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아는 그리스도의 사랑

- 에베소서 3:14~21 -

샬롬선교회 


* 에베소서에는 두 가지 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1장에 있는 것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신 구원의 위대하고 장대한 계획을 기록한 후, 에베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3장에서는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얼마나 큰지, 인간의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즉 공동체로서 그 사랑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기도에 대해 배우고,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모든 父權(가족)의 근원이신 하나님

 

* 먼저 에베소서 3:14~15을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3:14~15]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 '이러므로(이런 까닭에)'라는 것은 그 전에 바울이 앞으로 기도하려는 기도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 여기서는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여준 그리스도의 '비밀(깊은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비밀'이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동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이방인'이라고 경멸했기 때문에 이방인과 '함께'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시편 133편에도 '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함께 사는 것이 어찌 그리도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도 즐거운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축복이 널리 퍼져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 주님께서 명령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아마도 여기에 나오는 '형제들'을 자기 동족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바울은 보여주신 것입니다.

 

(1) 바울을 변화시킨 다메섹 경험

 

*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서로''함께'라는 단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공동체용어입니다. 물론 그 '서로''함께'라는 범주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은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기록된 바울의 회심 기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그를 부르십니다(9:4, 22:7, 26:14). 이 호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교회를 동일시하시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바울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던 바울을 위한 계획은 다메섹에서 선포됩니다. 주님은 다메섹의 제자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던 바울에게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형제 사울아. 너는 볼 수 있게 되라."라고 말하며 바울의 머리에 안수하여 주었습니다. 사울은 이 말씀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주님의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주심으로써 그는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한 성도의 사랑의 교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교사로 소개하여 그 사역을 이끌었습니다.

 

* 성경만으로는 사람을 강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의 손길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의 주님 안에 있는 따뜻한 교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기에 존중해야 합니다. 특히 새신자, 초신자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주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따뜻한 손길이 꼭 필요합니다. 열은 빛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성장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진리의 빛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의 또 다른 면인 열은 구체적으로 형제들 안에서 공급되어야 합니다. 교제, 즉 바울이 말하는 '모든 간접'이라는 접점의 각 지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랑의 교제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함께', '서로'를 비롯한 교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도들끼리 굳게 묶어주고, 각 지역 교회들, 그리고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를 굳게 묶어주는 것, 바로 거기에 바울의 중보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2) 모든 권능의 원천이신 성령님

 

*에베소서 3: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장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었는데, 여기서는 14~15절에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 아주 긴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그리스어로 'πατήρ'(파테르)입니다.

'가족'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는 'πατριά'(파트리아), '파테르''파트리아'라는 두 단어는 본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 가족은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본래 분명한 권리에 의해 존재하는 가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가족(가정)이란 권리가 있는 가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몇 년 전에 출판된 책 제목에 '권리의 상실'이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현대는 '권리(權利)가 상실되고 있다'는 것인데, '권리(權利)'란 무엇일까? 그것은 '斐性(기력과 재치가 넘치고 의지가 되는 성질)이 있다는 뜻입니다. '斐性', 의지할 수 있는 것, 어떤 일을 명확하게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책임감과 그것을 짊어질 수 있는 힘... 등입니다. 대들보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부부싸움의 요인이 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말로는 '누구 덕분에 밥을 먹을 수 있냐'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맞벌이 부부 사이에서는 절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일 것입니다. 전업주부 가정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전업주부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밥을 짓는 저 덕분일 거예요." '라고 말꼬리를 잡는 말의 주고받음으로 싸움으로 발전하는 것이지요. 참고로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말 중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의 첫머리는 '효도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의욕이 없다'는 뜻은 의욕이 없다. 무능하다. 위급할 때 의지할 수 없다.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수입이 적다는 의미도 큽니다. '의리 없다'는 말은 왠지 남성에게만 쓰이는 말입니다. 그만큼 남자에게는 '斐性'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斐性'이라는 말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책임을 다하려는 기력'을 뜻합니다.

 

* 新改訳성경에서 '가족'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트리아'는 권위를 강조하는 가족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권위를 가진 존재가 있습니다. , 가치 있는 존재,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악의 세계에도 사탄을 리더로 하는 악령들의 조직적인 계급이 있습니다.

우리의 국가, 직장, 학교, 그리고 가정, 가족에도 권세를 가진 존재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없으면 자녀가 그 가정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가족이 있습니다. 친자녀 가정, 사별 가정, 재혼 가정, 한 가족, 공동체, 조직, 모든 것에 권한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책임을 수반하는 자이며, 결단과 배려가 요구된다. 오늘날 가정이 붕괴되고 있는 현실의 배경에는 권위를 가져야 할 사람이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평생을 열심히 일하느라 바쁘고, 자녀의 교육은 부모에게 맡기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그냥 쉬기만 합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힘은 다 소진된 채로 돌아오기 때문에 아내도 아이들도 어느새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은 대형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되는 슬픈 현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누구 덕분에 밥을 먹을 수 있느냐!"라고 강하게 말해도,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그저 돈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권리의 상실 시대'라는 말을 들어도 이런 사회를 누가 만들었냐고 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러한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바울이 한 말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을 '하늘과 땅에서 가족()이라 불리는 모든 것의 이름의 근원인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는 완벽한 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입니다. 이 분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분이 아닐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분, 책임질 수 있는 힘이 있는 분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이 땅에서 권능을 부여받은 모든 사람은 그 창시자인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영원한 권세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기도는 비밀(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바울의 기도이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꿈을 꾸면서, 그 넘치도록 넘쳐나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엿보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는 너무도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2. 바울이 드린 기도

 

* 모든 권능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에 주목해 보겠습니다.16절 이하를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에베소서 3:16-21]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 이렇게 보면 다섯 가지 소원(간구)이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용적으로는 네 가지 사항입니다. 게다가 각각이 따로따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쌓여가는, 즉 점차 클라이맥스로 올라가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거하신다는 기도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인간의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위함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충만한 풍성함으로 충만해지기 위함이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너희 안에 있는 사람'의 해석

 

* 이제 바울이 기도한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16절의 "너희 속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너희는'은 복수형인데, '내 속사람'은 정관사가 붙은 단수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내 속사람'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는 여기 말고 두 군데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7:22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되"

고린도후서 4:16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느니라'

 

* 고린도후서에서 생각해보면, 속사람은 겉사람에 비해 내면적인 사람, 마음이나 영혼과 같은 영적인 면의 부분으로 해석됩니다. 로마서에서 생각해보면, 속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난 사람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 헬라어 원문에는 '너희 속사람을 강하게 하소서'가 아니라 '너희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하소서'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 아니라 '~('ες 에이스')입니다. , 너희 안에 거하시는 내면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강건하게 해달라는 의미의 기도인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분(단수)'은 우리가 강건해져 가는 목표입니다. 에베소서의 다른 구절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너희 속사람을 강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기도는 너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서 점점 더 강해지시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17절 전반부의 기도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16절의 말을 바꾼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도 바울은 동의적 병렬법을 사용하는 달인임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 17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라는 기도는 우리가 내면의 한 사람, 즉 그리스도로 강화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어를 바꾼 것뿐입니다. 주어를 바꾸어 같은 내용을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신다는 것은?

 

* '계신다'는 것은 들락날락,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고 정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속에 정착하는 것,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아니라 왕좌에 앉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속사람, 즉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힘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한 바울은 말을 바꾸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마치 임시 거주자처럼, 임차인처럼, 임시 거주자가 아닌 진정한 거주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이 기도의 의미입니다.

 

*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정착하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지배적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것.

b.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작은 자에 대한 존중과 사랑..."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 내 형제들, 그것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둔 행보를 하는 것입니다.

 

(3) 모든 성도와 함께 아는 것의 중요성

 

* 마지막 포인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성도들과 함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만으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나니아로부터 '형제 사울아'라는 부름을 받은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늘의 빛'만으로는 바울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바울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는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함과 동시에 주 안에서 한 형제로서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교인이 어떻게 관계가 희박한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안에 있는 교회 형제자매들 사이에, 주님의 제자들 안에 사랑이 불타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이 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사랑의 교제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온통 교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성도들끼리,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합시키는 것, 그리고 지역 교회를 굳건히 연합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바울의 중보기도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 교회는 사랑을 키우는 훈련장입니다. 여기서 주님께 속한 자들은 변화되어 갑니다. 때론 힘든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지성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와 함께 아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끼리 사랑의 교제를 쌓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넓게... 포용력을 나타내는 사랑, 어떤 사람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의 사랑.

길이에 있어서... 인내를 나타내는 사랑, 모든 것을 참고, 믿고, 기대하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높음에 있어서... 상식을 초월한 (비정상적인) 하나님의 사랑,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높은 사랑

깊음에 있어서... 구원받기 어려운 죄인들을 구원하는 심오한 사랑

 

* 모든 권능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위와 같은 사랑을 그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의 기도에 이끌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3:20~21Living Bible에서 읽어봅니다.

[에베소서 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https://meigata-bokushin.secret.jp/swfu/d/auto_bzjTCg.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