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해설

 -고려신학대학원 변종길 교수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마 6:9)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올바른 기도의 한 모범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시고 난 후에 그 대안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어떠하였는가? 그들의 기도는 한 마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외식적(外飾的) 기도였다(마 6:50-5). 곧 그들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든지, 사람들이 들으라고 설교하듯이 하는 기도 같은 것은 다 잘못된 외식적 기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방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였다(마 6:7).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그렇게 반복해서 기도하면 자기의 마음속에 이만하면 됐다 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기의 감정(感情)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한국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이처럼 감정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별 생각 없이 “주여 주여”를 반복한다든지, 특별한 이유 없이 목소리를 높여서 고함을 지른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 자기의 감정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시정해야 할 요소들이다.


올바른 기도는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나 자기의 감정에 의지하여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아무리 작은 소리로 말한다 할지라도 다 듣고 계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진실하게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고서 그분 앞에 조심스럽게 아뢰는 진실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초월적 존재이심을 나타낸다. 이는 곧 이방인들이 내재적(內在的) 신관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신적 능력과 기도 응답을 찾으려는 잘못된 태도를 배제하는 것이다. 오늘날 참선이나 요가나 기(氣) 수련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신적인 잠재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서, 여기에는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이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아버지이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언제든지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그러므로 그분과 교통하는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곳에 이미 하나님은 임재해 계시며 그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것이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마 6:9)



주기도에서 첫 번째 간구 내용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냥 “이름이 …”라고 되어 있어서 누구의 이름인지 모호하지만 원문에는 분명하게 “당신의 이름이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 “당신의”라는 말을 빼 버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말 어법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며 원어에는 ‘당신의’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거룩’이란 단어는 원래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하고 완전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거룩’이란 원래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인데, 이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성물’(聖物)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드린 날을 ‘성일’(聖日)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거룩’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뜻을 가진다. 나아가서 원래는 깨끗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된 자들을 가리켜 ‘거룩한 자들’(聖徒)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칭의적 측면에서의 거룩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떨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렇게 된다. 곧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할 때 그렇게 된다. 따라서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기도 제목이다. 그래서 이것이 주기도에서 제일 먼저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걸린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구하였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벌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간구하였던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7).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이키시는 궁극적 이유도 곧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아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겔 36:21-23).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 목회자들 중에서도 정말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각 교회는 모든 것을 자기 교회 중심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교회가 잘 되고 자기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면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개의치 않는 교회가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성도가 너무나 적다. 옛날의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처럼 비록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심지어 자기 나라에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일어서서 외치는 성도들이 아쉽다. 그래서 오늘도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기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한 기도가 되고 있다.


 



3. 나라가 임하옵소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6:10)



주기도 중 두 번째 간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원문에는 “당신의”가 들어 있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가 정확한 번역이다. 곧, 불의한 이 세상의 나라들 가운데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또 다른 나라가 오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역적이요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정변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세상의 통치자들이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엄청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된다. 이 세상의 어떤 혁명보다도 더 근본적인, 아니 전혀 다른 체제와 질서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거기에는 또한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있다. 땅의 요소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눅 17:21). 따라서 현세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땅의 요소를 말하기 곤란하다. 그렇지만 내세에는 분명히 장소로서의 천국(천당 또는 낙원)이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은 ‘의’(義)이다(벧후 3:13, 롬 14:17). 비록 현세의 하나님 나라는 불완전하고 의가 완전히 실현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현세에서는 ‘교회’라고 볼 수 있다)의 주요한 특성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종국적인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불의와 고통과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는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재림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곧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를 가리킨다고 본다. 즉, 이 기도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주기도의 간구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하고 만다면 주기도의 의미를 상당히 축소시키고 말 것이다. 주기도의 간구는 물론 종말에 단번에 임할 사건도 가리키고 있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사건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오늘날 우리들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기도이다. 이는 곧 교회의 전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좀더 강력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이다. 나아가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 된다. 비록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아니하며 늘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 사단의 통치가 물러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마 12:28).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기도에 합당하게 살도록 힘써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4.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앞의 간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간구에는 하늘과 땅의 상태가 분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곧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루어졌지만, 이 땅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이 세상은 아직도 사단이 상당한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고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세상은 어느 정도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눅 4:6), 특히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엡 2:2).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온 우주의 왕이시며 이 세상 만물의 주관자로서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신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세상은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 은혜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도리어 헛된 우상을 섬기며 죄와 불의를 행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는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온전히 이루어졌다. 이는 곧 저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100 퍼센트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죄와 불의가 전혀 없으며 온전한 의가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죄와 악이 횡행하고 있으며, 악한 자가 득세하여 권세를 부리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정직하고 진실한 자가 잘 되기보다도 잔꾀와 술수를 부리는 자가 잘 되고 형통한 일들이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사단의 세력이 물러가고 그 곳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죄와 불의의 세력이 물러나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가 지배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곧 이 세상에 성령의 충만한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는 없다. 이 세상은 마지막 그 날까지 죄와 불의로 관영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은 마지막 날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기도가 된다. 그 날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영원한 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우리 주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여야 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죄와 불의가 많기 때문에 성도들이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은 그만큼 더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그 뜻 이루기를 즐겨 행해야 할 것이다.


 




5.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주기도 중에서 네 번째 간구인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경제 문제에 대한 기도이다. 사람들은 대개 경제 문제에 대해 기도하는 것을 저급하며 저차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기복적(祈福的)인 태도를 가지고 물질을 구하는 기도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구하고 나서 자기의 경제 문제에 대해 합당하게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생활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주기도에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일상적인 일들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가르쳐 준다. 사람은 가능하면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다. 그래서 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부탁하는 일은 좀처럼 잘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그때서야 할 수 없이 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이런 태도가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작은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고 어려운 문제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자기의 힘과 재주만을 믿게 되기 쉽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도 자기를 의지하고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의 일상적인 문제, 사소한 경제 문제에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밀접한 교제를 가질 수 있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만족과 감사를 가르쳐 준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지 ‘평생’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대개는 ‘오늘’ 먹을 양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일’ 먹을 양식을 미리 쌓아 놓으려 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즉, 다음 날 먹을 양식을 위해 미리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모든 것을 하루하루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두셨으며 날마다 공급해 주신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한다.


셋째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준다. 우리에게 육체의 생명을 주는 양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우리의 영혼의 생명도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는 만나를 먹고도 그것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므로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고 말았다(요 6:30-32). 그러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이심을 믿게 되는 것이다(요 6:33-35).


 


6.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주기도 중에서 이 부분의 간구는 우리에게 상당히 부담을 주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과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 용서 받음이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죄 용서 받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며, 따라서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어떠한 선행도 그것이 우리의 죄를 사할 만한 능력이나 효력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삶을 감찰하시고 평가하신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를 면밀히 감찰하시고 평가하시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 사함’을 두 종류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우리를 영원한 저주와 멸망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근본적 죄 사함’이 있다. 이것은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단 한번 있게 되는 죄 사함이며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자주 죄에 빠지며 연약함에 휩싸여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도 날마다 회개하며 죄 용서함을 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일상적 죄 사함’이라 부른다(요일 1:9).


그러나 아무리 회개하고 용서함 받아도 또 다시 죄를 지으며, 그래서 또 다시 죄 용서를 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기를 자꾸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자기가 죄 사함 받은 것인지 받지 못한 것인지,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인지 못 받은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 ‘구원파’ 이단이다. ‘구원파’에서는 중생한 사람은 영원히 죄 사함 받았기 때문에 또 다시 죄 용서함을 비는 것은 잘못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감사만 하며 그들의 일상적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빌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주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기도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 사함의 이치를 잘못 이해한 데서 온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 죄 용서’만 알고 ‘일상적 죄 용서’를 모른 데서 온 오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서 우리를 “죄 없다고 여겨 주셨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죄 없는 천사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우리가 실제로는 죄와 허물이 많지만 “의롭다고 여겨 주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형벌을 면제해 주셨다”는 법적(法的)인 의미이며, 또한 우리를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신분적(身分的)인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도 날마다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빌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용서를 빌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아버지께 용서를 비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용서를 빌지 않는다고 해서 자녀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요 13:10). 그러나 용서를 빌지 않고 지내면 마음이 편치 못하며 관계가 원만치 못하게 되며, 심할 경우에는 야단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7.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이 여섯 번 째 간구도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기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늘 사단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죄와 연약함에 휩싸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실족하여 넘어지며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이런 시험과 유혹이 찾아오는가?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왜 이런 고통이 늘 우리를 따르는 것일까? 그것은 이 세상에는 사단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욥 1:7). 사단은 그의 사자(使者)인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할 수만 있으면 택함 받은 백성이라도 미혹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마 24:24).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한다(눅 22:31).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단은 얼마나 광분하고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신다(시 121:3-8).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셨다(요 17:15). 또한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 그러므로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사단의 유혹과 간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26:41). 예수님의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의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도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사단이 다가와서 그를 유혹하여 시험에 들게 하고 죄에 빠지게 한다. 그런데도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은 자기가 시험에 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우리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벌써 사단의 종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그나마 마지막 믿음은 떨어지지 않고 겨우 구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험에 드는 그 사람은 불행하다. 죄에 빠져 시험에 들면 자기 자신에게 불행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도 큰 손해를 끼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된다. 마귀의 유혹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고 결국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궁극 목적은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물론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시험에 들더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에 들면 그만큼 손해가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어떤 시험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며 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하며, 또한 그 유혹의 실상은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며 불행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나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頌榮)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몇 고대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지만 대부분의 사본들은 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이 부분의 말씀은 주기도의 마무리 부분으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먼저 ‘나라’(바실레이아)라는 말은 원래 ‘왕’(바실레우스)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라’란 것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 곧 왕국(kingdom)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왕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나라의 소유주이신 동시에 통치자이시며 또한 이 나라의 중심 인물이시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 나라에 속한 ‘백성’이 있으며 또한 ‘영토’와 ‘통치 원리’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것이며 그의 주권에 속한다.


다음으로 ‘권세’(뒤나미스)란 다스리는 힘 또는 능력을 뜻한다. 아무리 말이 옳고 훌륭해도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것은 빈말에 그치고 만다. 결국은 힘을 가진 자가 이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악령들이나 이방신들이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며 섬기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세상과 온 우주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가진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분에게 힘이 있고 그 분에게 온 우주를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


마지막으로 ‘영광’(독싸)이란 말은 원래 ‘빛이 비취는 것’을 뜻한다. 빛이 비취면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정의와 생명과 환희가 약동하게 된다. 따라서 ‘영광’이란 모든 좋은 것, 의로운 것, 긍정적인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고 계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운 것들과, 또한 그의 피조물에게 비춰 주시는 영화, 광휘, 찬란함을 뜻한다. 우리는 이러한 영광이 하나님께 속함을 고백한다. 영광은 사단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속한 것이다.


이러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대통령은 정해진 임기 동안만 권세를 누리지만, 그리고 이 세상의 왕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 권세를 누리지만 우리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권세를 가지시고 영광을 누리신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송영은 그저 주기도를 끝맺는 형식적인 부분이 아니라 앞에 나온 모든 간구의 기초를 이루며 근간이 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을 고백하는 말이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부귀와 권세와 영광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가장 고상하고 수준 높은 기도이다. 옛날에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대하 29:11)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고백에 합당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참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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