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과 부활의 예고(2회째)

- 누가복음 9:37~45 -

샬롬선교회 


[누가복음 9:43~45]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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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누구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대답한 지 일주일 후,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은 변모하신다. 그러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곧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제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목격한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이다. 예수님도 선지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9:37~43a에 기록된 '귀신 들린 아들의 치유' 사건과 이어지는 9:43b~45'두 번째 수난 예고'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본문에서는 그 연결고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 라는 예수님의 탄식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맞이했다. 그곳에서 악령에 사로잡힌 외아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외쳤다. '외동딸'이나 '외아들'에 예수는 약한 것 같다. 혹은 누가복음이 특히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아들을 고쳐주시는데,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 라는 탄식(누가복음 9:41)은 무엇을 의미할까?


[新改訳] ", 불신앙이 가득한 이 세상. 언제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エマオ] ", 이 불신앙적이고 비뚤어진 세상이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과 함께 있으면서 너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는가?"

[柳生訳] ", 이 세대는 왜 이렇게 불신앙적이고 비뚤어진 것인가. 언제까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가."

 

9:41의 예수의 탄식은 이 시대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한 참담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군중도 제자들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독백적 '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눈앞의 문제뿐이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맞이했지만, 예수님과의 괴리감이 생기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에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의 현실, 이미 '구부러져 버린'(분사 현재완료 수동태) 사악함에 대한 탄식이다.

 

예수님의 표적과 기이한 기적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징조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의미하는 예수라는 분이 문자 그대로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시대를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의 간극을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라고 예수님은 탄식하고 계신다.

 

2. '인자가 지금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수난의 예고

 

예수께서 악령을 꾸짖으시고 '외아들'을 고쳐서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셨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고 기절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9:44 전반부)고 말씀하셨다. 원문을 직역하면 '너희는 이 말씀을 너희 귀에 새기라'가 된다. 이것은 중요한 일로 듣고 기억하라는 의미의 관용구이다. 게다가 그 일이란 '인자가 지금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는 수난을 의미한다. 지금 경탄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의 손에 예수님 자신이 넘겨질 것이라는 예고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알아듣지 못하다'라는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정확히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도록 완전히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결국 성령이 임하셔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 말씀의 의미를 묻는 것을 "계속 두려워하여"(미완료형)라고 누가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직함. , 구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대제사장', '선지자'들이었다. 그동안 예수님은 많은 표적과 이적들을 통해 왕으로서의 권능을 보여 주셨다. 또한 사람들이 깨달은 대로 예수님은 선지자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또 다른 면인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면모는 숨겨져 있어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왕이시며, 진정한 마지막(궁극적인) 선지자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많은 고난을 받고, 완전히 거절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지만, 많은 군중을 찾고 환영하면서도 그 필연성을 누구 하나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직분이 회복되어야 했다. 다른 나라에 지배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일어나야 한다. 또한 왜곡된 왕의 헌장인 율법을 바로잡는 진정한 선지자가 일어나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기 위한 제사장 제도도 이 시대에는 많은 부를 얻는 특권층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고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대제사장이 일어나야만 했다. 특히 마지막 대제사장의 직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난 없이 일어설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이 시대를 예수님께서 ", 불신앙, 굽어진 악한 세대가여"라고 탄식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21에 이어 9:44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을 귀에 잘 새겨두라. 인자가 지금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는 수난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이 말씀들'이라고 되어 있다. , 21절에 말씀하신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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