이었다.

 

(2)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1)

바울은 반대론을 예상하여 비록 할례가 의롭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다른 특출한 용도, 즉 믿음의 의를 인치는 기능을 갖고 있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할례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힌다.

 

한편 바울은 할례의 목적 바로 그 자체에서 할례가 의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할례는 무할례시에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인해 주는 성질이 있고, 그래서 그 의를 결코 손상시키거나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 말씀은 성례의 일반적인 유익에 관한 괄목할 만한 구절이다. 바울이 증거하는 대로, 성례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그리고 은혜에 대한 확실성이 확증되는 표징들이다.

비록 성례들은 그 자체들만으로는 무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그의 은혜의 도구로 작정하셨고, 그리고 그의 성령의 은밀한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들의 유익을 증진하는데 그들이 방편으로 삼게 하셨다.

 

또한 비록 유기된 자들에게는 성례들이 생명이 없고 무익한 상징들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들의 힘과 성격을 잃지 않고 언제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성례의 효력이 우리에게서 박탈되어 있지만, 그 불신앙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성한 상징들인 성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시는 증거들이라고 하는 원리는 변함이 없이 존속된다.

 

할례의 표에 의하여 이중 은혜가 나타난바 되었다는 점이 특별히 진술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받은 씨를 약속해 주셨다. 이 씨에게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7)는 약속은 이것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유추는 신자들이 약속된 씨를 고대한 것과 충분하게 일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편에서는 생활의 순결과 거룩을 요구하셨다. 그리고 그 상징에 의해서 이러한 생활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었다.

, 육신으로 난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할례함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성품은 부패한 대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표에 의하여 영적으로 자기의 육체의 부패한 것을 할례를 하도록 아브라함에게 가르친 것이다. 모세는 이 점을 신명기10:16에서도 언급하였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직 나이가 어린 탓으로 할례를 하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던 어린 영아들의 할례를 하나님께서는 명하셨다.

 

모세는 영적 할례를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으로 특별히 언급하였다. 이는 신명기30:6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그 구절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주께서 네 마음을 할례하실 것이라고 했다. 모세 이후로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사상을 보다 더 명백하게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세례에 두 가지의 요소가 있듯이, 옛날의 할례에도 거듭남의 생활(newnes of life)과 죄사함(forgiveness of sins)의 두 가지를 증거한 두 요소가 있었다.

비록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의가 할례에 앞섰지만, 우리가 이삭과 그의 후손들의 경우에서 보는 대로, 성례에서는 반드시 의가 앞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이 외적인 표에 제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처음에 한 번 그러한 실례를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3) 아브라함은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다.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2)

본문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의 동사는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외면적인 할례만을 받고 그것을 대단하게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주요한 요점, 즉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 오직 그의 믿음이 그의 구원을 확보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바울이 믿음과 성례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구별하려고 하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바울이 이 둘을 구별 짓는 목적은, 아무도 자신의 칭의를 얻는 데 할례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오해하고서 할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만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 만일 그들이 순수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본을 좇는 경우에는, 할례를 그는 분명히 제외시킨다. 만일 다른 어떤 도움 없이도 믿음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할례시의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할례와 믿음, 이 둘을 분리시킴으로써 칭의의 두 원인들을 혼동하는 것을 우리는 피해야 한다.

 

2.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도 의롭게 된다.

 

(1)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3)

그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과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로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 의식법의 준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려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쉽게 논박된다. 바울은 영적 거룩함의 생활을 의식에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그것의 의를 의식에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다.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4)

사도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신뢰하지 않을 것 같으면 믿음이 소멸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또는 그의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나, 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신념이 아니라, 복음에서 깨닫고 또 하나님의 면전에서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쉼을 얻게 해주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3)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다.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5)

본문의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에서 진노란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본문에 사용된 표현의 일반적인 의미와 본문을 곧장 첨가하여 말하는 이유로 보아서, 율법이 우리 모두에게 결과로 시켜주는 것은 오직 정죄뿐이라는 것을 바울이 의미한 것임에 분명하다.

 

본문의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를 어떻게 번역을 하던 간에 본문의 뜻은 마찬가지이다. , 기록된 율법으로 가르침 받지 못하고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악하게 깨뜨리며 범하는 사람만큼 큰 범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4) 상속자가 되는 약속은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다.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6)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우리가 상속자(양자)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근거로 해서 양자되는 것이 확실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는 요지부동의 확실성을 갖춘 믿음을 믿음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주저와 의심을 불신앙으로 여긴다. 이러한 불신앙은 믿음과 약속을 폐기시킨다. 그런데 중세 가톨릭의 학자들은 이 의심을 도덕적 추측이라고 부르며 그 의심이 믿음을 대신하고 있다.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사도가 여기서 먼저 밝혀 주고 있는 것은, 순수한 은혜만이 믿음 앞에 올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의 객체는 순수한 은혜이다. 만일 은혜에 공로가 계산되게 된다면, 은혜로 얻은 것은, 무엇이나 공로가 없이 된 것이라고 하는 바울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해 볼 것 같으면, 만일 은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행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은 그 약속이 은혜에 근거할 때에만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모든 모호한 점을 없애 준다.

바울의 이 말씀은 인간들이 행위를 의지하는 한 처할 수밖에 없는 불확신의 상태를 확증해 준다. 왜냐하면 행위를 의지하는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에게서 약속의 열매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은혜는 중생의 은사를 의미하지 않고, 다만 공로가 없는 은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중생(역자주: 칼빈은 중생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다)은 결코 완전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것이 인간들의 양심을 무마시키기에는 전혀 충분하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로서는 그 약속을 재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는 율법의 멍에에 자신들을 얽어매고, 율법에 대한 확신을 자랑하는 광신적으로 율법에 열심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유대 민족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에게 주의 율법이 주어졌었던 것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자들이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외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고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율법의 종들이 아니고, 율법으로 양육을 받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된 유대인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읽으면, 문장의 뜻이 더욱 분명하여 질 것이다.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비록 전에는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아브라함은...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바울은 이방인들이 이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기업을 양도해 준 바로 그 예언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씨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한 민족의 아비가 아니라 열국의 아비로 택정되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은혜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장차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약속되었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확대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고려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사가 과거 시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성경의 통상적인 용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이방인들에게 은혜가 미친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주께서 그렇게 작정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로 택정되었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인용구인 모세의 말을 괄호로 묶으면, 이 문장은 끊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읽을 수가 있다. ,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그 관계의 형식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육체적인 혈통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 “우리의 영적 조상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 특권이 주어진 것은 우리와의 그의 육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이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