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에 의한 평안

- 에베소서 2:14~17 -

샬롬선교회 


[에베소서 2:14~17]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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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중 둘로 '하나를 만들다', 담을 '허물다'는 아오리스트의 분사형이다.

15절의 율법을 '폐하다'도 아오리스트의 분사형이다.

16절의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다'도 아오리스트의 분사형이다.

17절의 평안을 '전하다'도 아오리스트이다.

이상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우리는 항상 주목하면서 거기에 계속 서 있어야 합니다.

 

1. 평화의 왕(שר שלום)이신 그리스도

 

그런데 이 '평화(שלום)의 왕'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שר שלום)이라 할 것임이라.”

 

(1) '평화의 왕(שר שלום)'은 전 성경에서 단 한 번(이사야서 9)만 쓰인 단어이지만,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Prince of peace라고 합니다.

 

(2) Prince(프린스)는 왕자, 황태자를 뜻하는 말로 왕의 아들로서 지위에 있는 존재입니다. 또는 어떤 세계에서 장차 일인자가 될 수 있는 촉망받는 젊은 남자아이를 가리킨다.

 

'평화의 왕(שר שלום)'이 아기로 세상에 보내졌을 때 하늘의 천사들은 다음과 같이 찬양했습니다. '천군찬가'라고 불리는 찬양입니다.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당시 사회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 즉 들판에서 노숙하던 양치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구 등록도 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 속에서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천군찬가가 들려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 없는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람이 화해함으로써 가져오는 공동체적,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 한 인물로 사도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도 바울만큼 '평화'(שר ש 샬롬)가 하나님의 구원임을 강조한 인물은 없습니다. 그의 편지에는 이 '평화'의 개념이 담긴 사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에베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평화(평안)'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평화'라는 단어가 4번이나 나옵니다.

그 반의어인 '적대감'3, '담장'1.

그 동의어인 '화해'1.

그 동의어인 '새로운 한 사람'1, '한 몸'1.

이것만 봐도 바울이 얼마나 '평화'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평화'에 대해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2. 평화를 방해하는 분열의 뿌리인 편견과 적대감

 

(1) '칸막이의 벽'의 구조

편견은 자신이 가진 것을 과장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경시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을 ''로 여겼습니다. , 아무것도 뛰어난 것이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편견은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분열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칸막이'가 되기도 합니다. 편견은 무지를 콘크리트로 굳힌 것과 같아서 제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2) 편견에 기반한 '적대감' 감정

적대감이란 무엇일까? 적대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호의'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은 의외로 민감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직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적대감은 두려움, 경계심, 분노, 증오, 원한, 수치심, 복수심 등과 같은 감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뿌리 깊은 감정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적대감을 갖게 되는지 조금 살펴볼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을 때, 자신이 상처를 받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이 상처받고 빼앗기려고 할 때, 혹은 그러한 위험을 느낄 때 상대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됩니다. '적개심'은 철저하게 적을 제거하려는 감정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자신을 지키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개심은 '지극히 자기 방어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개심은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에게 방어하기 위한 본능적인 감정이기도 합니다.

 

적대감을 가질 때 사람은 몸을 굳게 하고 방어 태세를 취합니다. 공격에 대비하고 즉각적인 반격에 나설 수 있도록 대처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을 건설한 최초의 인간들이 매우 강렬한 적개심, 즉 자기방어 본능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노래가 바로 레멕(노아의 아버지)의 노래입니다.

 

적대감으로 인해 증오가 증오를 낳는 연쇄가 인류의 역사 속에 쌓여왔습니다. 힘에 대한 힘으로 끝없는 복수를 반복하는 현실의 인간의 어리석음, 비참함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도 이 '적대감'이 존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결과, 바빌론 포로라는 망국의 슬픔을 겪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해방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온 후에도 이방인의 지배는 4백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점차 자신들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성전 안에 '이방인의 뜰'- 성전 가장 바깥쪽에 있는 -을 만들어 더 이상 이방인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만약 '유대인의 뜰'에 들어가면 죽여 버리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 역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이방인의 지배에 의해 착취당해 온 역사 속에서 길러진 자기 방어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의 상징 중 하나입니다.

 

본문에서는 '적대감이란 여러 가지 규정으로 이루어진 계명의 율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은 예배의 구체적인 방법과 하나님의 백성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길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 율법의 어디에 적대감이 들어갔을까? 그것은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자신들이 다른 존재,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기 위해 다른 민족은 개(경멸적인 용어)이며, 전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라고 불린 이방인들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을 증오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박해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칸막이'로 삼음으로써 자신들이 우월한 민족이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명은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기 위해 주신 계명이 유대인의 자기방어적 감정에 의해 이방인들과 자신들 사이의 '칸막이 벽'이 되어 적대감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적대감을 폐기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떻게 폐기하셨을까? 그것은 계명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의 여러 가지 방법을 규정한 계명을 폐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으로 계명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장벽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 벽이 무너지면서 적대감이 끼어들 틈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선언이 성립됩니다. 자기방어 본능이 하나님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 한 적대감은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지식과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세기입니다. 동시에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는 살육의 세기이기도 합니다. 국가와 국가는 다양한 이권을 놓고 싸웠고, 많은 사람들이 그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 본능이 있는 한 적대감을 낳고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자신을 스스로 지키려고 할 때 적대감이 생깁니다. 거기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가족 안에 존재하는 적대감, 부부나 형제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 학교나 직장 안에 존재하는 적대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 그리고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적대감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3) 그리스도야말로 평화를 창조하시는 분이다.

둘을 하나로 합하여... 새로운 한 사람으로 지으시고 평화를 이루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계명을 폐기하고, 더 이상 여러 규정으로 이루어진 계명의 율법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모두 다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구분 없이, 자유인이나 노예 구분 없이, 부자나 가난한 자 구분 없이, 학력 구분 없이, 출생의 구분 없이, 가문의 구분 없이, 남자나 여자, 어른이나 아이 모두 구분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당신은 믿으십니까?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시는 분임을 확신하고, 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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