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둠이 지배하는 때

- 누가복음 22:47~53 -

샬롬선교회

 

* 이제부터 본격적인 '어둠이 다스릴 때'가 시작된다. , 지금까지 예수님의 입에서 반복적으로 예고된 '수난의 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난 이후, 그것을 뚫고 나오는 곳에 예수님의 영광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을 받고, 그 후에 그의 영광에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고난, 나중에는 영광'은 하나님의 구속(구원) 계획의 핵심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출애굽에서도 이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

 

* 예수님의 수난은 공관복음서에서도 요한복음에서도 중요한 구절로 다루고 있다. 이제부터는 복음서의 공관표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저렴한 성경을 오려 붙이고 직접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 왜 유다는 예수님과 입을 맞추려고 했을까?

 

*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가 앞장서서 군중을 이끌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왔다. 유대인에게 중요한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벽을 벗어나 예수님이 계셔야 할 곳으로 온 것이다. 게다가 강도를 잡으러 가는 것처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군중'은 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성전을 지키는 수호자들(요한복음에서는 '군인들'이라고 되어 있다)도 있었던 것 같다.

 

* 누가복음 22:47"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유다는 배신한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내가 입을 맞추는 것이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을 잡으라"(마태복음 26:48)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밤이 어두웠기 때문에 누가 예수님인지 분명하게 가리키기 위함이었다.

 

2.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자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

 

* 예수님께 손을 대어 잡으려는 자에게 어떤 사람이 칼을 뽑아 그 사람(대제사장의 종 마르코)의 귀를 자르려고 했다. 그 행위에 대해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누가복음 22:51), 마태복음 26:52에서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엄히 꾸짖으셨다. 요한복음은 칼을 뽑은 사람이 시몬 베드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한복음 18:10).

 

* 예수님의 꾸짖음의 의도는 단순히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는 격언적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포로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필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그 필연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마태복음] "선지자의 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26:56)

[마가복음]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14:49)

[누가복음]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22:53)

[요한복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18:11)

 

3. 수난에 대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관점 차이

 

* 누가복음은 22:53에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수난을 의미하는 말씀인데, '수난'에 대해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관점과 요한복음서의 관점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1)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수동태

 

* 먼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수난을 어떻게 예고하셨는지 살펴보자.

 

+ [마태복음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마태복음 17:22-23]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 [마태복음 20:18-19]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 [마가복음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 [마가복음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 [누가복음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 [누가복음 18:31-33]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 공관복음서의 수난 예고 공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져 많은 고난을 받고(조롱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채찍에 맞으며),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수난으로서의 죽음은 모두 수동태(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2) 요한복음의 십자가 죽음은 능동태로 표현된다.

 

*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 수동적이 아닌 자발적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 때도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두세 마디만 말씀하셨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대제사장에게도, 총독 빌라도에게도 정말 많은 말씀을 하신다. 단호하고 적극적인 예수의 태도가 특징적이다.

 

* 공관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수난 예고는 요한복음에는 없다. 예수의 죽음은 복음서 전체에 깔려 있다. 예를 들어, 1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고, 3장에서는 율법 교사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민수기 21:9)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한복음 3:14)고 말한다. 누가 인자를 들어 올리느냐 하면 하나님(아버지)께서 들어 올리신다. 그 증거로 다음 구절인 요한복음 3:16의 말씀에서 아버지가 인자(, 하나님의 독생자)'주셨다'고 바꾸어 말씀하고 있다. , '들어 올리셨다'는 말이나 '주셨다'는 말 모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믿는 자마다 인자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5)고 설명한다.

 

* 이처럼 요한복음의 경우 예수의 죽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능동적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 [요한복음 10:14-18]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악령에 사로잡혀 미쳤다고 말하게 만들었다.

+ [요한복음 12:23]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한복음의 경우, 예수의 죽음을 영광의 때로 보고 있다.

+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요한복음 13:27, 30]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내가 가는 곳'(요한복음 13:33, 36), '나는 떠난다'(요한복음 14:28, 16:7)는 표현도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13)라는 말씀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우정의 사랑의 일'로 말씀하신 것이다.

 

* "때가 이르렀다." (요한복음 17:1)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나타낼 때가 왔다는 뜻으로,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사랑을 보여주는 십자가의 죽음의 때가 왔다는 의미이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장로, 대제사장, 율법학자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할 것'으로 그려졌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시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의 수동성과 능동성, 이것이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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