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예수님 (3)

- 요한복음 19:28-30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9:28-30]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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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7:35-44, 마가복음 15:24-32, 누가복음 23:33-43, 요한복음 19:18-30

 

십자가의 예수님(3)에서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말씀을 묵상한다. 이 세 말씀은 그다지 긴 시간 간격을 두지 않고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1. "나는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육체적 고통을 표현한 유일한 말씀은 '나는 목마르다'라는 한 마디이다. 전날 밤 '최후의 만찬'에서 마신 포도주 이후 단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게다가 허리와 머리에서 피가 흘러 예수님의 몸은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있다.

그러나 이 강렬한 갈증은 단순히 육체적인 갈증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종종 인간의 갈증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다시 목마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샘물이 되어 영생하도록 솟아나리라."(요한복음 4:13, 14)라고 말씀하셨고, 가나안 축제가 끝나는 날, 예루살렘을 찾은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사람 마음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7:37, 38)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소리를 들은 자들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려고 한다.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 "해면을 가져다가 신포도주를 담아 갈대 끝에 꽂아 예수께 마시게 하려고 했다."(마태복음 27:48).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시니..."(요한복음 19:30)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이 "나는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을 아시고, 성경이 성취되기 위해 '나는 목마르다. 라고 말씀하셨다." (19:28)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갈급함'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자극하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충동이다. 사람은 말하자면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참된 사랑을 구하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하고 다섯 명의 남편을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한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편이 아닌 사람과 함께 살았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기 전에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목마름을 깨닫게 해주셔야 했다.

 

우리 안에 있는 '갈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부족할 때 느끼는 것이다. 배가 고플 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사람과의 교감이 필요할 때, 대화 상대가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고 싶을 때에도 그 배경에는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있다. 그것이 바로 '갈증'이다. 사람은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때로는 도를 넘어, 혹은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를 넘어서서라도 그 갈증을 채우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채워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갈증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마친 후 제자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요한복음 4:32)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요한복음 4:34)이다. 그렇다면 곧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실 것을 눈앞에 두고 하신 말씀이 '나는 목마르다'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강렬한 목마름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겠다'는 사명 수행의 결단의 말씀이다. 그리고 다음 말씀인 '다 이루었다'로 이어진다.

 

2.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40)

 

'다 이루었다'는 말은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선언이다. 죄의 대가(대속의 죽음)가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데, 거기에는 구속의 역사가 완성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만족이 담겨 있다. 고난의 종에 대해 예언한 이사야는 53:11에서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치 마라톤에서 우승한 선수가 혹독한 레이스를 돌아보며 만족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수님의 험난한 레이스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극심한 고통과 싸우면서도 아버지를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주어진 믿음의 고비를 넘기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뿐 아니라 완성자가 되기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야 했다.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가혹한 믿음의 경주였다. 그러나 그 경주는 끝났다. 내가 달려야 할 사명을 완주한 것이다.

 

'다 이루었다' - 이 말은 바로 믿음의 승리의 소리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의 소리이기도 하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3.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누가복음 23:46)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심판과 저주 속에 죽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달려갈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노라"고 말씀하시며 그 이후의 일을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신다.

 

'맡기다'(commit)로 번역된 단어(파라티세-'παραρατίθημι')는 본래 '~ 앞에 두다'(set before)라는 뜻이다. 거기서 '맡기다'라는 의미가 파생된 것 같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천주교 사제이자 개신교에도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헨리 나우웬이라는 분이 있다. 그 분이 어떤 책에서 공중그네 서커스 스타에게 연기 비결을 물어본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서커스 관객들은 공중그네를 타는 사람이 스타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스타는 받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잘 날 수 있는 비결은 비행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사람은 받는 사람을 향해 날아오를 때 양손을 벌리고 받는 사람이 잘 잡아줄 거라고 믿고 점프하는 것이다. 공중그네에서 가장 나쁜 것은 날아오르는 사람이 받는 사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나우웬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은 어둠을 향해 뛰어오르는 너를 어둠 너머에서 단단히 붙잡아 주실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손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두 손을 벌리고 믿을 것. 믿고 날아오르면 된다." 라고.

 

하나님이 당신을 붙잡아 주실 것이다. 그 사실을 믿고 뛰어오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맡긴다는 것의 의미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는 말씀 속에 온전한 겸손, 온전한 사랑, 온전한 내어맡김, 온전한 신뢰가 고백되어 있다. 아버지를 향한 흔들림 없는 신뢰야말로 예수님의 일생에 일관된 것이었다. 여기에 믿음의 완성자의 모습이 있다. 이 변함없는 신뢰의 관계를 요한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얼마나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특히 요한복음은 '영생''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복음 17:3)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따로따로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살아있는 관계, 그 변함없는 신뢰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이 영원한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얻고 누리도록 초대하고 계신다. 이 초대를 깨닫고, 그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고난주간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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