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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教会=Heian Church



하나님의 선택

- 로마서9:1-13 -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내용 없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논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한다. 9장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다는 것과 이 선택은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한다.


1.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1-5)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1)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하여 성취되어야만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유대인의 멸망을 보고서 바울이 몹시 심하게 느낀 고통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비록 방탕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이같이 멸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하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방탕한 사람들의 타락을 보고서도 슬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지고 이와 같은 두 가지의 감정들을 능히 가질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신 자들의 멸망을 보고서도 기꺼이 참을 수가 있지마는, 생각을 바꾸어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는, 죄악 중에 사는 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작정을 거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괴로움에 대한 금욕적인 무관심과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자들은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2)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은, 자기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바울의 열렬한 가슴은 불타올라 유대인들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여타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그의 기도에 덧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택을 도외시하고서, 유대인의 구원에만 온 마음을 쏟아 부었다.

 

(3)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4)

"저희에게는 양자됨과"라는 말은, 주님께서는 출애굽기4;22이하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라고 하셨고, 또한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31:9),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1:20)라고 하셨다.

 

"영광"은 주님께서 각종의 수단에 의해, 그리고 또한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해서 다른 모든 민족들 위에 그 백성을 뛰어나게 해주신 그 탁월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많은 표적들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법궤를 통해서 그가 임재하신 증거를 보여주셨다. 그는 그 법궤로부터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으며, 그의 능력을 나타내어 그들을 도우셨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법궤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웠다(삼상4:22).

 

바울이 여기서 "언약들""약속들"을 구별하여 사용했으므로,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안다. ‘언약이란 명백하고 엄숙한 말로 표현되고, 상호간의 의무를 포함하고 있는 바,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맺어진 언약이 있다. 그러나 약속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옛 백성과 언약을 한번 맺으셨으면, 그는 수시로 새로운 약속들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자기 백성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쉬지 않으셨다. 이로 보건대, 약속들의 유일한 근거가 언약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는 특별한 도움이 선택이라고 하는 유일한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율법"이란 그 언약을 단지 새롭게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점을 보다 충분하게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서 "율법을 세우신 것"이 율법으로 명한 것들에 특별히 국한되어야 할 것 같다.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한 "예배"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위해 규정된 의식에 관한 율법을 의미한다.

 

(4)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5)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라는 말에서, 우리는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읽을 수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의 성질들을 구분하되 또한 바로 그 분 안에서 양성을 결합시켜 놓고 있다.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서 나셨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그가 참 인간임을 선언하고 있다. “육신으로 하면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육신 이상의 어떤 것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여기서 인성신성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들에게서 나셨지만,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그는 양성을 서로 결합해 놓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바울이 진술한 이와 같은 찬양이 오직 한 분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다른 구절(딤전1:17)에서 바울은 한 분 하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와 같은 분명한 증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제거할 목적으로 이 문구를 나머지 문맥과 끊어서 생각하는 것은, 대낮에 암흑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대담하기 짝이 없는 소행과도 같은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아주 분명한 바,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들에게 나셨으나,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는 뜻이다.

 

2.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씨(자녀)로 여기심을 받는다. (6-9)

 

(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라는 말은, 바울이 자기 백성의 멸망을 애통해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이 폐해졌다는 어리석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잃게 되는 때에는 반드시 언약이 폐지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선수를 써서, 유대인들의 영안이 아무리 어두워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으며, 그러기에 언약의 진리가 틀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는 말에서, 바울의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사실이나, 아브라함의 기업이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구별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 보건데 어떤 사람들의 허물로 인하여 그 언약이 폐하여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말한 것을, 오히려 말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일반적으로 선택하신 것(general election)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뻐하시는 자들을 그의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스스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께서 단일 민족과 생명의 언약을 맺으시는 중에 보여주신 그의 겸양의 사랑은 분에 넘치는 긍휼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어진 은혜가 두 번째 선택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두 번째 선택은 그 민족의 일부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자녀가 아니라고 한 바울의 표현은 말만 조금 바꾸어서 하는 화법이다. 그는 첫 구절에서 모든 후손들을 포함시키고 있으나, 둘째 구절에서는 참 아들들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참 아들들은 그들의 지위에서 타락하지 않은 자들이다.

 

(2)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7)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라는 말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 외적 부르심을 파기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 구절의 말씀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명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확정하고 완성하는데 이바지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명제들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하나님의 선택이 아브라함의 혈육의 후손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과, 언약의 조건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리고 이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그는 가장 적합한 예를 들고 있다. 만약 그 언약에서 탈락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순수한 후손들이 있어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그 특권을 얻은 사람들이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브라함이 생존해 있었고 언약도 새롭게 주어져 있을 동안에 아브라함의 처음 두 아들 중에 하나(에서)가 벌써 후손의 계통에서 이탈된 사실을 보면, 그의 먼 후손들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이탈 현상이 얼마나 더 심하게 일어났겠는가? 이 예언은 창17:2021:12에서 인용해 온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이스마엘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셨으나, 약속된 축복이 임할 자가 따로 있으리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대답해 주시고 있다.

 

(3)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8)

바울은 그가 입증하고자 계획한 것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진술을 그 예언의 말씀에서 이제 연역해 내고 있다.

만일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씨로 여김을 받고, 이스마엘에게서 난 자는 씨로 여김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리고 이삭은 이스마엘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라고 하면, 육신의 아들들이 다 씨로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약속이 어떤 아들들에게서만 특별한 방법으로 성취되며, 그 약속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고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틀림없다.

육신의 혈통 이상의 장점을 갖고 있지 못하는 자들을 바울은 육신의 자녀라고 일컫고 있다. 한편 주님에 의하여 특별히 인침을 받은 자들은 약속의 자녀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4)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9)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그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된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그의 자손으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그 자손들이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명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은(25:1-6)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어서 내려온 언약의 자손들,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자들만 언약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 간주되었다.

 

3.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10-13)

 

(1)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라는 말은, 약속의 기업에 관한 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삭과 이스마엘)에게서 이와 같은 차이(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를 찾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곱과 에서에게서는 보다 더욱 분명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이삭과 이스마엘)에는, 하나(이스마엘)가 여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들의 신분이 같지 아니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들은 사실 쌍둥이였다. 그렇지만 하나는 주님에 의해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택함을 받았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육신의 자녀들에게서 구별 없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p.294)특별한 선택의 계획이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리브가에게도 또한 게시되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그녀는 쌍둥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2)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라는 말은, 바울은 이제 그의 논증을 한 단계 진일보시키고 있는데, 이는 이와 같은 차이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함이다. 그는 이와 같은 차이가 생겨난 이유를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들 같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략하게 그가 앞서 언급하였었다. , 비록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그 언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서 다 유효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들을 누리는 그들이 약속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차이가 생겨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앞에서는 침묵하여 지나쳐 왔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연막을 쳐 살짝 암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하게 모든 원인이 하나님의 공로 없이 베푸는 선택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선택은 결코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경건한 자들이 구원 받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이외의 다른 원인을 찾아서는 안되며, 유기된 자들이 멸망 받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엄정 이외의 다른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 , 경건한 자들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버림받은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정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바울의 첫 번째 진술은 다음과 같다. ‘언약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를 받도록 예정하심으로 해서, 그 민족에 속한 사람들 간에도 구별이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진술은,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이 선택의 유일한 기초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의 긍휼일 뿐이며, 이 선택은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포함하되, 그들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셋째 진술은, ‘공로 없이 거저 선택함에 있어서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은혜를 동등하게 필연적으로 베풀어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으시다. 오히려 그는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간과하시고,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선택하신다.’

 

바울은 이 모든 진술들을 한 구절에 간략하게 포함시키고 있으나, 뒤에 가서는 나머지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고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식들 간에 차별을 두실 때에, 아직 있지도 않는 행위들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실 수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여기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들의 행위의 공로를 따라서 그들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는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장차 행할 행위로 미루어서 자기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미리 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바울보다 통찰력이 무딘 자들이요, 또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어야 하는 신학의 기본 원리에도 어긋나 있다. ,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 나타난 대로, 인간의 부패한 성질에서 자기의 은총을 받을 만한 아무 것도 찾으실 수가 없다는 원리에 맞지가 않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 아무도 그 때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했다고 바울이 말하는 때에, 그들이 둘 다 아담의 자손들이요, 본질상 죄인들이며, 한 톨의 의도 소유하지 못했다고 하는 바울의 가정을 우리가 또한 덧붙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바가 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궤변론자들이 바울의 단조로운 진술에 만족하지 않고, 경솔하게 다루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이 주장하는 논증들을 결코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신앙의 기초 원리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나(칼빈)는 밝히고자 했을 뿐이다.

 

더욱이 온 인류에게 퍼져 있는 죄의 오염은 그것이 악행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 자체로서도 정죄당하기 충분하다. 이로 보건대 에서가 버림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면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서의 지위가 어떤 악행이나 허물 때문에 악화된 것처럼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미덕과 마찬가지로 죄들도 배제시켰던 것이다.

,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선행이나 악행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혀낸 것이다. 유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저주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바울이 이와 같은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갖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만을 의지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택과 유기의 정당한 원인이 그 자신의 뜻에 있다는 교리를 확정해 놓기 위함이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말에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독자들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만일 행위가 선택 이전에 존재했다고 하면, ‘보상이 행위와 관련되도록이라고 바울이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행위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이 그 자신의 선하신 뜻에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 주제에 관하여 분쟁의 여지가 전혀 없도록 하기 위해서, "택하심을 따라"라는 구문과,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라는 구문을 덧붙임으로 해서 모든 의심을 일소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그 문맥을 좀 더 면밀하게 생각해 보자. 만일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는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선택을 받음으로써, 택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작정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하면, 그들 간에 있는 차이의 원인을 그들의 행위의 탓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또한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라고 덧붙여 말한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부르심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체 행위에 대하여 고려하는 것을 배제하고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있은 것이다. 우리의 선택의 불변성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전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공로는 전혀 소용이 없고, 다만 그것들은 사망을 초래할 뿐이다.

우리에게는 택함을 받을 만한 공로나 자격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선하심만이 유력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미리 아시는 까닭에 선택하기도 하시고 유기하기도 하신다고 하는 교리도 그릇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상반된다.

 

(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2)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라는 말은, 이삭의 아들들이 아직 모태에 있을 때, 주께서 그들을 구별하신 사실에 유의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에게 응한 것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뜻은 작은 아들에게는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었고, 큰 아들에게는 그것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 약속의 말씀은 장차 상속권과 관련된 것이었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자기의 어떤 더 큰 뜻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야곱이 육신적인 면에서 그의 장자권을 인하여 별다른 혜택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볼 때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오히려 그 장자권 때문에 큰 위험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기의 집과 고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그네 길에서 돌아올 때, 두렵고 자기의 생명이 남아 있을 것인가를 확신하지 못한 까닭에, 자기 형의 발에 꿇어 엎드려 자기의 허물을 줌으로 해서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이로 보건대 야곱이 그의 형을 지배한 것이 없고, 오히려 그는 형에게 애원하여 자기의 생명을 부지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장자권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4)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3)

이 구절은 말라기 1장에서 인용해 온 것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유대인들의 배은망덕함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하기 전에,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선포하고 계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근원을 덧붙여 말씀하셨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내가 그를 그의 동생보다 더 낫게 한 특권이 무엇이 있었느냐? 아무 것도 전혀 없다. 그들의 권리는 동등하되, 다만, 동생이 자연법에 따라 형에게 복종했어야 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야곱을 택했고 에서는 버렸다. 오직 나의 긍휼에 의해서만 이렇게 된 것이며, 야곱의 행위에 무슨 공로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은 것은, 야곱의 후손에게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의 족속들은 내가 버렸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더 악한 것은, 이와 같은 은총을 회상하여 나의 위엄을 경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땅에 속한 축복들을 또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축복들은 그의 자비의 상징으로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