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의 심문

- 누가복음 23:6-12 -

샬롬선교회 


[누가복음 23:6-12]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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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리에서 여기까지, 유대 전역에서 가르치면서 이 백성을 선동하고 있다"(23:5)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말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임을 확인한 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영주 헤롯에게 보냈다. '헤롯도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누가복음 23:6)이다. 빌라도는 이 귀찮은 문제를 헤롯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이다.

 

1. 헤롯이라는 인물

 

신약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몇 명 등장한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어렸을 때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학살한 헤롯이다. 이 헤롯은 헤롯대왕으로 불렸다. 그는 로마의 허가를 받아 유대 전체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는데, 유대는 아켈라오에게 주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을 떠나 로마가 총독을 세워 통치하게 된다. 빌라도도 그 중 한 명이다.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은 헤롯의 또 다른 아들 안데스에게 주어지고, 그 북쪽의 영토는 셋째 아들 빌립에게 주어진다. 예수를 심문하려는 헤롯은 둘째 아들 안데스를 가리킨다.

 

예전에 헤롯 안데스는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밀회를 하고 자신의 아내를 내쫓은 적이 있다. 그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네가 헤로디아를 취하는 것은 불법이다"라는 말을 듣고 헤롯은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했지만,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군중들이 두려워서 죽이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헤롯의 생일 축하연이 있었고, 헤롯 앞에서 춤을 추며 그를 기쁘게 해준 헤롯의 딸(의붓딸 살로메)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굳은 약속을 하게 된다. 그래서 헤롯의 딸이 엄마의 협박에 못 이겨 요구한 것이 바로 요한의 목이었다.

 

2. 헤롯의 관심

 

그런 헤롯이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것이 안식을 얻기 위한 기대 때문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총독 빌라도에게 붙잡힌 예수가 보내졌을 때의 반응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예수님에 대해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고, 예수님이 행하는 어떤 기적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3:8)

 

헤롯은 왜 빌라도는 예수를 자기에게 보냈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호기심 때문에 이것저것 질문하는 헤롯에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 예수의 단호한 침묵에 헤롯은 분노를 느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지 못한 헤롯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한 후에 화려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22:11)고 기록되어 있다.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 적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통해 빌라도와 친해졌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는데,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라고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예수를 이용해 빌라도와 화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3. 헤롯 유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묵묵부답이다

 

예수님은 헤롯에게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강할 뿐, 그 태도는 지극히 불성실하다. 사물을 진지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일방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늘어놓기만 한다. 예수의 침묵이 그 어떤 말투보다 더 웅변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의 의미를 조금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도 언제나 침묵, 무언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은 그런 자의 양심에도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진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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