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직의 자세
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바른 자세를 가진 제직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하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제자리가 있다. 사람은 저마다 제 자리를 알고, 제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인은 교인의 자리가 있고, 제직은 제직의 자리가 있다. 교인은 예배 참석과 헌금과 치리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의무를 감당하는 교인들 중에서 선택받은 사람이 제직이다. 그러면 제직이 지켜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1.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 세우신 기관은 가정과 교회 둘 뿐이다. 그중에 교회는 독생자 우리 주님의 보혈로 세운 기관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2000년 역사상 온갖 핍박과 거센 시험의 파도를 다 받아 왔지만, 결코 넘어지지 않고 계속 성장 발전해 왔다. 교회를 대적하던 국가나 사람은 멸망했어도 주님의 교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지상교회가 때때로 부패하여 그 존폐가 위기에 몰린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되 교회개혁을 위해서 일어난 모든 운동은 그 시대에 교회를 위하다 쓰러졌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든든히 서왔다. 이것은 신비 중에 신비이다. 제직은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분명한 성경적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할 때,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고전3장11절 참조), (골1장18절,엡1장22절,엡5장23절)
(2)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집.
구원과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며 생명과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새사람을 만드는 곳이며, 멸망할 영혼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주이다. 신11장19절에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했다.
(3) 교회는 예배하는 곳.
인간의 모든 행위 중에 예배 행위보다 더 귀중하고, 복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는 없다. 요4장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다.
(4) 교회는 특히 기도하는 집입니다.
대통령과 만나 대화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몇 만 배 더 귀중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고, 사56장7절에서도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고 했다.
(5)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다.
딤전2장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가장 큰 소원, 한이 맺힌 소원은 죄로 멸망할 영혼이 구원받는 것인데, 이 사업을 민간 정부나 학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막중한 사명을 교회가 한다.
(6) 교회는 구제하고 봉사하는 곳이다.
(7) 교회는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으로 교제하는 곳이다.
2. 성수주일
주의 날을 존중히 여기는 자세(사58:13-14) 초대 교회는 안식후 첫날은 주의 날(계1:10)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행20:7) 그러면 성수주일의 자세는 무엇인가?
(1) 예배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주의 날에는 세상 일에서 떠나 쉬며 일체의 오락에서 떠나야 한다. (사58:13-14) 팔고 사는 일이나 거래하는 일체의 일을 그만두고 (느13:15-22), 모든 시간을 예배드리는 일에만 사용하여야 한다.(렘10:25,신6:6-7,욥1:5,삼하6:18-20 벧전3:7,행10:22) 주의날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현재 계시다는 확신 기쁨을 나타내는 날이다. 주의 날은 휴식만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성별된 날이다. 주의 날을 존중히 여기지 않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는 제직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20:8)는 주의 날은 예배의 날이다.
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의 하나님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하신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예배와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 즉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요4:24).
예배의 목적
예배의 목적을 교파와 사람에 따라 달리 말할 수 있으나,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예배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는가? 고린도전서14장에 의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교회의 건덕"을 통하여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믿음, 사랑, 소망, 용서, 겸손 등이 함양되어 교인들이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덕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 그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직은 예배를 존중히 여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예배의 준비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마음과 육체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기 위해 몸을 깨끗한 옷을 입고 단정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예배자는 적어도 예배 시간 10분 전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준비하고 하나님의 예배에의 초대를 기다려야 한다. 예배시간은 하나님과 약속한 시간이기 때문에 지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배는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고 엎드려 자복하는 마음과 복종하는 진실한 행동이 따라야 한다.
예배의 좌석은 앞자리부터 차례로 앉아야 하며, 안내를 맡으면 예배 30분전에 나와야 예배분위기를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문을 단속하고, 어린이들을 살피며, 잡음이 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 안내 위원은 그 주일 주간의 모든 에배와 집회의 안내를 겸손한 마음과 친절한 행동으로 하여야 한다. 헌금 봉사를 맡은 제직은 복장과 화장은 단정하고 덕스럽게하되 기도하는 마음과 경건한 모습으로 수금하되 예배후 헌금함을 회계에게 인계하여야 한다. 헌금 위원은 그 주간의 모든 수금과 책임을 진다.
예배자는 교회에 출석함으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부를때 같이 감사한 마음으로 힘차게 부르고, 기도할때 기도를 같이 하며, 설교 할때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배의 모든 순서에 정성을 다해 참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도록 힘써야한다.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자세 (계22:18-19)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 되는 복음의 진리이다."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육신이 육의 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은 신령한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의로 교육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제직은 성경의 애독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애독할 이유는
첫째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한다.(요20:31).
둘째, 성경을 통해서만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다.(시119:111).
셋째, 성경은 신자에게 빛을 주며 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시119:105).
성경을 애독하는 정신은
첫째, 언제나 거룩한 마음과 기대하는 정성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둘째, 기쁘게 가르침을 받을 마음과 복종할 정신으로 읽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고자 힘쓰며 읽어야한다.
성경 애독의 방법은
첫째, 성경은 매일 읽어야 한다.
둘째, 성경은 기도하며 읽고 읽으면서도 기도하는 마음이 있어야 깨닫게 된다.
셋째,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구절을 풀려고 하거나 단지 지식으로만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기 쉽다.
넷째, 성경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복종하며 내 전부를 맡겨 버리는 태도로 읽어야 한다.
다섯째, 성경은 내 자신의 믿음과 덕을 높이는 한편 남의 믿음과 덕도 높이기
위하여 내 경험을 살려 말씀을 전파하여야 한다.
설교를 존중히 여기는 자세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그러므로 제직은 설교를 존중히 여기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설교도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생각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설교도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라"(살전2:13) 고 했다. 설교는 설교답게 하는 것은 말하는 기술이나 설교자의 종교적 사상도 아니고 설교자의 설득력도 아니다.
참된 설교가 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여질 때이다. 그러므로 제직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히 여기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의 교훈이므로 믿으려는 겸손한 마음과 그대로 행하려는 태도로 들어야 한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제직들이 봉사하는 교회는 부흥한다.
설교를 듣는 정신은
첫째, 내 자신이 복음의 말씀 앞에서 죄인임을 자인하여야 한다.
둘째, 상한 내 심령을 고치려는 겸허하고도 간절한 심정이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사명과 과제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설교를 듣는 태도는
첫째, 성경 본문을 찾아 살피면서 들어야 한다.
둘째, 설교자를 바라보면서 다른 곳을 보지 않아야 한다.
셋째, 설교의 중심점 자기 생활에 반영시켜 자기의 것으로 받는 태도가 있어
야 한다.
설교를 들은 후에는
첫째, 의문되거나 이해되지 않은 점을 조용한 시간에 설교자를 직접 찾아 지도를 받아야 한다.
둘째, 설교를 통한 느낌과 소감을 간증하며 설교자와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면서 교회 생활에 힘을 써야 한다.
힘써 모이는 생활
교회의 특징은 힘써 모이는 데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했다. 제직이 교회를 위한 헌신적 자세는 우선 집회 때마다 열심히 참석함으로써 작은 등불의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예배 시간보다 일찍 출석하여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예배를 위한 집회만이 아니라 부흥회나 수련회 같은 특수 집회는 물론 제직회에도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 훌륭한 헌신의 생활이다. 기독교는 본질상 개인적이 아니라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이기를 강조한다. 신자들이 모일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하기 때문에 초대 교회 때부터 모이기를 열심하였고(마18:20,행2:46-47)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하였다. 모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마18:20). 그러므로 교회의 모임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요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따라서 모일 때는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고전14:12-40). 그러므로 모임에서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못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직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도록 힘써야 한다.
(2) 봉사(선행)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2:17),"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막12:12)하셨으니 주의 날은 선행의 날이 되어야 한다. 제직들은 주의날에 슬픔에 잠겨 있는 자, 병에 신음하는 자 실패한 자, 옥에 갇혀 있는 자를 방문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주의날에 선행도 다른 날의 선행도 다른 날의 생활과 같다고 생각할는지는 모르나 세속적 목적으로 하는 선행보다. 주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는 선행은 가장 효과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된다.
첫째 봉사정신으로 일하는 자세 (벧전4:10)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하였으니 제직은 봉사의 정신으로 일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다. 어떤 제직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제직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 각자가 받은 달란트를 어떤 정신으로 사용하느냐가 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봉사는 보상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칭찬을 받을 때만 충성하거나 보상이 있을 때만 열심히 하는 것은 봉사가 아니다. 이러한 사람은 일이 축복이거나 기쁨이 되기보다는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이 된다. 사람이 보상만을 위해 일하게 되면 품꾼에 불과하다. 일이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므로 축복이 고역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보상에 얽매이지 말고 봉사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봉사는 의무에 매여 일하는 것이 아니다.
의무에만 매여 일하는 사람도 일의 기쁨이나 보람을 맛보기란 어렵다. 의무나 책임이 나쁠 것은 없으나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순전히 의무감 때문에 한다면 일이 딱딱해지고 분위기가 굳어진다. 그러나 맡은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제직으로서 봉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봉사정신으로 일할 때 기쁨이 넘치게 된다.
봉사는 주께 하듯 하는 생활이다 (엡6:7).
하나님은 경외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맡은 일을 할 때 주께하듯 하는 것이 봉사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이니 영광으로 알고 일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니 정성을 다해 일하여야 한다. 이러한 정신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일하는 것이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고 도리어 즐거운 봉사가 된다. 제직이 봉사 정신으로 일하려면 첫째, 협동 정신이 있어야 한다. 교인 사이에서나 제직 사이에 서로 양보하고 양해하는 협동정신이 없이는 교회에서 봉사할 수가 없다. 나와 조금 다르지만 서로 양보하고 협조할 줄 알아야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같이 봉사할 수 있다. 교회나 세계를 위한 봉사에는 꼭 같은 원리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로, 오래 참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어떤 좋은 일을 해도 난관이 반드시 있다. 이러한 난관이 있을 때 어떤 태도를 가지고 극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봉사 생활이 좌우된다. 백번 찍어도 넘어 가지 않는 정신으로 끝까지 나아가는 자가 성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나 곧 너희 행하는 바를 더욱 많이 힘쓰라 "(살전 4:1) 하였으니 일을 당해도 참고 견디어 성공하기까지 더욱 힘써야 한다.
모범의 정신으로 일하는 자세 (딤전4:12)
일꾼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모범이 되려면 더욱 어려운 일이다. 모범이 되는 일꾼이란 구경꾼처럼 방관자도 아니요, 말꾼처럼 말만 하는 자도 아니요, 싸움꾼처럼 불평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모범되는 일꾼이다. 교회 일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일의 방법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일하는 일꾼이 모범이 되는 일꾼이다. 사람들은 독주하기를 좋아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급하다고 하나님보다 앞서도 안되고 피곤하다고 하나님보다 뒤져도 안 된다. 일마다. 걸음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모범이 되는 일꾼이다. 그 직책이 훼방을 하지 않도록 힘쓰는 일꾼이 모범이 되는 일꾼이다. 일을 하다 보면 실수하기도 쉽고 남에게 오해를 받게도 된다. 그러나 제직은 그 직책이 훼방하지 않도록 무슨 일이나 아무에게든지 거리낌이 없이 힘써야 한다. 바울이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이든지 아무에게든지 거리끼지 않았다"(고후6:3) 고 했다. 섣불리 잘한답시고 마구 돌아다니며 할 것 못할 것 함부로 손댈 것도 아니요, 잘한다고 하는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꾼은 되기도 어렵고 된다고 하더라도 일하기가 어렵고, 일한다고 하더라도 모범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너무 쉽게 생각지 말고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
3. 헌금
헌금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십일조, 감사, 주일, 주정, 선교, 건축, 구제. 계절(추수 맥추 부활 성탄/신년/송년) 그밖에 여러 가지 지정헌금이 있다.
(1) 십일조
십일조헌금은 주의 명령으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십일조 헌금의 성격적 원리를 보면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고 그 보답으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 (창14:20).
아브라함이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라고 말하자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이라는 문장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십일조의 범위를 규정해주는 단서가 된다. 또 하나는 십일조의 성격 규정이다. 19절에는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멜기세덱이 하나님께 복을 빌었고, 20절에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라는 멜기세덱의 요청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는 아직 모세의 율법이 시행되지 않은 때이다. 또 멜기세덱이 노략물의 10분의 1을 아브람에게 "과세"했다는 암시도 전혀 없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세무요원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보답의 형태가 십일조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더 복을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닌 감사제의 행위이다. 이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헌금 방법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태도를 예시해주고 있다.
야곱의 십일조 약속 (창 28:18-22)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중 광야에서 꿈을 꾼 다음 그곳을 벧엘이라 칭하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데, 이 서원의 마지막 내용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레위기 27:30-34에 나타난 십일조; 농산물의 십일조와 가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칠 것을 말하고 있다.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 그리고 소 떼와 양 떼의 십분의 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거룩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히 가축의 십일조는 새로 태어난 것 가운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가축 가운데서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있다 (32절).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께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누가 그 십분의 일을 꼭 무르고자 하면, 그 무를 것의 값에다 오분의 일을 더 얹어야 한다. 소 떼와 양 떼에서도, 각각 십분의 일을 나누어 주에게 거룩하게 바쳐야 한다.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짐승을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 것마다 바쳐야 한다. 나쁜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을 골라내거나 바꿔치기를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가 꼭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것을 바꾸었다면, 처음 그 짐승과 바꾼 짐승이 둘 다 거룩하게 되어, 도저히 무를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더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고 내리신 명이다.
민수기 18:20-32에 나타난 십일조; 레위기와는 달리 민수기에서는 십일조 전부가 레위인의 몫이고 그 중에서 십분의 일만 제사장에게 돌리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레위 사람이 십일조를 받아야 할 당위성을 먼저 언급한다. 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의 땅에서는 아무런 유산도 없다. 그들과 더불어 함께 나눌 몫이 너에게는 없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가 받은 몫, 네가 차지할 유산은 바로 나다."(20절).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기 때문에 땅의 소산물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에게는 회막 일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고 오직 레위 지파에게만 주어졌다(23절).다른 지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전적으로 성막 봉사에 대한 의무를 지닌 레위인을 위하여 십일조를 드렸다. 레위인이 받는 십일조는 회막에서 하는 일에 대한 보수의 성격을 띠고 있다(31절). 바로 여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용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레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유산이다. 특히 레위인도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25절, 28절).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비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리기 위해 들이나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얽매이지 않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비 대책이 가정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종교적 예식들이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합당하게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임한다고 믿었다.
신명기 12:6-19, 14:22-27에 나타난 십일조; 신명기 12:6-19에 언급된 십일조는 제사와 함께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서 가족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축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 축제에는 자녀들, 남종과 여종 그리고 차지할 몫이나 유산도 없이 성 안에서 사는 레위인을 다 초대하여 함께 즐거워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12절). 여기에서 드려진 십일조는 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었다(17절).
신명기 14:22-27에 기록된 십일조 규정에는 매년 농사를 지은 수확물의 10분의 1을 드리라고 되어있다. 신명기 12:6-19절과 마찬가지로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특히 이 축제에 레위인을 초대할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종들을 초대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하나로 이해된다. 십일조를 드릴 때 축제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 축제에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을 초대할 것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말라기에 나타난 십일조(말 3:6-12) 말라기서에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8절).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이 범죄 행위에 해당되는 까닭은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인간은 단지 이것을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10분 1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간은 나눔의 최소화를 실천하게 되는데 이것은 물질소유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훈련의 기본단계이다. 이 훈련을 통하여 인간이 물질의 종으로 타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의 운용을 통하여 복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소득의 재분배를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십일조의 규례를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인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 한 것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사람에게 저주를 경고하고 바치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밖에 신약 성경 마 23:23, 눅 18:9-14, 히7:1-4 에도 십일조 헌금을 교훈하고 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와 온전한 십일조를 바친다고 양심이 있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십일조는 신자의 소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준 것의 십분의 일 또는 그 이외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경제관은 물질이 그의 소유가 아니라 단지 위임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2) 감사헌금
헌금은 감사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해 전체 생활을 드리는 감사의 표로서 예배를 통하여 바치는 제물이다. 헌금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인 동시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신앙 고백의 실제적인 행위이다. 헌금은 주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드리는 것이다. 헌금은 신앙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이 감사의 마음을 물질로 나타내는 것이 헌금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아까와하거나 마지 못해 하는 일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신앙의 표현이다(고후9:7). 헌금은 헌신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사회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의무를 다하기 위한 실천 행위의 하나이다. 헌금만이 헌신의 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헌금은 헌신을 나타내는데 매우 구체적인 방법이 된다. 헌금은 보답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드리는 것이 헌금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예배의 일부로서 드리는 예배행위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예배의 일부로서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에 참여하는 정신으로 드리는 것이 헌금이다. 제직은 각종 소득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정신으로 헌금해야 한다. 출생/생일/건강/취직/결혼/집/등등
(3) 헌금의 원리
첫째 주의 명령준행
둘째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하고 아까와 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요,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고후9:6-7)
셋째 준비해야 한다
4. 그 밖의 제직의 신앙생활
기도하는 생활과 성경 읽는 생활과 전도하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3대 의무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일이요 성경 읽는 일은 자신에게 대한 일이요, 전도는 이웃에게 대한 일이다. 이 세 가지는 신앙생활 성장의 기본 요소로서 그 중에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고서 신앙생활이 순조롭게 성장할 수가 없다.
(1) 제직의 기도생활
찬송을 부르는 일과 (행2:47) 기도하는 일과 (눅11:1-2), 성경 읽는 일과(행17:11) 그리스도인이 은혜 받는 세 길이다. 그 중에도 기도하는 일은 찬송을 부르는 일이나 성경 읽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가 기도라는 통로로써 시작되기 때문이다. 제직 중에는 공중 앞에서 기도하라는 지명을 받으면 기도하기를 주저하는 이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개인적으로 은밀히 기도하지만 제직이라면 공중 앞에서 기도할 줄도 알아야 한다. 대정치가인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진다는 왕의 엄명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다. (단6:10).
기도란 무엇인가 ?
기도란 내가 믿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가지는 하나의 대화이다. 기독교가 믿는 믿음의 대상은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는 인격자로서의 하나님이다. 이러한 신을 믿는 신자들은 언제든지 그 신과 관계를 가지고 교제를 하고 영적으로 대화를 해야한다. 그러한 교제와 대화가 곧 기도이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요 요청이요 간구이다.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강요와 억지 쓰는 것을 기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하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주장과 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한 물음이다.
기도의 주제에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있어야한다. 다음에는 나의 사정을 고하고 내 교회와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인류의 문제에 대하여 사정을 아뢴다. 그 다음에 이러 이러한 문제가 있어서 나는 이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 주십사고 간구한다.
기도는 언제든지 공동적인 기도이어야 한다. 개인이 드리는 기도가 있지만 개인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나의 가정, 이웃, 교회, 나라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한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의 이 땅 위에 건설되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기도가 자기 개인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자세
옛날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일한 사람들의 성격, 재능, 지위, 경험이 각각 다르지만 놀랍게도 공통된 점은 어느 누구든지 기도했다는 사실이다.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않겠다."(삼상12:23)고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기도하는 자가 가질 태도가 있다.
첫째, 참마음으로 기도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부터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히10:22)고 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를 들으신다.
둘째, 믿고 기도하라.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라"(마21:22)고 말씀하셨다.
셋째, 인내로써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하셨다. (눅18:1-7).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인내성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모든 일을 전환시키며 변화하는 원동력이다.
어떻게 기도할까 ?
예수님은 기도할 때 위선자처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지 말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다.(마6:5-6)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였고, 바울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께 기도하였다.(엡6:14).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전능자이다.
둘째, 회개하고 기도하라.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죄를 고백하여야 한다.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약5:16).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심으로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죄인의 기도를 하나님은 듣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네가 제단에 드리려 할 때에 형제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은 것이 생각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나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마5:23-24)하엿으니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전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잘못된 것을 자복하여야 한다.
셋째, 기도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가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제쳐 놓고 직접 하나님과 만나 대화한다고 한다. 그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서 기도해야한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15:16) 하셨다.
언제 기도할까?
예수님과 바울은 언제든지 기도하라고 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멸망이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구원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를 해야 한다.
첫째, 항상 기도하라. 바울은 "깨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라"(골4:2)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하였고, 예수님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18:1)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마7:7) 고 하셨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셨고, 이른 새벽에도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셨고, 이른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금식 기도를 하셨고,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도하셨고, 기도로 도와주기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제직들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가되어야 한다.
둘째, 환란 때에 기도하라.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요 도우심을 구하는 간구이라면 어려운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시작하시면서 금식 기도하셨고 병을 고치실 때마다 기도하셨고, 십자가를 앞두고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다. 바울도 전도하다가 핍박을 당할 때 기도했고, 옥중에서도 기도했고, 풍랑 중에도 기도했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고 시인은 노래했고, 이사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고 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 그러므로 환란이나 시험을 당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셋째,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라. 유대인들은 저녁. 아침. 정오 이렇게 하루에 세 때는 기도의 시간이다. 시인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55:17)고 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고(단6:10),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다.(행3:1). 예수님도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으니(막1:35) 제직들은 하루에 몇 차례 기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실시하는 새벽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여야 한다.
제직들이 공중을 대표하여 기도할 때 너무 길게 기도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자기 혼자의 기도이라면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겠으나 공중 예배 때 기도는 너무 길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2) 제직의 성경 읽는 생활
신앙생활에 빼 놓을 수 없는 일은 성경 읽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쉬지 않고 숨쉬고 하루 세 번 음식을 먹음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신자는 숨쉬는 것 같은 기도와 음식과 같은 성경 읽기로써 신앙이 성장한다.
신자들 중에 신앙생활에 생기를 잃거나 열심이 식어가는가? 그 원인은 마음의 양식인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 시인이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다"(시102:4) 고 탄식한 것은 성경 읽지 않는 신자의 모습이다.
신앙의 사람이요 고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죠지 뮬러는 "나는 54년의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쁨이 더했고 성경은 나에게 있어서 항상 새로운 책과 같이 신선했다"고 하였다. 그는 "신자와 생활에 열심이 없는 것은 성경 읽는 열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기원과 편성의 순서 또는 그의 과정이나 원어 등을 자세히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성경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성경은 기독교의 유일한 경전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라고 하면 흔히 신약 성경을 생각하지만 구약 성경도 다 같이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제직들 중에도 구약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분들이 있다. 구약 성경책은 왜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까? 하고 어떤 신자에게 질문을 했더니"구약성경은 무거워서"하기에, 설교자가 "그러나 죄의 무거운 것을 생각하면 가볍다"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하나님 자신이 자기 자신을 인류에게 계시하고자 하여 진리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의로 교육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독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
둘째.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가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구약 39권은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 쓴 것으로 천지 창조의 일로부터 시작하여 선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볼 수 있게 편찬되었다. 각 책을 통해 오리라는 메시야 즉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신약 27권은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에 쓴 것으로 그리스도 탄생의 예고로부터 그의 탄생과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강림, 교회의 탄생과 그의 발전과 그리고 사도들의 전도와 편지에 및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오랜 기간에 수많은 사람이 쓴 책이지만 통일성 잇는 한 권이라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요사이 성경 연구가 성행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성경에 대해 학문적 연구에 그치고 성경이 전하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등한해서는 안 된다.
셋째, 성경은 매일의 영의 양식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는 항상 축복을 받았고, 그 말씀을 잊고 등한히 할 때는 재앙을 받았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지키며 밤이나 낮이나 그 말씀을 묵상하였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행17:11)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 동안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걷어 매일의 양식을 삼았다 (출16장).
우리들은 영의 양식을 위하여 매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일주일분의 음식을 한기에 다먹을 수 없음같이 영의 양식도 한 번에 많이 먹어 둘수는 없기 때문에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한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까
성경은 쓴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성경의 본래의 목적대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신앙의 책이므로 성경에 의하여 신앙을 얻고 기르려는 목적으로 읽어야 한다.
첫째, 성경은 차례대로 읽는 것이 좋다. 성경은 대체로 연대순, 중요한 정도에 따라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차례대로 읽는 것이 좋다. 한 차례 통독이 끝나면 전에 읽으면서 표해 두었던 부분을 고요히 묵상하면서 두세 번 읽으면 뜻밖의 성경의 뜻을 잘 깨닫게 된다. 구약은 나무의 뿌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약을 꽃과 열매라고 한다면 신약을 더 많이 읽을 필요가 있으나 구약도 결코 소홀히 읽어서는 안 된다.
둘째, 성경은 매일 읽는 것이 좋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있다고 한다. 하루의 황금과 같은 시간은 이른 아침이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음이니이다."(시88:13).
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하였다. 조용한 아침 한 시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주 예수의 생애의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살과 피를 삼아 살았고 승리 하였다. 12세 때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었고 (눅2:46-47), 광야 시험 중에도 세 번이나 성경 말씀으로 승리하셨고(신8:3,6:16-13), 나사렛 회당에서도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다.
(3) 제직의 전도하는 생활
전도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지상 명령형이다.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할 일임이라"(고전9:16) 고 말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딤후4:2)고 하였다. 전도는 제직의 책임인 동시에 그것은 또한 영광이요 즐거운 일이다.
전도의 대상
전도의 책임은 교역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직은 언제나 전도에 불타서 가족에게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제직은 자기 가족을 먼저 전도하여야 한다. 믿지 않는 부모나 자녀를 주께로 인도하지 않으면 제직의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다. 가정을 복음화 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제직은 자기 직장에 파송 받은 전도인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직장 전도는 말과 혀로 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여야한다. 직장 전도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지만 실망하지 않고 끈기 있게 계속하면 의외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전도의 방법
전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 있으나 그 중에도 빌립과 같이 개인 전도가 첫째가는 전도 방법이다. 빌립은 자기 고향 사람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했듯이 친구나 이웃을 찾아 그리스도를 전하여야 한다.
전도 방법에는 문서 전도도 있다. 전도지나 전도용 책자를 우송하거나 직접 전달하여 전도할 수 있다. 병원에서 입원한 환자나 교도소 같은 곳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문서 전도를 하면 전도에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전도 방법에는 노방 전도도 있다. 길에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있다. 혼자서나 혹은 짝을 지어 조직적으로 가두 전도를 해도 좋다.
교회에 다소간 관심을 가졌던 사람에게는 신앙을 일으켜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겔3: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겔3:7) 하엿다. 전도는 신자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책임이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 예수는 복음 선교를 위하여 성경을 주시며 땅 끝까지 증인 되라고 하셨으니 제직은 누구나 전도인이 되어야 한다.
(4) 제직의 가정생활
한국에는 집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와 자녀가 모여 사는 집보다는 정신과 생활이 한데 어울리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영어의 홈(home)이란 경건한 청교도들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은 데서 시작된 말이다. 페스탈로치는 "그리스도교의 특산물은 국가가 아니라 가정이다. 오늘 문명 세계에 있어서 홈(home)이라고 일컫는 것은 특히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가정을 제단으로 삼자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제직들은 내 가정을 제단으로 삼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제직들은 가정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신앙을 생활화하는 장소이어야 한다. 가정의 제단으로서 가정 예배는 대단히 중요하다. 제직은 가정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킬 책임이 있다.
스퍼젼은 "많은 원수가 있어서 제단의 불을 끄려고 한다. 그러나 그림자 뒤에 감추어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제단에 기름을 부어 더욱더 이 불길을 일으켜 준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성경의 나무를 더하고 기도의 바람을 보태어 제단의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가정 예배는 가정 화평의 원천이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제직은 온 가족이 제단 앞에 엎드려 예배하는 경건한 기풍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예배는 간단히 진행하되 가족들이 교대로 예배를 사회할 수도 있고 순서는 그 가정의 형편에 적합하도록 할 것이다.
가정을 교육의 장소로 삼자
가정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 중에도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이 신자일 때 여러 가지 반대가 있다. 비난과 박해를 견대며 가족을 구원하려면 먼저 믿는 가족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요행 온 가족이 믿을 대 그 집의 중심은 그리스도임을 인식시켜 크리스챤 가정에 합당한 집이 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가정의 영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가정 예배를 드리되 먼저 믿는 부모나 제직된 가족이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한다. 사랑과 화평이 가득한 가정이 되어야 무언의 신앙 교육이 된다. 가족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감화시키는 일은 먼저 믿는 가족의 책임이다. 이것은 사실 어느 한 가족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가족을 위해 매일 기도하여야 한다.
어린이를 양육하는 어머니가 음식에 관심이 있듯이 가족의 심형을 위해 바른 영양을 섭취시켜야 한다. 교회 생활을 중심한 가정 생활에 마음을 써서 예배와 봉사에 가족을 참사시켜야 한다. 제직인 가족은 그 가정의 교역자임을 인식하고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가정이 되도록 교육하여야 한다.
빌립보의 루디아는 자기 집을 전도하는 장소로 제공하여 그 집안이 다 세례를 받고 빌립보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행16:14-15). 가정은 교육과 전도의 두 가지 사명을 지니고 있다. 가정을 전도 장소로 제공되는 것은 특별 축복이다. 초대 교회의 집회는 개인 집에서 시작되었으나(행12:12), 빌립보에는 루디아의 집(행16:40), 에베소에는 아굴라의 집(고전16:16), 라오디게아에는 눔바의 집(골4:15)이 전도 장소로 제공되었다.
가정의 그리스도를 중심삼아 신앙 훈련 장소가 되고 교육하는 장소가 되고 복음 전파라는 장소가 될 때 가정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가정을 화평의 장소로 삼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제물이 되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나누어진 장벽을 헐어 버리고 하나로 만들었다. 제직이 된 사람은 한 가정의 화평을 이룩하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가정을 화평의 장소로 삼으려면 다음 몇 가지에 유의하여야한다.
첫째, 가족의 심령에 천국을 이룩하자. 심령 속에서 사탄을 내쫓고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 주님이 심령을 지배하면 개인의 심령에 천국을 소유한 것이다. 구약에 욥의 가정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가정에 화평을 잃어버리지 않은 비결은 무엇인가? 그 마음속에 기도하는 마음과 성령이 주신 평화가 그 심령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욥2:7-10) 제직은 자기 가정을 화평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 가족 하나하나의 심평에 천국을 이룩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가족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자. 가정의 화평은 사랑으로만 이룩할 수 있다. 주님은 이웃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한 가족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할 수 없겠는가?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되 지식을 따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니 (벧전3:7),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아내의 남편에 대한 지식이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 지식과 (골3:18), 아름답게 단장해야 할 지식이다.(벧전3:5), 복종이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하라는 것이다. 아내가 복종하면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벧전3:1) 고 하였다. 아름답게 단장한다는 것은 마음에 숨은 사랑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는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벧전 3:3-4).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지식은 아내는 연약한 그릇임을 알아야 하는 것과 (벧전37) 괴롭게 하지 말고(골3:19) 극진히 사랑해야 한다 (엡5:25) 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어 천국 가는 동행자가 되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도와주고 위로하고 이해해 주어야 한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예민한 것이 아내이므로 외로워하고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두어 사랑하되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불화로 인한 난폭한 언사와 행동으로 아내를 괴롭혀서는 가정의 화평을 도모할 수가 없다.
남편은 범사에 아내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디 2:7)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육적 생활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맡은 청지기로서 범사에 본을 보여야 한다. 주부들은 교회의 집사가 되기 전에 어디까지나 현모양처로서의 사명이 주께서 맡겨 주신 사명이요, 또 십자가임을 명심해야 하며, 또한 남자들은 교회의 제직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다. 가정에서 제직으로서의 본을 보이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 교회에서 충실한 제직이 된다.
(5) 제직의 사회생활
제직은 신앙생활은 사회와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제직은 하늘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사회의 한 시민이다. 제직은 이중의 시민으로 하늘나라 시민의 책임과 의무가 있는 동시에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도 있다. 시민 공동체인 사회와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중심에는 사회성이란 공통성이 있다.
만일 제직이 사회성을 무시할 때 맛 잃은 소금이요 빛을 비출 수 없는 등잔불이 될 것이다.
제직과 직업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의 생활 수단으로 생업을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직업의 귀천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2:28)고 하였으니 노동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직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편이어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기구이며 직업은 그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직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편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본업이요 직업은 그를 추진하기 위한 부업이며, 또 직업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한다.
바울의 직업관을 보면
첫째, 형제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을 하라고 했다(살후3:8).
둘째, 이웃을 도와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했다 (엡4:28,살후3:12).
셋째,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가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강조하였다.(딤전6:6-8)
직업은 신앙생활에 덕스러워야 한다.
제직이 무슨 직업이나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으나 주님의 영광을 위한 직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므로(고전6:12) 신앙생활에 덕을 세우도록 힘써야 한다.
제직이 사회에 해가 되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이라 해도 신앙생활에 덕이 되지 않으면 그러한 직업을 가질 수는 없다. 청지기의 삶을 감당하는데 지장이 되는 직업이라면 아무리 수익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직업을 전환하여야 한다.
직업에 충실하여야 한다.
제직은 직업에 대하여 성실하고 근면하여야 한다. 성경에 "종된 이들이여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실을 다하라"(엡6:5)고 가르쳤고, "작은 일에 신실한 자가 큰일에도 신실하다"고 했다. "때를 따라 정한 양식을 주는 신실하고 슬기가 있는 관리인이 누구겠느냐?" (눅12:42) 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은 진실성이 있는 자의 직업이나 직장을 축복하실 것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출20:9)는 계명을 따라 제직은 자기 직업을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잠10:4)는 교훈과 같이 직업을 위해 부지런한 자를 하나님은 도와주신다.
직업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업으로 알아야 한다.
제직은 자기의 직업을 주님이 맡겨 주신 사업으로 알고 주님께 부끄러움이 없는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과 같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한다."(빌1:21) 는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일을 위하거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사업을 하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일하는 자이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주님을 위한 일이요 복음 증거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 어떤 일을 하든지 기쁨과 감사로써 일할 수 있다.
제직들은 직업관을 성경적인 입장에서 바로 가져야 하며 직업을 선택하거나 경영할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힘써야 한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위해 힘쓰는 직업인에게 의식주를 넉넉하게 주실 것이다(마6:33).
제직과 언어생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축복으로 말을 주셨다. 그러나 맡은 사람에게 유익한 면도 있지만 위험하고 두려운 면도 많다는 것이다.(약3:8,시57:4,잠21:23). 그러한 의미에서 말을 조심해야 될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제직은 물질과 시간으로 교회를 봉사하지만 혀와 말로써도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골4:6)고 하였다.
하지 않아야 할 말 다섯 가지
첫째, 거짓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엡4:25). 거짓말은 습관이 되기 쉬운 것 이므로 하나님을 위한 말이라고 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 남의 험담은 말하지 말라(엡5:4). "두루 다니며 험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창11:13) 하였으니 남의 허물을 덮어 주면서 고치도록 권면하는 것이 험담으로 폭로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셋째, 형제에게 이간이 될 말은 하지 말라(잠16:18).
제직은 모든 사람으로 화목해야 할 책임이 있다.(막9:50,살전5:13). 화목의 사명이 있는 제직은 이간을 붙이는 행위는 주님의 몸에 상처를 내는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 중에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를 미워하신다.(잠6:19)고 하셨다.
넷째, 자기를 자랑하는 말을 하지 말라(시12:3).
언어생활에서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 중에 한 가지는 자기 자랑이다. "자랑은 악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자랑하는 혀를 끓으시리라"(시12:3)하였고, 바울은 자랑하는 행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였다.(롬1:30). 아무리 충성을 다하는 제직이라도 자기를 자랑하는 입술로 그 공을 소멸해 버리는 사례가 허다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되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고 하였다.(빌3:3).
다섯째, 불평이나 원망하는 말을 하지 말라(시37:1)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불평이나 불만을 토하지 않아야 한다. 심지어 악을 행하는 자로 인하여도 불평하는 것은 죄가 된다(시 37:1). 우리는 상대방을 불평하고 원망하려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려는 교양과 지성이 필요하다.
바울은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를 기록하였다"(고전10:10-11)고 하였다.
불평이나 원망은 이해심이 없거나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누추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5:4) 고 하였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불평이나 원망은 해소된다.
해야 할 말 다섯 가지
말조심이란 무조건 함구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른 말은 꼭 해야 할 때가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잠25:11)라고 하였으니 해야 할 말이 있다.
첫째,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마5:37).
형제가 억울하게 송사를 당하거나 모함을 당할 때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려면 용기도 있어야 하지만 진실성도 있어야 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고 지혜자는 말하였다.
둘째, 참된 것을 말하라(엡4:25).
우리 사회에는 거짓말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불신 사회의 불신 풍조 속에서 살아간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살아간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4:25)고 바울은 주장하였다.
셋째,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라(엡4:29).
제직은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의미 있는 일을 하여야 한다. 이웃의 마음을 괴롭히는 말을 하거나 오해될 말을 삼가야 한다. 덕은 외롭지 않다고 한다. 들어서 흐뭇하고 기분이 상쾌한 말을 하는 제직이 되어야 한다.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넷째, 형제를 위로하는 말을 하라(살전4:18).
제직은 독한 말로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고 넘어져 가는 자를 위로와 격려의 말로 붙들어 주어야 한다. 마음이 상한 자나 고난을 당한 자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지옥으로 달려가는 형제에게 위로가 될 말을 하는 제직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과 죽은 자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고 하였다.
다섯째,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하라(살전5:13).
비평이나 책망은 형제에 낙심시키고 일을 그르치기 쉽다. 형제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먼저 잘한 것을 칭찬하여 선한 일을 의욕을 일으켜 주는 아량이 필요하다.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많은 사람은 형제가 칭찬을 듣고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앞서가는 사람을 발맞추어 칭찬과 격려로 힘을 돋구워 준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는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5:13).
제직과 금전 관계
제직이 금전 관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때가 많다. 특히 제직들 사이에 금전 거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갈등과 시비가 일어나 분쟁의 불씨가 되는 일이 있다.
물질의 시험은 제직들을 넘어뜨리고 교회의 성장을 둔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아무리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므로 물질의 시험을 당하면 영혼까지 비뚤어지고 교회 봉사도 그 중심을 잃어 버려 넘어진다. 아간 한사람의 물질에 대한 불투명한 행위 때문에 이스라엘 전 군대가 실패한 사실이 나, 게하시의 탐욕 때문에 받은 벌이나, 아나니아 부부의 욕심으로 받은 징계를 생각하면 금전 관계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임을 알 수 있다.
재물에 대한 바른 태도
재물이나 물질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이원론적 사고로 영적인 높은 세계와 물질적인 낮은 세계가 있어서 물질의 악하고 신령한 것은 선하다는 영지주의(Gnosticism)가 있고, 둘째, 유물주의는 물질과 마음 존재와 사고의 관계에 있어서 물질 및 존재를 마음 및 사고보다 중요시하는 사상으로 물질을 생의 중심으로 삼아 재물을 제일로 아는 생각이 있다. 재물을 무슨 죄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재물 자체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쓰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물질생활과 신앙생활은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물질생활도 신앙생활의 일부임을 확신하고 경건하게 맡아서 바르게 사용하여야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딤전6:10) "돈을 위하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 주께서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겠고 버리지도 않겠다."(히13:5) 고 하셨으니, 돈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금전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기 못한다."(마6:24) "남의 빚의 보증이 되지 말라"(잠22:26) 하였으니 의무와 책임을 바르게 할 때 재물은 필요한 것이다. 남을 돕기 위하여, 서로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유를 즐기기 위하여 금전은 필요하다.
금전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으로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땅에 묻어 두지 말고 증식시켜야 한다(마25:27). 부자처럼 낭비해도 안된다 (눅16:19). 그러므로 금전에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돈은 옳게 벌어야 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르게 된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한다."(출23:5) 고 하였다.
둘째, 돈을 바르게 쓰라.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하지만 쓰는 것은 더 중요하다.
예수는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마6:20) 하였으니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 재물을 바르게 쓰는 방법이다. 그러면 재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는 일이요 (말3:9-12) 둘째, 연보하는 것이요 (잠3:9-10), 셋째, 구제하는 것이다 (잠19:17).
금전은 주고받는 일이 분명해야 한다.
재물에 대해 분명한 사람이 대방부란 말이 있다. 그러기에 금전 거래를 해보아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금전 거래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인간 우정도 무너지고 신앙생활도 잘못된다.
첫째, 주는 일이 분명해야 한다. 돈 거래에는 즐거운 때도 있지만 마음 상하는 때가 많다. 처지에 따라 다르지만 돈을 꾸어 줄 때는 기한 내에 가져올 것을 기대하지 말고 주어야 하고, 상대방이 갚지 못하면 거저 주겠다는 생각으로 주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빌어 돈은 기한 내에 반드시 갚아야 하며, 갚지 못할 경우라면 미리 채권자에 게 양해를 구하여야 한다. 금전 거래는 신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용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37:21) 하였고 "만일 갚은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잠22:27) 는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
둘째, 받는 일도 분명하여야 한다. 받을 것을 등한히 하는 것도 상대방에게 유익한 것이 못된다. 받을 것은 받고 도와 줄 일이 있으면 그 후에 도와주어 금전 거래는 분명히 하여야 한다. 받을 것을 분명히 않는 사람은 줄 것에도 분명히 않는 사람은 줄 것에도 분명치 못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보증을 서는 일에 대한 교훈이 많다.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된다"(잠17:18).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다"(잠11:15).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기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잠22:26-27)고 하였다. 이러한 교훈은 보증을 서 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보증을 섰을 때는 갚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직은 돈 거래가 분명하여야 자신과 교회 생활에 은혜가 될 것이다
결론
1. 제직은 올바른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
2. 제직은 성수주일을 하여야 한다.
3. 제직은 헌금생활에 성공하여야 한다.
4. 제직은 기도 성경읽기 전도 가정 사회생활에 모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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