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

국가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고령가야

현 위치

김해시

고령군

함안군

성주군

고성군

함창군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10 왕
수로왕
구형왕

16 왕
이진아시왕
도설지왕

? 왕
아로왕

? 왕
벽로왕

9 왕
말로왕

? 왕
고로왕

성립

42년

42년

42년

?

42년

?

멸망

532년

562년

559년

?

?

?

가야.png

4세기 혹은 5세기 말 ~ 6세기 초의 가야.

가야(伽倻, 加耶, 伽耶)는 낙동강 하류 지역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국가이다. 가락(駕洛, 迦落) 또는 가라(加羅, 伽羅, 迦羅, 柯羅)라고도 한다. 또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임나(任那)라고도 불리나 역사적으로 왜곡된 주장이라는 비판이 있다.


삼한 중 하나인 한반도 중남부 현재 김해시에 위치했던 변한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변한의 12개 소국을 결집해 성립된 전기 가야 연맹, 고구려의 공격으로 전기 가야 연맹이 와해되자 5 - 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지고 562년 멸망했다.


전기 가야연맹

전기 가야연맹은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되고있다. 당초에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의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된 마한 사람일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인근의 진한도 마찬가지였었다.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해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하여가자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기존 변한의 소국들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소 엉성한 국가연맹체를 구성했었다.


구야국의 왕위를 두고 구야국왕인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이사금이 되었다. 탈해이사금 21년인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전기 가야연맹 군이 마두성(馬頭城, 현 양산시 물금 금정산)을 함락하고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전기 가야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 현 낙동강)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전기 가야연맹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했다. 전기 가야연맹과 신라는 초기부터 경쟁 관계였다.


전기 가야연맹의 구야국은 지금의 김해평야고김해만이라는 옛 바다를 천혜항구로 무역을 발달시켰던 전형적인 상업국가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또 일본과 변한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동, 요서의 한사군들도 변진과 전기 가야연맹의 철을 수입하였다.


일본은 당시에 제철 기술 등이 전무해 전적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철에 의지했다. 3세기를 전후해 구야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구야국과 여타 소국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면서 내부결속마저 깨지기 시작했다. 골포국(마산), 고사포국(고성),사물국(사천) 등의 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개 나라가 전기 가야연맹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전기 가야연맹에 대항했다.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고 심지어 신라와도 항쟁하는 등 한때 극성했지만 결국 일련의 전쟁에서 연패해 쇠퇴하기 시작하고 신라의 원조로 전기 가야연맹이 이들을 간신히 평정할 수 있었다.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를 끌여들이고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구야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소국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한사군이 고구려에 정복되고 백제가 요서와 산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구야국을 중심으로 짜인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위협하고 신라가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했다.


4세기말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연패하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던 신라에 앙심을 품었고, 결국 백제의 부추김을 받은 전기 가야동맹과 왜국이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전기 가야동맹의 중기병들과 왜군들은 신라군 보다 강력하여 서라벌 남쪽의 남천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뒤 신라의 서라벌을 함락하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군(援軍)이 동원되고 신라가 구원되었다. 가야군과 왜군들이 궤멸당하고 남쪽으로 후퇴해, 결국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구야국을 패망시키고 전기 가야연맹은 와해되었다. 구야국은 종발성을 빼앗기고 고김해만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권을 상실했으며 경제 기반이었던 해상 무역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고령지방의 대가야가 이후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후기 가야연맹

옛 변한지역은 가야가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한동안 혼란을 겪었었다. 그 시기를 전후해 그때까지 변한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내륙의 반파국이 가락국의 망명객을 받아들이고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면서 가야의 주도권을 잡고 반파국을 중심으로 소위 후기 가야연맹대가야를 형성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군들이 한성백제를 침범하고 패망시키고 백제침미다례를 압박했다.

중앙집권적국가체제를 정비한 대가야는 신라의 낙동강수로와 고김해만 대신으로 호남의 패망한 한성백제의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고 섬진강 유역은 새로운 무역항이자 새로운 무역기반이 되고 전북에서 남원, 진안, 임실, 장수 일대에 기문지방이 이루어지고 전남에서는 모루(牟婁, 광양), 사타(娑陀, 여수), 상,하다리(순천) 등의 지역을 장악해 소위 섭라지방이 형성되고 대가야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섭라지방에서 산출된 옥은 고구려로 수출되고 고구려는 옥을 북위와의 무역에서 중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고 일본의 무역 주도권을 잡았다. 479년에 가야는 남제에 사신을 보내고 국제 사회에 이름을 알리고 481년에 백제와 연합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에 대가야 군이 동원되고 신라가 구원되었다.

쇠퇴

475년 백제의 동성왕은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고구려와 북위와의 항쟁에서 승리하고 무령왕은 다시 세력을 확충했다.일본서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목라근자 사사노궤등이 끌고온 왜군과 함께 침미다례를 병합하였고 신라를 치고 가야 7국을 쳤다고 하였다. 475년 백제의 동성왕은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고구려와 북위와의 항쟁에서 승리하고 무령왕은 다시 세력을 확충했다. 512년(백제 무령왕 12년)에 대가야가 지배하고 있던 기문지방과 하다리·사타(娑陀)·모루(牟婁) 등의 4현(縣)을 돌려받고 3월 반파는 자탄(子呑),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까지 연결하고 봉화대와 군량고를 만들고 이열비(爾列比),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에 연결하고 군과 무기를 모으고 신라와 화친하였다.

6세기 초 백제는 무령왕때 남진 정책을 피어 대가야는 호남 동부를 잃었다. 대가야는 522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지만 신라는 가야와의 외교분쟁을 야기하고 529년 탁기탄(啄己呑, 경남 밀양)을 점령하고 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은 대가야 조정을 불신하게 되고 대가야는 무산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95%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