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주석(전권)

존 칼빈주석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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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3:19-31 칭의의 방법

 *로마서4:1-8 칭의의 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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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7:1-13 율법에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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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9:14-33  하나님의 주권

 *로마서10:1-13 하나님의 구원

 *로마서10:14-21 말씀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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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教会=Heian Church


하나님의 주권

- 로마서9:14-33 -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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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주권자이심으로 구원하실 자를 임의로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된다고 말하며,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출애굽기33:19)을 인용한다. 구원은 사람의 소원이나 노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 구원하는 선택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4-18)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는 말은, 사람들은 많은 사소한 난제들로 인하여 넘어진다. 특별히 성경이 예정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을 들을 때에 그러하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쳐 나갈 수가 없는 미궁이다. 그러나 사람의 호기심은 아주 끈질긴 까닭에, 어떤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 위험하면 할수록, 더욱 더 무모하게 그렇게 해보려고 덤빈다.

그래서 예정문제가 논의되게 되는 경우, 인간은 본연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까닭에, 즉시로 성급하게 깊은 바다 속으로 뛰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책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알아서 유익한 것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까닭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으면, 예정에 관한 이 지식은 우리에게 유익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전체 주제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택함 받는 자를 다루고 있고, 둘째 부분에서는 유기된 자를 다루고 있다.

택함 받은 자의 경우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토록 했으나, 유기된 자의 경우에는 그의 의로운 심판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왜 유기하시는가 하는 이유를 오직 그의 작정에서만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이 구절의 말씀이 분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은, 비록 이와 같은 예정 교리를 논하게 되면 필시 즉각적으로 사나운 반박과 지독한 욕설들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솔직하게 그리고 아무런 가식도 없이 그것을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실로,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 의해서 그들 각자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순간, 화를 벌컥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가 성령의 지시를 받아 깨달은 것을 아주 명백하게 계속하여 선언한다.

 

이로 보건대, 교리상의 난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성령보다 더 분별력이 있는 체하는 자들의 위선은 참으로 꼴불견이다. 하나님께 아무런 허물을 돌리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의 구원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고 다만 고백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경건치 못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거나, 그들의 혀에 재갈을 먹여 제 멋대로 지껄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면, 그들의 겸손과 절제는 칭찬받을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만약 성령과 바울을 힐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주제가 넘는 짓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참된 교리가 아무리 미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교리를 고백하기를 경건한 교사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경건치 못한 자들이 어떠한 비방을 퍼부을지라도 그와 같은 비방을 반박할 수 있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2)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5)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라는 말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된다고 말하며 출애굽기33:19을 인용한다. 구원은 사람의 소원이나 노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택함 받은 자들에 관한 한,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비난을 받으실 리가 없는 것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따라 자기의 긍휼을 그들에게 입혀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사람은 여기시도 또한 불평할 이유들을 찾아내는데, 이는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은총을 베푸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푸시지 않는 그런 일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공로 없이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 우대 받는 것이 불합리하게 보이기 때문에, 인간은 뻔뻔스럽게도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며, 하나님께서 마치 부당하게 어떤 사람들에게 지나친 은총을 베푼 것처럼 윽박지른다.

 

이제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로, 바울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으로 그가 알고 있는 교리를 결코 모호하게 말하거나 감추지 않고, 그것을 확고부동하게 주장한다.

둘째로, 그는 아무런 번거로움이 없이 그와 같은 교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는 이유들을 찾아내며, 공격적이고 성마른 반론들을 억누르는데 있어서 성경의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으신 것은,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바울의 변증은 얼핏 보아 온화한 맛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권위만으로도 충분하게 여기시며, 그래서 다른 아무의 변호도 그분에게는 필요치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권리의 옹호자가 되시는 것으로 바울은 만족해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모세가 온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당시에, 주께로부터 받은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대답하시기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다(33:19). 주께서 이같이 단언하여 말씀하신 것은, 첫째는 그는 아무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요,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모든 것이 그의 자유로운 선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는 것이기에,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 그것을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나, 모든 사람에게 균일하게 하지 않으시는가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뜻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이유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한번 긍휼을 베풀고자 작정한 자에게서 결코 나의 긍휼을 거두지 않을 것이며, 내가 사랑을 베풀기로 결정한 자에게 계속적으로 사랑을 베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최고의 원인을 자기 자신의 자발적인 작정에 돌리고 있으며, 동시에 그가 어떤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자기의 긍휼을 베풀 것을 작정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어휘를 정확하게 살펴보면, 모든 외적인 원인들이 배제되어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행동의 자유를 요구할 때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겠다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관계 대명사를 보면, 긍휼이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베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게 표시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외적인 원인들에 제한시키는 경우, 이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된다.

 

구원의 유일한 참된 원인은 모세가 사용한 두 마디의 단어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난)이라는 단어는 은총을 베풀다’, 또는 값없이 풍성하게 사랑을 베풀다를 뜻하며, (라함)이라는 단어는 긍휼히 여긴다를 뜻한다. 이처럼 바울은 그가 입증하고자 한 것, 즉 하나님의 긍휼은 값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얽매임이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베풀어진다고 하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3)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6)

바울은 우리가 받은 선택을 우리의 근면이나, 열심이나, 또는 노력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명백한 결론을 이 말씀에서 추론하고 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경우, 그들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그들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감동 받아 택할 마음을 갖게 될 만한 어떤 공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취해야 하는 단 하나의 견해는, 우리가 택함 받은 수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뜻이나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바울은 애쓰다또는 노력하다라는 표현 대신에 달음박질하다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오히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택함을 받으려고 원하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생각하지 않은 자들을 택하여 주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추리하기를, 우리에게는 택함 받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하나님의 긍휼의 도움이 없이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인정하기 보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얻기 위해 원하거나’ ‘달음박질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생트집에 불과한 것은,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자가 택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원하는 것이나 달음박질하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실로 하여 게으름을 피우거나 전혀 행하지 않는 자들은 정죄 받아 마땅하다. 비록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고취된 노력은 효과가 있다.

우리가 이 선택 교리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이 우리 속에 활기를 넣어 주시는 경우 우리의 변덕스러움과 나태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이 소멸되지 않게 할 목적으로 하고, 또한 우리가 받은 바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바라는 것과, 모든 것이 그에게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한편, 두렵고 떨림으로 힘써 우리의 구원을 추구해야 한다.

 

(4)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라는 말에서, 바울은 이제 두 번째 부분인, 경건치 못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에 대해서 다룬다.

여기에는 다소 합리적이지 못한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자를 유기하심에 있어서 그가 왜 전혀 비난 받을 만한 것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지혜와 공평함이 기이하다는 것을 더욱 더 힘써 명백하게 바울은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출애굽기9:16을 인용하여 증거한다. 여기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바로를 멸망에 이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예정인데, 이 예정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은밀한 계획과 관련이 있다.

둘째는 이 예정의 목적인데, 이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점을 바울은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지게 하는 원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불의하시다고 비난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많은 주석자들이 본문 말씀에 있는 귀에 거슬리는 요소를 극소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본문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히브리어에서 내가 일으켜 세웠다라는 표현이 내가 너를 택정하였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유의해 두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바로가 아무리 완악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바로의 포악함을 미리 알고 계셨고, 또한 그 포악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을 장중에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실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바로가 포악토록 작정하셨다는 것을 단언하고 계신다.

많은 사건들이 도처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목적한 바를 제지하기도 하고 그들의 행동을 촉진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바로를 이 땅에 내보내셨다는 것과 그의 성품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세웠다라는 말씀은 이 해석과 잘 부합이 된다.

 

(5)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8)

바울이 목적하는 바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데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이 멸망하도록 눈을 어둡게 하시기를 좋게 여기신듯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이라는 말씀들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이 이상을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있다.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적용되는 때에는, 허용(몇몇 연약한 주석가들이 그렇게 해석한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적 진노의 행위를 의미한다. 유기된 자를 어둡게 하는 데 기여하는 모든 외적 상황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이다. 사단도 강제적인 힘을 가지고 내적으로 역사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그러므로 예지에 관하여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론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바울은 경건치 않는 자의 멸망을 주님께서 예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계획과 뜻에 의하여 작정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솔로몬도 경건치 못한 자의 멸망이 미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특별히 멸망할 목적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16:4).

 

2.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사람(그릇)의 선택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19-23)

 

(1)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1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라는 말에서, 선택 교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나, 경외심을 가지고 좋게 생각해야 하는 신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도 바울은 고집스런 인간의 호기심을 제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비밀을 말씀하시기를 삼가시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의 무한한 지혜가 우리의 적은 머리로는 이해될 수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에게 절제와 온건을 요구하신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는 말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공의로운 것으로 생각할 것을 계속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이유가 우리에게는 감춰져 있어서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자기의 피조물들을 다루는 이유가 없다고 하면, 그의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와 같은 독단적인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경우 그의 명예가 크게 손상되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와 같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바울보다 더 나은 신학자가 되는 것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독단적인 권한을 신자들을 위한 겸손의 규칙으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우러러 보고 그것을 그들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평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에서였다.

 

(2)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1)

바울은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이와 같은 교만을 가장 적합한 은유를 들어 제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은유는 예레미야18:6에서라기보다는 이사야45:9에서 바울이 인용해 온듯하다. 우리가 예레미야에서 배워야 할 한 가지 진리는 이스라엘이 주의 장중에 있는 까닭에, 토기장이가 자기의 진흙으로 만든 그릇을 깨뜨리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리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있을진저라고 하였다.

, 토기장이와 다투는 질그릇은 화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느냐?’ 죽어서 썩어질 인생을 하나님과 비교해 보면, 질그릇보다 더 나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다루고 있는 주제에다 이 인용구를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 꼼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그의 은유가 더욱 뜻이 있게 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2-23)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따져서 묻고 들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찬양하고 경배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가 차이가 나는 것은 똑같은 멸망의 구렁에서 선택 받은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다. 더욱이,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이 더욱 찬양을 받게 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가련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환유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하나님의 으뜸이 되는 찬양은 자비를 베푸시는 행위에 있다. 예컨대, 에베소서1:13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들이 된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나서, 우리의 기업에 대하여 성령으로 우리가 인침을 받은 것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은혜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의미하는 것은 선택 받은 자들이 도구들로서,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 받은 자들을 자기의 이름을 그들 가운데서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그의 긍휼을 행하신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앞에서 유기된 자들을 가리켜 멸하기를 예비된 그릇들이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셨다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 양자의 예비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유기된 자들이 자포자기하여 멸망에 이르는 것으로 바울은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4-29)

 

(1)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4)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에 관하여 지금까지 바울이 전개해 온 논쟁에서 다음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 민족에게만 국한해서 베풀어지고, 온 세계적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베풀어 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 은혜가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육신을 따라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모든 자들에게 예외 없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이라는 말에서, 바울은 호1:10을 인용하여 이방인들에 대한 부르심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은, 그것이 오래 전부터 선지자에 의하여 예언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은 이제 밝히고 있다.

그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나, 그 예언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 구절에서 선지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부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화가 나신 나머지, 그들을 더 이상 자기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는 후에 위로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가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 삼으시고, 백성이 아닌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셨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씀되어진 것이 분명한 이 예언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의 위치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차별이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긍휼이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차별이 없이 베풀어지고 있다. 이로 보건대 선지자들의 예언이 본 주제와 들어맞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 예언에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같은 수준에 오르게 하신 것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교회를 모으시고, 그렇게 해서 백성 아니었던 자들이 자기 백성 되게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은 선언하고 계신다.

 

(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6)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부르리라."라는 말은,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들로 예정하신 자들은 그의 아들들이요, 또한 늘 그렇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만 선택이 소명에 의하여 입증된 자들만을 성경은 흔히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한다.

 

(4)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라는 말은, 선지자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기술한 후에,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묵살되어 버린 것으로 신자들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은혜의 소망이 다소 남아있다고 선포하기는 하지만, 그는 그 은혜를 소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코자 하셨을 때, 그가 원하셨던 것은 그의 구원의 은총이 많은 수의 사람 중에서 소수에게만 베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수는, 포로기간 중 멸망되었던 많은 수의 사람들에 비교할 것 같으면, 멸망 중에서 건짐을 받은 남은 자들이라고 당연히 일컬어질 수가 있었다.

유대인들의 귀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회복을 예표하였으며, 다만 시작을 의미하였다. 그 당시에 일어났던 것이 이제 그 구원이 발전되고 완성되는 때에 더욱 분명하게 성취될 것이다.

 

(5)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8)

주께서 자기 백성을 감축하시고 잘라내심으로 해서, 남은 자가 모두 소멸되어 버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 대단하게 몰락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황폐한 중에서 남아있을 소수가 주님의 의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증거할 것이다.

 

(6)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라는 말은, 소수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되살릴 수 있도록 씨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망하거나, 또는 그 이름이 영원히 잊혀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약속을 늘 마음에 두시어, 그의 준엄하신 심판 중에서도 자기의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그에게 합당하였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한다. (30-33)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원망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유대 민족이 어찌하여 이같이 버림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바울은 이제 설명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 (바울이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준대로, 이 예정이 최고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보다 더 차원 높은 원인들을 입증해 보려고 하는 자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이 모든 다른 원인보다 차원이 높은 것처럼, 경건치 못한 자들의 부패와 사악함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는 근거와 기회를 제공해준다.

 

(2)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31-33)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믿음으로써가 아니고 행위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율법 행위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멸망할 자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28:16)을 인용하며, 사람이 행위로써가 아니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율법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질 것이나,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