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주석(전권) | 존 칼빈주석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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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稱義)의 방법
로마서3:19-31 -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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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모든 죄인들에게 기쁘고 복된 소식 곧 복음이다.
1.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19-20절)
(1)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19절)
바울은 율법이 틀림없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이 본래 유대인들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율법’이라는 단어 아래 바울은 또한 선지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2) "이는 모든 입을 막고 ..." (19절)
“모든 핑계와 구실 붙일 모든 근거를 막고”를 뜻한다. 이 은유는 법정에서 취해온 것이다. 법정에서는 만일 피고가 합법적인 항변을 신청할 것이 있으면, 그는 그의 고소장에 제기된 혐의 사실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할 기회를 허락해 줄 것을 청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 그는 침묵한다. 그리고 한마디의 항변도 하지 않고 그가 정죄 받는 것을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의 침묵에 의하여 정죄함 받았기 때문이다.
욥기40:4의 “나는 내 손으로 내 입을 가리울 뿐이로소이다”라는 말씀도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욥은 비록 그가 몇 가지 변명할 구실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을 단념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판결에 순복하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20절)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의 역할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온 세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게 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판정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말이 없다.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4) 율법은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여 준다. (20절)
"율법은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의를 얻지 못하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죄와 정죄를 깨닫게 해주는 때문이다.
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그것은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참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율법으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2.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21-22절)
(1) 이제 하나님께서 율법과 별개로 주시는 한 의가 나타났다.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되었고 인도함을 받았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이 받는 칭의를 말할 때, 타고난 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한 행위들까지도 일체 배제해 버린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라는 이 말씀이 만일 믿음의 의의 정의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행위의 종류는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행위가 갖는 공로가 폐기되고, 다만 죄가 사함 받는 것만이 의의 원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through) 믿음으로 말미암아(by)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과 그렇지만 그는 영적 중생에서 비롯되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이 두 명제는 완전하게 일치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는 그의 은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주 색다른 원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즉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할 때에라야 비로소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선행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기 때문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기 때문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죄 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시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법은 어리석은 반론임에 분명한 듯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와 있는 까닭이요, 또한 우리가 “믿음 안에‘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고, 그리고 그의 값없는 약속들을 신뢰하는 까닭이며, 그리고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장사지냄으로써 우리를 그에게 화목을 시켜 주시는 까닭이다.
(2)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다. (22절)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믿음의 의가 그리스도의 의로 되는 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義)가 아니고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들이 되게 되는 때, 우리 자신들이 의로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 행위들 안에 있는 어떠한 흠점들이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취되어진 것은, 우리의 행위들의 흠점들이 그의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가리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완전한 것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이다.
3.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방법을 보인다. (23-31절)
(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24절)
모든 믿는 사람이 차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단지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본 절은 기독교 복음의 요약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아마도 성경을 통틀어서 의의 효력을 이 만큼 잘 설명한 구절도 없는 듯하다.
우리의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화목제물에 의해서 제거된다. 바울은 곧 이어서 이 구속의 가치와 목적, 즉 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한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케 하여주실 때에 한해서만 우리가 의롭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이 의(義)는 행위로 얻는 의(義)와 대조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값없이 거저 얻는 의이다. 이러한 의가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구속(救贖)을 이루셨기 때문이었다.
‘구속’(救贖)이란 값을 주고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값, 즉 죄의 책임(죄책 罪責)과 형벌을 지시고 건져내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2)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5절)
이 말씀은 앞 절의 말씀을 좀 더 설명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고, 그의 보혈을 믿는 것이다. ‘화목제물’이라는 원어는 유화제물(宥和祭物)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끓어오르는 진노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누그러지셨고 가라앉으셨고 제거되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속죄의 성경적 의미이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라는 말은 예수님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심으로라는 뜻이다. 물론, 사람이 예수 믿고 난 후에 짓는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씻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무조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면 그러한 판단 자체가 불의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의로운 판단이시요 의로운 행위이신 것이다.
(3)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6절).
"곧 이때에"라는 말은 바울이 여태껏 되어졌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계시된 시기에다 적용시킨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전에는 불분명하게 그리고 모형으로 알려졌었던 것을 그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이 숨김없이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강림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때요,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에서 자기의 공의에 대한 약간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의의 태양이 떠올랐을 때, 그의 의는 훨씬 더 밝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과 구약 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에만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인한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의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 믿는 자들이 받는 의(義)의 정당함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轉嫁)시키셨으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은 이 칭의는 성도가 실제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법적으로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법정적(法廷的)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성도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심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또한 새 생명을 받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성도는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이 있다.
(4)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7절)
믿음과 행위간의 이 대조는 상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시는 행위라는 단어가 아무런 수식하는 단어 없이 일반적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의식적 준수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외형적인 행위를 특별하게 지목하여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가능한 대로 모든 행위의 공로들을 포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의가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기 때문에,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다.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의, 복음 안에 나타난 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는 받는 사람 편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의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사람의 행위의 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8절)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라는 원어는 "율법의 행위와 관계가 없다"라는 뜻이다. "인정한다"라는 원어는 "간주한다, 결론을 내린다"라는 뜻이다.
본 절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기본 원리를 다시 결론적으로 단언하였다.
바울은 그의 주요 명제가 이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진술하고,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왜냐하면 행위를 명백하게 배제하고 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보다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대적자들은 믿음을 행위의 공로 가운데 포함시키려고 갖은 애를 쓴다. 실제로, 그들은 사랑에다 칭의의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는 그 칭의의 능력을 믿음에 돌리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 은 아무 행위의 공로도 칭의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하여 칭의가 값없이 된다는 것을 단언하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지 않고 또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야고보가 말한 것은 결코 위의 견해와 반대되지 않는다. 이 두 견해를 조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야고보가 사용한 논증의 성격을 고려해 보는 것이다.
야고보의 경우 문제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의를 얻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입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헛되이 자랑하는 위선자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justyfy'라는 단어가 야고보의 경우는 바울과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주 비논리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단어도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자면 이 모호성이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대로, 사람이 거짓되거나 죽은 믿음에 의해서는 의롭게 될 수가 없다는 것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서는, 나(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참고하기 바란다.
(6)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9-30절)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 진리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구원 진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효력 있는 진리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7)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1절)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율법과 복음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요 예언과 성취이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복음으로 이끄는 선생 역할을 한다. 사실,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죽음이었고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율법이 믿음에 대립되어 있는 경우에, 육신의 사람은 곧 바로 의심하기를, 마치 그들이 서로 대립되기나 한 것처럼, 이 둘 사이에 어떤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는 색안경을 끼고서 율법을 그릇되게 보는 사람들 가운데서와, 그리고 율법 가운데 있는 약속들을 무시한 채 율법에서 행위의 의만을 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심하게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율법의 폐기를 목표로 하여 가르침을 전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심하게 공격했다.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라는 항의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심은 의식법 뿐만 아니라 도덕법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복음이 모세의 의식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 까닭이다. 또한 더구나 복음이 행위의 모든 의를 말살하고 있는 까닭에 그것이 율법의 모든 증거들에 반대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가 율법에 의와 구원의 길을 규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율법으로 확증하신다.
그러므로 나(존 칼빈)는 바울의 이 변호를 소위 도덕적 교훈들이 아닌, 의식들 뿐만아니라 일반적으로 전 율법과 관계된 것으로 해석한다.
도덕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되게 확증되고 확립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에게 그의 죄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그리고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목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없이는 율법은 성취되지 않는다. 율법이 옳은 것을 선포하나 그것은 헛되다. 율법은 무절제한 정욕을 증가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성취하는 것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인간이 더 큰 정죄를 받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되면, 먼저 그 안에서 율법의 정확한 의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의는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 둘쨰로 우리는 그 안에서 성화를 발견한다. 이 성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사실 우리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의식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때 이 의식들은 중단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로 말미암아 참되게 확증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보다 나은 목적과 관련하여서만 실재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최상의 확증은 그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들의 진리를 성취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가 율법을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 확증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전파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