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웨슬리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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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준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8세기 영국이 낳은 위대한 전도자이고 통전적 신학자인 동시에 유능한 교회 행정가이었다. 그는 침체된 영국 성공회를 바판하므로 거기서 파면되었고 부득이 감리교회를 창설하여 미국 선교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가 1885년 아펜젤라 목사에 의하여 한국에 선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칼럼에서 10여회에 걸쳐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을 연재하려고 한다. 먼저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의 傳記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책이 있으나
A. 스케빙턴 우드, 이계준 옮김, 웨슬리의 선교적 사명(The Burnign heart), 전망사, 1995를 주로 참고하고자 한다. 
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생애를 통해 많은 교훈과 감동을 접하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

존 웨슬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내가 자서전을 쓴다고 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웨슬리가 자기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친 조상들에게 찬사를 드리는 간접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하느님이 그에게 맡기신 선교사업을 위한 준비가 그가 이 세상에 오기전에 이미 그의 조상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예레미아처럼 하느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어떤 뜻을 두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예레미아 1:5). M. 에드워즈는 웨슬리의 단절 없는 선교적 열정의 근원은 그의 혈통에 있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스스로 자기의 족보나 사회계층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회심 이후 선교에 열정을 쏟으면서 하느님이 자기를 선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조상들을 통해 준비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리뎀은 웨슬리의 조상의 탁월한 전통을 요약하기를 "청교도사상(Puritanism)의 지적, 문화적 및 종교적 절정"이라고 하였다.

웨슬리의 족보는 증조부에게 까지 올라간다. 증조부의 이름은 바돌로미우 웨스틀리(Westley)이다. 성에 붙은 "t"는 그의 아버지가 옥스포드대학에 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증조부는 1640년경부터 교구장으로 지냈는데 1662년에 청교도란 명분 때문에 알링톤 교구에서 추방당한 저명한 지도자이었다. 추방당한 후 그는 그 지역에서 박해를 당하는 비국교도(청교도)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그들의 집회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옥스포드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는데 교구에서 추방당하여 어려울 때 의학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671년에 서거하였다. 

웨슬리의 조부는 존 웨스틀리이다. 그는 "용감하고 재치가 넘치며 학자적이고 순회 전도자이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에게서 그의 손자의 모습을 미리 보는 듯 하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교의 부총장인 청교도 목사 존 오웬의 제자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대학 동기들 가운데는 유능한 청교도 지도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특수 교회"와 관계를 갖고 지역 교회에서 설교, 부두 선교, 순회 전도 등을 통해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다. 그는 감독에게 사제 안수를 받지 아니하고 청고도에 속한 고시관에게 목사 인준을 받았다. 그는 감독제도를 반대하였고 예전 사용을 거부하였으며 투옥까지 되었다가 1662년에 해직되었다. 
웨스틀리는 그의 부친조다 조금 먼저 불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텔포드는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의 순회 목회, 어부들에 대한 그의 관심, 자기의 원칙에 대한 철저함, 영혼 구원에 성공 및 단조로운 경건 생활 등, 이 모든 것이 그의 유명한 손자에게서 재현되었다." 웨슬리가 조부의 일기를 읽고 매우 귀중하게 여겨서 자기 일기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조부의 이러한 목회와 사상이 그가 근대의 위대한 다원 선교자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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