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주석(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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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教会=Heian Church




칭의의 실증

- 로마서4:1-8 -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본문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를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또 다윗의 고백을 통해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다윗도 행위로는 실수가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인정을 받았다.

 

1. 아브라함의 실증(實證) (1-5)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1-3)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실에 대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창세기15:6을 인용하였다. 3절의 말씀 중에 믿는다라는 단어는 특별하게 그 뜻을 한정하여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지했다고 하는 구원의 전 언약과 입양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장래의 씨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값없는 입양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약속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이 없이 또한 약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의 소망에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지 못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위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 바울이 그 문맥에서 모세의 진술을 억지로 갖다 붙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여진다. 그들은 이해하기를, 그 문맥(16:6)에는 특별한 약속이 진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일에 아브라함이 올바르고 영예롭게 행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그릇된 것은, 첫째로, ‘믿으매라는 단어가 전 문맥에 걸쳐 있다는 것과 그런 까닭에 한 문구에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그릇된 주요한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이 간파하지 못한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입양과 그의 부성애를 아브라함이 보다 착실하게 믿을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입양과 부성애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베풀어진 은혜 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일 이로 인하여 그에게 의가 전가되었다고 한다면, 그의 의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가 신뢰한 데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그가 받기를 감히 소망한데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모세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말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가졌던 신분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에게 약속으로 제공되었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포착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의가 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는 약속과 믿음의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법률상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그 의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얻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설명이 다 되어졌지만, 주님께서 나에게(존 칼빈)허락하셔서 야고보서를 다룰 수 있게 되는 경우에는, 이 말씀에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야고보서와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코자 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 유의해 둘 것은, 의가 전가된 사람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의의 전가와 칭의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문제는 사람들이 그 자체에 있어서 어떤 존재들인가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 주시는가에 있다는 점이다.

 

(2)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4)

바울은 행위와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증거한 다윗의 시편32:1-2을 인용하였다. 이 말씀 중에 바울이 말하는 일하는 자, 좋은 의미에서 선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 즉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히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를 가리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말하는 일을 아니하는 자, 그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해서는 아무 것도 상급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신자들이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태만을 하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바라는 타산적인 생각을 신자들이 갖지 못하게 금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의는 우리가 당연히 받은 삯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선한 뜻대로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언제나 이 사실에서 우리에게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 즉 자기 무가치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해주시는 것 말고, 우리는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이와 동일한 진리가 갈라디아서3:11에 다른 말로 진술되어 있다. 율법은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까닭에 바울은 이로부터 결론하기를, 값없는 믿음의 의는 행위의 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행위에 근거하여 믿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주의 깊게 비교 검토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공로는 전적으로 배제되고 만다.

 

(3)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5)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기를, 믿음이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 믿음이 공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의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 믿음이 공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의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진술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불의한 것을 또한 정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우리의 궁핍함을 채워 줄 수 있게 한다.

 

요약하면, 자기네들이 경건치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들만이 믿음의 의에 이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완곡한 표현의 말씀은 본문의 주제,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가 마땅히 진노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의 사랑을 가지고 은총을 베푸셔서, 즉 그의 긍휼하심은 우리의 불의를 도말하시어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시는 분으로 되어 있다.

 

2. 다윗의 실증(實證) (6-8)

(1)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6-8)

이 말씀들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는, 바울의 경우 의란 죄사함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과, 결국은 이 죄 사함 역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죄사함이라는 단어 자체가 암시하는 대로, 이 의는 행위가 없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빚이 탕감되는 것은 채권자가 변제 받을 때가 아니고, 채권자가 자의로 그가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어서 빚을 말소해 주는 때이다. 그러므로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물리치자.

 

바울은 의의 선물이 값없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 죄사함의 개념에서 그의 논증을 빌려온 것이다.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바울과 의견을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주장하기를, 믿음의 의는 값없는 것이고, 행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 의는 죄사함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 행위라도 죄 사함 받는 데 요구된다고 하면 그의 논증은 분명히 거짓된 것일 것이다.

 

반쪽 사죄에 대한 로마교회 학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은 다윗의 바로 그 말씀에 의해서 또한 반박된다. 그들은 터무니없게도 주장하기를, 우리의 허물이 사함을 받기는 해도 형벌은 하나님께서 기억해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 다윗은 우리의 죄가 가리어져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의 면전에서 옮기어 있다는 것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그 죄들이 추궁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추궁하지 않는 죄들에 대한 형벌을 그가 요구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되는 것인가? 그러므로 죄들을 값없이 사함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된 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는 영광스런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값없는 의가 중단됨이 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다윗이 오래 계속된 그의 양심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시달림을 받아 이 선언을 말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체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수십 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경배해 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믿음에 크게 진보한 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법정에로 소환되는 모든 사람들의 불행을 마침내 체험하였으며, 그래서 선언하기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추궁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그의 은총의 품에 안아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의는 단순히 시작하는 행위 일뿐이고, 그 후로는 신자들이 처음에 아무런 그들 자신의 공로 없이 얻었던 그 의를 그들이 행위에 의해서 보지(保持)한다고 터무니없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 또한 반박되는 것이다.

 

행위나 다른 경험들이 의로 간주되어 종종 진술되어 있다고 해서, 바울의 논증이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시편106:30에 기록되기를, 주님의 제사장 비느하스가 간음자와 창기를 처벌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재앙을 그치게 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 의로 인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과연 우리가 어떤 사람이 의로운 행위를 해냈다는 것을 듣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행위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요구되는 것은,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18:50)는 약속의 말씀대로,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한 순종이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의가 먼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과일이 나무에서 자라나 열매를 맺는 것처럼 행위의 의가 믿음의 의해서 자라나 열매를 맺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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