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좇으니

- 누가복음 18:18~43 -

샬롬선교회 


[누가복음 18:31~43]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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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주제는 '예수를 좇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좇다(따르다)' follow로 번역되는 동사다. 원어는 '아콜루-세오-' ἀκολουθέω'따라가다, 따르다, 동행하다, ~의 동료이다'라는 뜻이다. 사실 이 '동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1.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관원

 

+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어떤 관원'에게 예수님은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22)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그 관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포기했다. 영원한 생명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관원에게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셨던 것이다.

그는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초청(문법적으로는 명령형)에 대해 매우 슬퍼하면서도 순종할 수 없었다. '재물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2.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제자들

 

이 대화를 지켜보던 제자들, 특히 제자 중 가장 먼저 제자가 된 베드로는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18:28)"라고 말한다. 참으로 그렇다. 베드로는 여기서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좇았나이다"는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분명하게 의식적으로 자신의 직업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왔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5:11,27,28/7:9/9:11,23,57,61 참조). 제자들뿐만 아니라 군중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좇아왔고, 또 좇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 31~34절에 보면,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수모를 당하고 채찍에 맞으며 채찍에 맞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도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한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상에 마음이 사로잡혀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아의 예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많은 희생을 치르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여도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에게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는 자부심은 상당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따라야 할 대상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고 눈이 멀었던 것이다. 옆에서 보면 매우 용감해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매우 우스꽝스럽고 엉뚱한 순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눈을 뜨고 예수님을 좇아간 사람

 

본문, 18:35 이후의 이야기에서 한 맹인이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고 큰 소리로 외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그를 조용히 시키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언뜻 보면 별 것 아닌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누가복음 기자는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 삽입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 필연성이 있을 것이다.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면 맹인의 눈이 열린다는 것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다.

 

[이사야 35:1-6]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며, 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이 예언에 따르면, 눈먼 자의 눈이 열릴 때 그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의 표징이었다. 동시에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앉은뱅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가 풀려 기쁨으로 노래하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윗의 자손, 즉 왕으로서의 권위를 가진 메시아의 표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은 바로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적이었다.

 

그런데 누가가 이 이야기를 이 맥락 속에 넣은 것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달리 한 맹인이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간절한 기도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며 그 믿음을 칭찬하셨는데, 그 믿음은 보게 되는 것(깨닫게 되는 것)을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분(메시아)이라는 믿음이다.

 

눈을 뜬 맹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을 좇아갔다('아코루-세오-' ἀκολουθέω의 미완료형)'는 것을 누가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어떤 관리처럼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우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또한 제자들처럼 단순히 큰 희생을 치렀다는 의욕에 의한 순종도 결국은 허울 좋은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이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가 버린다. 하지만 여기 맹인의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좇아가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가 깨어져야 한다. 위로부터의 힘으로 영적인 눈이 열려야 비로소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진정한 순종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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