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 복종하라

- 에베소서 5:21 -

샬롬선교회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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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에베소서 5:15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라는 권면으로 '세월을 아낄 것', '성령 충만할 것', '서로 복종할 것(=서로 섬길 것)'입니다.

 

1. “피차 복종하라...

 

+ 본문 후반부의 "피차 복종하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 다소 고압적인 표현이 아닐까? “복종하라"라는 말은 상하관계를 명확히 하는, 어떤 의미에서 엄격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피차(=서로)"라는 단어가 붙음으로써 그 엄격한 상하관계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 이어지는 에베소서 5:22 이후부터는 '복종하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등장합니다.

5:22 아내들아. 너희는 주께 복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복종하라. 6:5 노예들아. 너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같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땅의 주인에게 복종하라.

아내가 남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종이 주인에게 취해야 할 태도는 모두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남편이 아내에게 취해야 할 태도는 사랑하는 일, 부모가 자녀에게 취해야 할 태도는 양육하는 일, 주인이 종에게 취하여야 할 태도는 공갈을 그치는 일이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복종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서로'?

a. 교회 안의 하나님의 가족... 신도, 목사, 교회 직원이라는 직분을 가진 자, 그렇지 않은 자를 모두 포함합니다.

b.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사회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 '복종하라'는 본래 엄격한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단어가, 놀랍게도 '서로 섬기다', '서로 양보하다', '상대를 세우다'라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것 하나 완벽한 번역은 없습니다. 여러 성경을 함께 읽음으로써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순종하라'로 번역된 새번역 성경만 읽으면 윗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해 아랫사람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집니다. 사실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씀이 '서로 섬기라', '서로 양보하라', '상대를 세우라'로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 목사에게 복종하라는 해석은 불가능해집니다.

 

+ 여기에 세상의 상식과는 다른 주종관계, '서로 복종하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새로운 관계 - 서로 섬기고, 서로 양보하고, 상대를 세우는 관계 - 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관점에서 명령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사회에서는 '섬김'이라는 삶의 방식이 반드시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이득을 보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편한 것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로 삼는 삶은 오늘날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섬김'이라는 삶은 오늘날 교회에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라이프 스타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과 행실을 본받아야 합니다.

 

+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보면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혼인잔치에서) 돌아온 주인에게 눈을 뜨고 있는 종들은 복이 있도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그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서서 음식을 대접할 것이다.” (누가복음 12:37)

혼인잔치에서 갑자기 돌아온 주인을 반갑게 맞이한 종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가와서 섬겨주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종관계가 역전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스스로 종의 종이 되어 종을 섬기고, 종에게 자신을 다 바치는 입장의 대반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대접받는 자(대접하는 자)가 대접하는 자(대접하는 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은 그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어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위대함의 기준은 '섬기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 누가복음에서는 주인이 종을 위해 '식탁을 차려주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흥미롭게도 '발을 씻겨주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2-17)

누가복음은 '식탁에서 섬기는 자처럼'이라는 말로 섬김의 본을 보였지만, 요한복음은 '발을 씻기는 종처럼'이라는 행위으로 섬김의 본을 보였습니다. '사람의 발을 씻기는' 행위는 당시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그 노예가 하는 일을 자신이 직접 함으로써 '섬김'이 무엇인지 가르치려 했던 것입니다.

'식탁에서 섬기는 자 같이', '발을 씻기는 종 같이'는 종의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자(예수 자신)가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 자기 목숨을 주기 위함이다. (마가복음 10:43, 45)

 

+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그야말로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인간의 일생은 누구든 결국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그리고 그것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서로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모범이고, 바울이 '서로를 따르라'고 한 메시지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섬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욥바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 - 다비다 [사도행전 9:36~42].

사도행전 9:36욥바에 다비다(그리스어로 번역하면 도르가)라는 제자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비다만 해도 되는데 굳이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도르가'라고 표기한 것에는 숨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드르가''가모시가'라는 뜻이고, 성경에서 '가모시가'라고 하면 소나 염소처럼 신에게 받아들여지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반추', '발굽이 갈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몸매는 날씬하고 그 눈빛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 도르가의 성품은 '가모시가'에 걸맞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제물로 바치고, 사람을 위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 도르가가 죽었다고 하니 이 도르가의 은혜를 입은 많은 과부들이 슬퍼했고, 베드로가 루다에 왔다는 소식에 욥바의 제자들이 그를 부르러 간 것입니다. 그 결과 도르가는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르가는 예수님의 '섬김'이라는 삶의 방식을 그 나름대로 보여준 성품이었습니다. 그가 행한 '섬김'은 무상의 봉사였습니다.

이 도르가처럼 '섬기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은 아닌지, '섬기는 기쁨'의 정신이 교회에서, 혹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길러진다면, 그 정신은 자연히 사회에도 반영될 것이라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학교, 의료, 복지 사역은 모두 교회(수도원)에서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사역으로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자원봉사 정신의 뿌리는 원래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 '서로를 섬기라'는 말씀은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기쁨으로 사람을 섬기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양한 영역-의료 관계, 행정 관계, 복지 관계, 교육 관계, 치안 관계, 서비스 관계 등-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각각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파송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인재가 자라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고,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섬기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의 위대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섬기는 기쁨' -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그런 삶을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https://meigata-bokushin.secret.jp/swfu/d/auto_Y7MFTL.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