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종말론

     http://minoru.la.coocan.jp/morton52.html

저자木稔

번역シャローム宣教会

         

서론


 구약성경의 종말론적 사상이 있는 것을 개관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신약성경으로 향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구약성경의 기대(the Old Testament expectations)가 그리스도의 최초 도래에 있어서 실현된 어떤 것을 음미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제2의 도래(the second coming)에서 계시되고 있는 그것들을 고찰해 보자. 이와 더불어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종말론적 주제도 주목하자.

 

. 예수의 도래와 사역(하신 일)에서의 구약성경의 예언의 실현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세상의 끝 중간에 위치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구약성경의 종말론적 기대의 많은 실현을 찾아낸다. 맨 처음 약속된 구속주(the redeemer)의 도래는 예수가 세상에 온 데서 실현된다. 다음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탄생에서 승천으로 구약성경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태 1:20-23) .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 2:5-6)

 

 이러한 부분들-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복합적인 사건(the complex of events) -은 구약성경의 예언 실현이었다.

 

 구약성경의 그런 실현의 다른 범례는 승리의 입성, 십자가와 관련된 특별한 사건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예언자를 통해 말하던 것이 실현되기 위해서였다.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태 21:4-5)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요한 19:24)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요한 19:33)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태 27:57-60)

 

 베드로는 부활과 승천도 예언됐음을 보여주기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했다.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사도행전 2:24-32)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사도행전 1:9)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신약성경에서 한번뿐인 최종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베드로 3:18)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 9:11-12)

 

 그는 다시 그리스도의 사역의 최종성(最終性)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영원히(forever)라는 구절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히브리 10:12). 이렇게 해서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승리가 그리스도에 있어서 완성된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

 

 세례 요한도 예수도 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전하였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말하였다(마태 3:2). 예수는 이미 그 나라를 도래한 것으로(as having already come)고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 12:28)

 

 왕의 도래와 함께 천국이 존재하는 것(as being present)으로 이해되었다. 물론 유대인들이 예상한 천국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은 정치적 실체로서(as a political entity), 천국을 다윗 왕국의 복귀(thereturn of the kingdom of David)라고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한 18:36-37)

 

 현림(現臨)하는 천국(the present kingdom)에 더해 신약성경은 천국의 완성(the consummation)이 있음을 알려준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태 8:11)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누가 22:16)

 

 

. 마지막 때 (the last days)

 

 신약성경에 있어서 천국의 개념은 현재와 미래에 모두 존재한다(both in present and infuture). 이와 관련해 신약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도행전 2:16-17)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마지막 날이 시작(the last days had begun)되었음을 단언했다. 이 기간은 위대하고 주목할 만한 날, 즉 심판의 날이 옴으로써 끝난다.

 

히브리서에는 예수의 도래를 세상의 종말이라고 말한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 9:26)

 

요한은 우리가 세상의 끝에 있음을 말한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한일서 2:8)

 

 지금 본 유형의 표현은 신약성경의 신자들이 마지막 날, 마지막 때에 세상 끝에 살고 있음을 실제로 의식했음을 보여준다. 신자들은 구약성경에 예고된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그의 천국의 수립에 있어서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Anthony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Eerdmand Publihing Company, 1972, p.108-109).

 

 C. H. Dodd은 이를 '실현된 종말(realized eschatology)'로 규정했다. 구약성경의 종말론적 기대는 신약성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Dodd의 입장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고, 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기대하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요한도 바울도 실현된 종말(realized eschatology)을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Dodd에 따르면 복음에 대해 중요한 것은 현재의 때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the presence of salvation in the present time).

 

 Rudolf Bultmann은 실현된 종말(realized eschatology)의 모티브를 도입했다. 그는 요한에 있어서는 미래의 극적인 사건(the future dramatice vents)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음을 주장했다. 한편 바울은 그것들이 미래에 있을 것을 가르쳤다.

Bultmann, "요한은 철저히 구원의 이 현재의 성질에 따라, 그 급진적인 결론에 온 것이다." (Berkouwer, The Return of Christ, translated by James Van Oosterom: Grand Rapids: William B.Eerdmans Publihing Company, 1972, p.18-109. 

 

 HoekemaDoddBultmann이 모두 잘못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경에서 실현이 시작된 구약성경의 종말론적 사상의 국면이 있다. 그는 실현된 종말(realized eschatology)을 말하는 대신 개시(開始)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을 말하는 것이 더 낫다고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많은 종말론적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이 용어의 유리함은 역사에 대한 위대한 종말론적 절개(切開)(the great eschatological incision into history)가 이미 이뤄진 사실을 정당하게 다룰 수 있다. 한편, 그것은 장래에 있어서의 새로운 종말론의 전개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시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은 종말이 실제로 시작됐지만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Hoekema, op.cit., p.17-18)

 

'마지막 때'(the last days)'마지막 날'(the last day) 사이에 이뤄지는 흥미로운 구분이 있다. '마지막 때(the last days)'는 현 시대(the presentage)를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베드로는 '마지막 때(the last days)'에서의 성령의 부으심(사도행전 2:33)에 대해 요엘의 예언처럼 풀이했다. 한편, "마지막 날"(the last day)은 결코 현재의 시대에 대해 사용되지 않고, 심판의 날 혹은 부활의 날에 사용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요한 11:24)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한 12:48).

 

 

. 현재의 메시아적 시대와 다가올 시대

 

 신약성경은 현재의 메시아적 시대와 다가올 시대 모두 말한다.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누가 18:30).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에베소 2:7)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히브리 6:5)

 

 이들 두 시대의 대조는 다음과 같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누가 18:29-30)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누가 20:34-35).

 

 이러한 점에서 신약성경은 예수의 최초 도래로 인도된 시대를 축복의 특별한 시대와 그가 다시 돌아올 최종적인 완성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시대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Hoekema가 그 시대를 현 시대의 축복은 다가 올 보다 더 큰 축복의 약속이자 보증이다.(Op.cit., p.20).

 

 이 사실이 진실임은 예수의 최초 도래에 기인한 것으로써 예수의 재림 약속과 확실함에서 볼 수 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1)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브리 9:27-28).

 

우리는 이제 신약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 몇 가지를 음미해 보자.

 

A. 신약성경의 대조적인 구조(theantithetic structure of the New Testament)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구조에 대해 세 요소가 있다.

첫째,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 대조적인 구조가 있다.

신약성경의 대조적인 구조는 "이 세상"(ό αιων ουτος: hisage)"저 세상"(ό αιων εκεινος:thatage)의 대조에 따른 비교에서 발견된다. 같은 대조가 "ό νυν αιων:the present age""오는 세상(ό αιων ό ερχόμενος:the coming age)"의 구절에 의해 나타난다.

 

둘째, 대조적인 구조는 마태 12:32의 이 세상(the presentage)과 오는 세상(the comingage)과 같은 구절에서 보인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태 12:32)

 

셋째, 대조적인 구조는 누가 20:34-35에서 보인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누가 20:34-35)

 

B. 두 세상의 상호 관계

 

1. 2세상의 포괄성 혹은 전포함성(Comprehensiveness or the all-inclusiveness of the twoages)

 

 

마태 12:32에서 성령에 대한 죄가 용서되지 않는 것으로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마가 3:29에 의해 확증을 얻고 그것은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히 죄책임을 진다. 이 세상과 후세가 인간 존재와 경험의 전 기간(the wholespan)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아니라면 끼리끼리(aloophole)를 주는 어떤 기간이 부담스러울 것이고, 또 이렇게 해서 고해된 위협을 타파할 것이다. 이것은 마가 3:29에 의해 확증되고 그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들 부분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unbelievers)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비신자와 그의 경험과 운명에 관한 두 가지 세상의 포괄성(the comprehensiveness of the twoages)에 대해 말한다. 이 두 세상은 신자가 아닌 사람의 존재와 경험의 전 기간(the whole span)을 덮는 것이다.

 

같은 것을 신자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마가 10:30과 누가 18:30은 신자들의 상에 대해 말한다. 지금 세상에 박해도 받지만, , 형제, 자매, 어머니, 자식, 밭도 백배 받고, 후세에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 포괄적인 공식(the comprehensive formula)이 현재의 시기와 세상 혹은 오는 세상(the present season and the world orage to come)에 대해 말한다.

 

에베소 1:21-22은 예수님의 하늘에 올리심과 관련해 이 세상과 오는 세상(thisage and the age to come)에 대해 말씀한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에베소 1:21-22)

 

이 일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양쪽 인간의 모든 역사를 포함한다. 만일 이 일이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또 다른 세상(anotherage)이 있다면 그때 논의의 모든 힘이 꺾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에 있어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2. 두 세상 서로 연속된다(consecutive)

 

 이는 첫 번째 원칙의 필연적인 결과다. 만약 두 세상이 연속되지 않는다면 그때 그들 사이에 두 개의 중복(an overlap of the two)도 없고 또 균열(agap)도 없다는 얘기가 된다. 누가 20:34-35에 있어서,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은 이 세상을 정의하는 특징이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끝난다면, 그 때 이 세상도 끝난다. 이 세상은 결혼을 통해 표시되고, 오는 세상은 덧없는 것으로 표시된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누가 20:34-35)

 

보답으로서의 죽은 자들의 부활은, 올 세상과 결부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라. 또한, 부활이 주님의 재림(到來)하실 때인 것은 부활에 이르는 자들은 결혼에 있어서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결혼은 곧 부활로 끝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다가오는 세상은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된다. 결혼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계속되며, 세상은 그때까지 계속된다. 부활은 오는 세상의 특징이므로 부활은 이 세상을 끝낼 것이 틀림없으며, 또 다가올 세상을 도입한다. 이 모든 것들은 두 세상의 연속성을 가리킨다.

 

C. 예수의 재림(到來)는 세상의 구분점(the point of division)이다.

 

디도서 2:12-13에서, 바울은 우리가 불신앙과 현세적 욕망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사려 깊고 올바르고 신앙심 깊게 생활하도록 가르치고, 또한 축복에 찬 희망, 즉 위대한 하나님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1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디도서 2:12-13)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축복된 희망을 위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세상이다. 한번 하나님이 나타나면 그때 경고는 멈추고 이 세상은 끝이 난다.

 

"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마태 13:39-49)

 

 이 말씀에서 예수님는 수확은 세상의 끝에 혹은 시대의 끝에(at the end of the world or end of the age) 올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수확에서 분리를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그의 심부름꾼을 보내고, 의인과 악인은 분리될 때 세상의 종말이 온다.

 

D. 결론

 

이들 세 가지 원칙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종말론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구조를 부여한다. 이 구조는 현재의 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는 것이며, 예수님은 다가올 세상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신약성경의 종말론을 연구할 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E. 두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계

 

바울은 예수님의 두 도래 사이에서 우리가 살 것을 말한다. 실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났다. 그 은혜는 우리가 불신앙과 현세적 욕망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사려 깊고 올바르고 신앙심 깊게 생활하도록 가르치고, 또한 축복에 찬 희망, 즉 위대한 하나님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디도서 2:11-13)

 

Berkouwer는 말한다, 우리는 미래주의자(afuturist orientation)의 지향에 빠져서는 안 되고, 또 상관적으로 오는 일에 대한 미래주의자의 기대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약속은 과거의 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기대는 미래의 씨앗이 현재에 있다(the seeds of the future lie in the present)처럼, 현재의 세상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기대는 올 것과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 사이의 완전하게 독특한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 --- 기대는 그리스도를 향해져 있고, 그는 이미 왔고, , 시간의 끝에 오지만, 그것은 미래주의자의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론은, 이미 왔고, 2차로 나타날 그리스도에 항상 관심이 있다··그를 기다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구원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히브리 9:28).이 이중의 사건은 종말론 주춧돌(the cornerstone)이며 단순한 미래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Op.cit., p.12-13)

 

결론

 

 이 장에서 우리는 구약성경의 기대와 장래에 관한 신약성경에 일반적인 시야를 줄 것을 요구했다. 우리가 신약성경의 종말론적 접근법에 대한 개관을 결론지을 때, 우리는 다음 점에 주목한다.

 

1. 구약성경의 위대한 기대는 곧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가 실현했다. .

 

2. 지상에의 사역의 완성, 하늘로의 귀환, 재림의 약속을 가지고 우리는 구약성경의 종말론적 기대는 실제로 두 단계로 나뉘었음을 인정한다.

 

3. 현재 때의 축복(the blessing of the presentage)은 와야 할 보다 더 큰 축복의 약속이자 보증이다.(Hoekema, op.cit., p.22).

 

 

해설

 

신약성경의 종말론 소개가 끝났으니 5가지 점의 해설을 적는다. 세세한 것은 스미스의 본문을 읽어주셨으면 하기 때문에, 깨달은 것을 적는다.

 

1 , 구약성경에서 종말의 사건으로서 예언, 예고되었던 사항들이 신약성경에서 실현되었음을 밝힌다. , 구약성경의 종말론을 구성하는 사항으로 스미스는 여섯 가지를 들고 있었다.

그것들은 다가올 메시아의 기대, 하나님의 나라, 새 계약, 영혼의 약속, 주의 날, 새 하늘과 새 땅이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신약성경에서 실현된 것을 4가지의 관점에서 말한다.

그 네 가지는 메시아 그리스도의 도래와 묘기에서 구약성경의 종말예언이 실현된 것,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출현에서 도래한 것, 펜테코스테에서 성령이 부어지면서 끝 날이 도래한 것, 그리고 이들 사건들로 인해 구약성경이 약속한 종말은 실현된 것,

그러나 그렇다고 종말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개시한 것이며, 이 시대는 그리스도 재림에 의한 종말의 완성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는 시대이며, 그리스도가 실제로 재림했을 때 종말은 말의 가장 엄밀한 의미로 완성될 것을 스미스는 말한다.

 

2 , 그럼 메시아의 도래와 기술에 있어서 구약성경의 종말예언이 실현된 것은 어떤 것인가.

스미스는 예수의 탄생, 예루살렘 입성, 한번뿐인 최종적인 행위로서 십자가의 죽음에 따른 속죄의 포효를 한 후 매장, 부활, 승천, 신의 오른쪽에 앉음을 나타내는 성구를 차례차례 구체적으로 인용하며 메시아의 도래와 기술에 있어서 구약성경의 종말예언이 모두 실현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3 , 그럼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출현에 있어서 도래한 것은 어떤 것인가.

스미스는 신국의 도래는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도 예수 자신도 스스로 선언하고 전하며 증언했음을 말한다., 왕인 예수가 도래한 이상 왕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도 동시에 도래했음을 말한다.신의 나라는 통상 신의 왕적 지배를 의미하지만 스미스는 예수를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이해하고, 왕인 예수가 도래한 이상 그리스도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도 도래했음을 말한다.또한 유대인들이 원했던 신의 나라는 정치적 메시아에 의해 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정치적 국가이며, 다윗 왕국과 같은 이 세상의 강력한 지상국가였지만, 예수는 필라토에게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대답한 것처럼 영적인 의미의 왕국이었다.그리고 이 영적인 왕국은 세상의 마지막 예수의 재림에서 영광의 미국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4 ,, 그럼 펜테코스테에서 성령이 부어지면서 종말의 시기가 도래한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러면 펜테코스테에서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듯이 성령의 종을 따르며 마지막 때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덧붙여 끝의 때와 마지막 날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스미스는 말한다. 마지막 때는 영어로 the last days로 기간을 표현하지만 마지막 날은 영어로 the last day로 그리스도가 재림해 부활, 최후의 심판이 이뤄지는 날을 나타낸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는 기간이 있다. 예수의 출현(첫째의 강림, 첫 번째의 도래)과 예수의 재림(두 번째의 강림, 두 번째의 도래) 사이에는 시간이 있고 기간이 있다.

 

3 , Dodd의 실현된 종말론에 대해 스미스는 말한다. Dodd은 구약성경의 종말론적 기대는 신약성경에서 실현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여 복음에 의한 구원의 시대가 되었음을 강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기대할 일이 아니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는 잘못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이중의 스테이지, 두 가지의 면이 있어, 그리스도의 출현에 의해서, 확실히 개시했지만, 그러나, 완성은 장래의 그리스도 재림의 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Dodd(1884-1973)은 영국의 신약학자이다. 나도, 그의 "사도적 선교와 그 전개"를 읽었다. 그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리얼리티를 의미하며, 현 시대는 예수에 의한 구원의 시대임을 강조하면서 예수가 다시 온다는 재림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는 예수의 장래의 도래, 즉 재림과 관련된 모든 말씀은 예수의 부활을 보여주었는데도 교회는 그것을 부활과 세상의 종말의 재림이라는 두 가지 별개의 일로 구별하여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이 자신의 주장을 특히 요한복음서에 호소하여 요한복음서 주요 주제의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곳에서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본다. 또한 Dodd 자신도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표현은 불충분했고, "개시된 종말론"이 좋다고 했다. 이렇게 Dodd은 우리 시대를 구원할 때만 하고 세상 마지막 종말이나 그리스도의 재림, 구원의 완성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성경에 서 있지 않은 일면적인 관점이었다.

 

4 , Bultmann의 종말 이해에 대해 말한다. Rudolf Bultmann도 실현된 종말(realized eschatology)의 모티브를 도입했으며, 특히 요한복음서에 있어서는 미래 세상 종말의 극적인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주장했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나도 Bultmann(1884-1976)의 요한복음서를 독일어 원서로 읽었는데, 그는 요한복음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지금 여기서 현재 생기는 일이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래 차원은 상실된 것으로 5:24, 25, 4:35를 꼽는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미래에 세상의 종말을 나타내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 말들은 요한복음서의 진면목이 아니라 후대의 추가, 보충이며, 더구나 이들은 고대의 신화적 세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만인의 부활, 그 밖의 우주적 사건 등이 일어날 미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람이, 지금 여기서, 신앙적 결단을 하고, 하나님과 관계되어 살았던 그리스도의 실존적인 삶의 방식을 자신도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Bultmann의 이 주장도 틀렸다. 장래적인 말은 후대의 추가, 보충이라고 제멋대로 단정하고 있다. 또 바울의 편지에는 데살로니가 4:14, 1:10, 로마 8:18 등으로 장래의 종말적 사건이 단언되어 있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 지극히 분명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Bultmann의 종말론은 실존주의적 종말론이라고 하지만 성경에 서 있지 않다.

 

DoddBultmann의 종말론 이해에 대해서는 출저(G.C, 베르쿠바: 교의학 연구-그 소개와 해설-'12권 그리스도의 재림'의 제4'사이에 있는 시간의 의미', 네덜란드의 아페르도룬(Apeldoorn) 신학교의 판 헨델렌과 헬레마 공저의 네덜란드어로 쓰인 '간결한 교의학'(Beknopte Gere Forme)742쪽으로부터 743쪽에서는 도트의 종말론(Degiseknoptisete)으로, 도트의 종말론은 '실제(D또한 남아프리카 프리토리아 대학의 뛰어난 개혁파 신학자 하인스의 '교의학'(Dogmatiek)414쪽에서 415쪽에서 Dodd의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Gerealiseer deeskatologie)으로, 브루트만의 종말론은 '실존주의적 종말론'(Existentialistiese eskatologie)으로 해설되어 있다.

 

5 , 예수의 첫 번째 강림(출현)에 의해 개시된 현재의 세상과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다가올 시대의 상호관계에 대한 것이다. 스미스는 네 가지 특색을 말한다.

첫 번째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은 대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예수 자신이 성령에 의해 베르제부르(사탄)를 몰아냈을 때 인자(人子)에게 거역하는 자는 용서받는다. 그러나 성령께 아뢰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후세에 용서받지 못한다(마태 12:32)고 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대조시킴으로써 명백하다.

 

두 번째는 '이 세상''오는 세상'은 인간의 존재와 경험의 전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 '이 세상''오는 세상' 외에 인간존재의 기간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오는 세상" 사이에 "골짜기, 틈새"의 기간은 없는 것이다. 이 두 세상에서 인간 존재의 모든 포괄성 혹은 전포함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 세상과 올 세상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세상은 끝나고 올 세상이 시작된다. 이 세상의 특색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있지만 오는 세상에는 벌써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사라지고, 믿는 자는 부활시켜 하나님의 자녀들로 오는 세상이 시작된다. 결국 결혼은 예수님의 재림까지 이어지지만 예수님이 재림했을 때 결혼은 이미 끝나고 믿는 자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져 오는 세상이 도입된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두 가지 세상의 연속성이 드러난다.

 

네 번째는 이 세상은 예수를 믿고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살지만 예수님이 재림했을 때는 예수님은 의인과 악인을 분리함으로써 이 세상은 끝나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은 두 세상의 구분점이 된다.

 

다섯 번째는 두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 우리는 예수님의 두 도래 사이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있어서는 신앙심 있게 살며, 이 세상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스미스는 말한다. 우리는 근거 없는 단순한 미래주의자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재림해 주신다는 근거의 확실한 희망을 갖고 걸어갈 것을 베르쿠바를 인용한다. 성경의 종말론,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의 주춧돌, 중심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러므로 베르쿠바도 자신의 종말론의 저작명을 단지 "종말론"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의 재림"(De Wederkomst van Christus: The Return of Christ)이라고 한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신앙하지 않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종말론을 말하는 신학이 있지만 우리 개혁파 교회는 결코 편들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자 특별 계시 그 자신인 성경에 의거하여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기준에 서서 대회 60주년 기념선언 "종말의 희망에 대한 신앙의 선언"에 따라 그리스도 재림으로 인한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우리 구원의 완성을 진정으로 희망하며, 오늘도 내일도 힘차게 살아가자.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대해서는, 출저 "로마서의 설교집"의 상권, "영광을 받을 약속"(8:18-25),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에 대해서는, 하권, "이스라엘의 회복"(11:11-24),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완성"(11:25-36)을 참조.

 

http://minoru.la.coocan.jp/morton52.html

 

.http://shmission.com/xe/980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