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과 제자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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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정 길 목 사
(남서울교회)
서 론
제자양육의 실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우리 주님의 사역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3년 동안 이 땅에서 행하셨던 일은 어떤 문화나 거대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제자 열두 명을 키우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 수많은 군중을 피하셔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 열두 명의 제자와 가까이 교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3년 동안 가장 정성을 쏟았던 것은 제자훈련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 불량품(유다를 지칭)이 있었던 것도 우리는 잘 압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제자삼는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완전하게 세울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 론
제자훈련의 본이 되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열 한 명의 제자를 앞에 놓고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겨우 열 한 명의 제자를 향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그 열한 명의 자질은 어떠했습니까. 북쪽 나사렛 동네에 사는 가난한 어부들이 아니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배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자 모두 자기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간 비겁자들이었습니다. 그런 형편없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러한 말을 했더라면 아마도 사상 최대의 코메디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장하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이 세계가 주님의 제자들로 꽉 차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했지만 당시의 제자들을 이 훈련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이후에 나가서 말씀을 증거할 때 3천명이 돌아오고, 5천명이 돌아오고, 허다한 무리가 주님 앞에 돌아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복음을 증거하여 주님께서 인도하는 일이 사도들에 의해서 계속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에베소에는 도무지 말씀을 증거할 수 없도록 핍박이 심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바울은 결국 당시의 관례에 따라 ‘두란노’라는 서원을 빌어서 거기서 제자를 키우게 된 것입니다. 2년 동안 사도 바울이 두란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매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부흥회 스타일로 여러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을 뽑아다가 두란노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쳤는데 오히려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더라는 얘기입니다.
이후로 사도 바울은 제자를 키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8~12명이 바울의 주변에 늘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옥 속에서도 제자들이 바울의 곁에 있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제자를 키우는 일에 자기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 바울과 제자들에 의해서 신약의 3분의 2가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먼저 목회자가 강해져야 한다.
디모데후서 2:1~2를 보면 바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의 모든 신알을 정리함과 더불어 목회의 방법을 정리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디오데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네가 강해져야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강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은혜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내 결심과 의지는 한없이 약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속에 충만하게 채워 질 때에 우리는 한없이 강해 질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승리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에 앞서서 가장 강조해야 될 것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 지식 속에 갇힌 사람인가 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제자훈련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말하기 전에 네가 은혜 안에서 강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말하기를 충성된 사람에게 복음을 부탁하라.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어떻게 제자삼는 사역이 전체 교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교회는 제자 삼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챠지는 말하기를 “앞으로는 세계교회가 자유주의냐 보수주의냐 하는 말보다는 제자운동을 하는 교회냐 안하는 교회냐로 나누어 질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회들도 현재 그리스도의 삶을 강조하는 교회와 그렇지 못하는 교회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전자는 계속해서 번창해 나가고 있고, 후자는 쇠퇴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제자훈련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필자가 제일 먼저 제자운동을 교회에서 시작했는데 맨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 주변의 많은 목회자들이 말하기를 “당신이 학생단체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데 교인들 가르쳐 봐야 목사만 손해 본다”하는 식의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조금 안다고 하는 교인치고 목사에게 순종하는 사람 보았느냐”는 얘기도 많이 했었습니다.
사실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에 예배드릴 장소도 없어서 개인집에서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흥 목사 그 좋은 아파트단지에서 교회 건물도 없이, 예배도 아닌 성경공부 스타일로 모인다면 교회가 될 법한 일이냐”고 충고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시위대가 뒤집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위대를 뒤집은 복음이 내가 전하는 복음이라면 감옥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이 가진 복음을 내가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하는 점이지 환경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물론 목회에 성공하려면 환경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환경이 가장 나쁜 곳에서도 여러 차례 목회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재개발구역으로 묶여서 완전히 없어진 산동네에서도 그곳 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목회를 해 본 사람입니다. 그곳은 교회가 안 된다고 말들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뒤집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에게 주신 복음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내 개인적인 체험을 좀더 언급하겠습니다. 나의 부친은 장로님이셨기 때문에 나는 자연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아마 나처럼 교리적일 수는 있지만 고백적이지 못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약화되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마주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신앙이 참으로 교리적인 동시에 참으로 고백적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교리적으로만 예수를 알고 지내다가 1965년 7월 24일에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초청했습니다. 그 분은 그 순간부터 내 구세주였고, 내 인생의 왕이 되셨습니다.
나는 그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몇 사람을 전도했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붙잡아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사람 중에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김지철 교수(장신대학), 이동원 목사(워싱턴 제일침례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바뀌는 것을 보고 기뻐했더니 교인들이 말하기를, “그 열심은 쉽게 사그라진다. 조금 지나면 우리처럼 될 테니까 너무 좋아하지 말라.”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아니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나와 똑같이 변화되던데요”하니까 “그거야 어린 학생들이니까 삶이 없어서 원리만 맞으면 ‘아멘’ ‘할렐루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처럼 구조적인 악 속에 살다보면 어떻게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겠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러한 말에 계속 도전을 받으면서도 줄기차게 일반 교인들에게도 성경공부와 제자 교육을 시켜 왔습니다. 대학생들은 그 분들의 말처럼 쉽게 변화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C.C.C에 만 10년 있는 동안에 무수한 대학생들을 만나서 전했고 그들이 말씀 앞에 순종하기 시작하면서 생애 전체가 바뀌는 것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평신도들도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평신도를 대상으로 실시해서 어떤 결론을 얻었다는 소리를 못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평신도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은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 교회에서 봉사 해 본 경험 없이 그저 대학생 선교만 하다가 목회전선에 들어섰으니 아는 것이라고는 대학생들에게 제자교육을 시키던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제자교육이 일반 평신도들이라고 안되겠느냐는 확신 속에서 첫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포아파트(홍목사의 목회지)에서도 C.C.C에서와 똑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제자 교육이 되더라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반포아파트 내에 ‘보살회’가 있는데, 이 불교 모임에서 기독교의 입문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섯 강좌를 가르쳤더니 보살회 회원 중 3분의 2가 우리교회에 출석하게 돼 버렸고, 반포 보살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신학은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이 말은 신학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신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신학 자체가 영혼의 양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제자훈련은 구원의 확신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제자훈련을 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정말로 거듭난 사람인가부터 타진해 보아야 합니다. 싹트지 않는 씨앗에는 아무리 좋은 거름을 주어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일단 싹이 나 있어야 물을 주고 거름을 줄 때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대상자의 거듭남에 대한 여부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듭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자는 ‘이미 거듭났으면 됐지 확신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비록 거듭났다 하더라도 확신이 없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감정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확신이 없으면 감격도 기쁨도 없고, 그에 수반되는 전도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생을 사는 것이 본인들에게 확인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영양소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식물이 싹이 났으면 그에 필요한 햇빛과 수분과 거름을 공급해 주어야 자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에게도 다섯 가지의 영양소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0:17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믿음이 안 생깁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썩어질 것으로 거듭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믿는다 믿는다 하는데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없이는 인격이 성숙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목사라 할지라도 성경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의 신앙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곧 나를 향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내 영혼의 능력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내가 스스로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제자훈련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각 사람이 스스로 목사의 도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키워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의 도움이 필요없게 되지 않느냐” 옳은 말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목회는 목사의 도움이 필요없는 목회가 아니겠습니까.
교인과 목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각 사람마다 끝없는 상황들에 부딪히며 살아갑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어떻게 목사가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다 해결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교인들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서 그 때마다 대처해 나가는 것이 훨씬 이상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들이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서 자양분을 흡수하고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준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성경본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가 하는 점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80%는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캄벨 몰간(Campbell Morgan)은 설교준비를 위해서 본문을 80번씩 읽으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존 스타트 목사도 설교준비를 위해서는 성경본문을 많이 읽으라고 강조했습니다.
만약에 우리 목회자들이 설교할 본문만이라도 일주일 동안 계속 묵상하면서 그것을 내 영혼의 양식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능력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딪혀 오는 아무런 깨우침도 없이 그냥 남의 글을 따다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쏟아 놓는 설교라면 무슨 역사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