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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과 믿음의 시련

베드로전서1:1-7


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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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도들이 믿고 사랑하며 기뻐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되셨던 분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천사들도 보기를 원했던 구원사역이 다 이루어졌다.

이제 많은 죄인들, 곧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많은 영혼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했으나 그를 믿고 사랑하며 그를 기뻐하였다.

 

1. 문안 인사 (1-2)

 

[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나그네" - 경건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들이요, 또한 은유적으로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경건한 자들이 나그네로 지칭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크게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 같은 잘못은 바로 앞에 나오는 흩어진이라는 말로써 반박될 수가 있다.

나그네라는 말은 여기서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될 수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고국에서 추방되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들이 주께서 하나의 영원한 기업으로 약속하셨던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사도는 뒤에 모든 신자들을 나그네 혹은 행인으로 지칭한다. 이는 그들이 땅에서는 순례자들이기 때문이나 여기서는 문제가 다르다. 유대인들이 나그네들인 것은 그들이 약간은 본도에, 약간은 갈라디아에, 또 일부는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가 본 서신을 특히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저작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는 바울이 갈라디아서2:8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자기가 유대인의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흑해로부터 갑바도기아에 이르는 소아시아 전체를 그가 열거하고 있는 지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순종함과" - 사도는 거룩하게 하심에 두 가지 일을 덧붙인다. 그는 순종함이 새 삶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림은 사죄를 뜻하고 있다고 본다.

만일 이 두 가지가 성화의 일부, 혹은 결과라고 한다면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가끔 즐겨 사용하던 용어와는 다소 의미가 다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유효적인 부르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새로워져서 그의 의에 순종하게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 피의 공로로 우리가 죄에서 깨끗하게 될 때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율법 아래서 거행되던 옛날의 피 뿌리는 의식에 대한 하나의 암시적인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에 희생제물을 죽여 피를 뿌리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도 만일 우리의 양심이 죄의 씻음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나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에 율법 아래서 피를 뿌리는 일이 제사장의 손으로 행하여졌듯이 이제도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리신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신앙 체험으로써 확인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신 데에는 두 가지 결과 혹은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곧 새롭게 지으심을 받아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두 가지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선택이 그의 부르심과 분리될 수도 없거니와 믿음에 의한 칭의가 중생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의 비밀에 속한 것이어서 성령의 특별한 계시가 없이는 알려질 수 없는데 이것이 어찌 밝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게 되므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선택에 관하여 지나치게 캐고 들어서는 안 되고, 그들은 오히려 부르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진 자들은 다 선택을 받은 자들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나는 대답하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은 사람들로부터 구별하신 것이 바로 구원의 증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겉으로만 선택받은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신 표가 나타나는 자들을 모두 선택받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비의 판단은 될지언정 믿음의 판단은 되지 못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 속에서 그들의 선택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부터 선택을 추론해 내고 있음을 문맥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그가 지적한 대로 선택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를 보여주는 한, 사도는 그들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로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전에 택하신 자들만을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도는 우리에게 그 선택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선택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구별되었고 세상과 함께 망하지 않게 되는데, 사도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의 기초요, 제일의 원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그가 구원을 위하여 택하신 자들을 미리 아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지의 본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소피스트들은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공로를 미리 아셨으며, 그리하여 각자가 스스로 자신을 입증하는 바에 따라 선택을 받기도 하고 버림받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공로를 배격하고 우리의 구원의 터전인 하나님의 뜻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선택의 원인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써 이는 하나님이 그의 자유의지에 따라 우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 편에서의 모든 공로를 일체 배제한다. 우리는 이 주제를 에베소서 1장에서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보다 광범하게 다룬 적이 있다.

 

사도는 우리의 선택을 우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돌리는 동시에 선택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우리에게 알게 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부르심을 간과하고 우리 선택의 확실성을 아주 깊은 신비에 싸여 있는 하나님의 숨겨진 예지 속에서 찾아내려는 것보다 더 위험스럽고 더욱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아주 훌륭하게 교정을 한다. 그는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생각나게 하여 그 원인이 하나님 안에만 있은 것으로 여기게 했고, 이제는 우리에게 선택의 효과를 제시하고 상기시켜 그 효과를 제시할 뿐 아니라 선택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그 효과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곧 유효적 소명인데 성령의 내적인 역사에 의하여 생기는 믿음이 복음의 외적 선포에 더해질 때 발생하는 것이다.

 

[ 김효성 강해: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한다. ‘사도는 주께서 친히 택하여 세우신 자들로 열두 제자와 바울을 가리킨다(6:13; 1:1). 열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나가서 전도하며 권능을 받아 병자들을 고쳤던 자들이었다(10:1; 3:14-15).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편지하였다. 위의 땅들은 오늘날 터어키 지역에 해당한다.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본향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역대상29:15에 보면, 다윗은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은혜와 평안이 더욱 많기를 기원하였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값없이 주시는 호의와 사랑이다. 평안은 죄사함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과 또 그와 함께 몸의 건강과 경제의 안정과 사회적 평안을 포함한다. ]

 

2. 산 소망 (3-4)

 

[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사도는 먼저 유효적인 원인을 언급하고 나서 그 다음에 중보적인 원인을 지적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산 소망이 있게 하기 위하여 거듭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이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의 공로를 보다 완전하게 배제시키기 위해서 베드로는 그 많으신 긍휼이라고 말한다. 실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구원의 유일한 주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고 나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원인들을 끄집어내서 그만큼 하나님의 긍휼을 삭감시킨다. 베드로는 오직 긍휼만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그런 다음 즉시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을 다른 방법으로나 다른 곳에서는 보여주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여기에 우리를 집중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급되지 않고 그의 부활만 언급된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일의 시작이 없이는 결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는 그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사도가 여기서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가 지금 새 생명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그는 거듭남이 하나의 선물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본래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이다.

 

[ 김효성 강해: 성도는 거듭난 즉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멸망이었고 거기에는 두려움과 절망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죄 씻음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은 산 소망인 것이다. 세상의 것들은 다 썩고 더러워지고 낡아진다. 그래서 시편 102편 저자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라고 말했다(102:26). 또 이사야 40장에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고 말했다(40:6-7). 그러나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된 기업 즉 천국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성도들은 그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인 것이다(8:17). ]

 

3. 믿음의 시련 (5-7)

 

[5-7]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우리는 실로 교황제도 하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보존(성도의 견인)은 내일도 동일한 은혜의 상태에 있게 될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의심스럽다는 하나의 사단의 소리와도 같은 견해로 꽉 차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를 이와 같은 의심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하는 데서 일어나는 의심이 우리를 불안에 빠뜨릴 것에 대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믿음의 확고함이 생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그 안전은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역시 보장된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사도가 신자들이 크게 기뻐하는 동시에 근심한다고 말할 때 다소 모순이 있어 보인다. 이는 기뻐하는 것과 근심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두 가지 일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함으로써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자들은 목석도 아니고, 또 그들이 슬픔에 동요되지 않고, 위험을 개의치 않으며 궁핍에 해를 입지 않고, 극심하고 견디기 어려운 박해에도 상처를 입지 아니할 정도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박탈당한 사람들도 아니므로 그들은 악으로 인해 근심하게 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을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되므로 근심하는 중에도 동시에 끊임없이 기뻐하게 된다. 이러므로 근심은 그들의 기쁨을 막을 수가 없고 오히려 기쁨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또 비록 기쁨이 슬픔을 이긴다 할지라도 그 슬픔을 아주 종식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 기쁨이 우리의 본성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인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데에 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사 값없이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을 생각할 때 기쁨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사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다 모든 악한 재난을 견뎌내는 것이 쉬운 일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신령한 것들을 맛본다면 어찌 슬픔에 억눌리는 일이 있겠는가? 자기의 고난을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시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그 고난을 딛고 일어설 뿐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는다.

 

[ 김효성 강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란 앞 절에 말한 천국을 가리킨다. ‘말세에 나타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천국은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또 성도들은 이 놀라운 구원 곧 천국을 얻기 위해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 요한복음10:27-28에 보면,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디모데후서1:12에서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이를[이 복음을]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구원과 영생]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하였다(딤후 1:12).

 

하나님의 구원과 그 능력의 보호하심이 이와 같이 확실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을 당하며 잠깐 근심하게도 되지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금의 제련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다. 없어질 순금도 용광로 속에서 제련함으로써 나온다. 성도들은 환난과 시험을 통해 인격의 단련을 받아 거룩하고 겸손하고 믿음 있는 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행들을 많이 함으로써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때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천국과 영생의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하였다(5:3-4). ]

 

4.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 (8-12)

 

[8-9]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김효성 강해: 사도 베드로가 편지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으나 그를 사랑하였으며, 지금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를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것은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로 가능하였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15:26-27).

 

믿음의 목표는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영혼은 죄로 인해 죽었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셨다. 우리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야 하며 그래야 구원을 얻고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 확실히 들어갈 것이다. ]

 

[10-12]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이 구원에 대하여는" - 우리의 조상들은 우리가 얻은 구원과 동일한 구원을 얻지 못하였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사도는 조상들이 마치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이 고대하였다고 말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즉 여기서의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분명한 계시에 접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베드로의 이 말은 단순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13:17)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에 관한 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은혜를 제한된 상태에서 체험하였으므로 그들이 그 이상의 구원을 갈구하였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보고 나서 평온을 얻고 조용히 자기의 죽음을 예비하였을 때 그는 자기가 이전에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누가2:28-29). 그것이 바로 모든 경건한 자들이 느낌이었다.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 사도는 이 말을 (한글 개역 성경은 11절에)덧붙임으로써 그들의 연구의 성격을 지적한다.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곧 그 둘 사이에는 마치 어떤 휘장이 처져 있는 것 같아서 지금 우리 눈에 계시된 일들을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은 보다 가까이에서도 보지 못하였다. 실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아직 떠오르지 아니하셨는데도 완전한 빛으로 대낮처럼 비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도는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구원을 연구하고 살폈다는 사실에서 그 구원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의 큰 문제요, 또 특별히 뛰어난 사건임에 틀림없다. 구원의 문제는 선지서에서 핵심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은 옛날 모든 선지자들이 오랫동안 부지런히 연구해서 얻은 것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구원의 복음이 알려져 있으므로 더욱 분명히 빛을 발한다. 이와 동시에 사도는 이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확실성을 입증한다. 이는 창세로부터 그 구원이 성령의 분명한 증거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 김효성 강해: 우리가 받은 구원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은혜요 그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였던 바이었다. 또 그들 속에 역사하셨던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가 장차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였으므로 선지자들은 그것이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연구하였다. 베드로가 구약 선지자들 속에 역사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즉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 속에 역사하실 수 있었고 또 역사하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 속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가 받으실 고난과 그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다는 것은 구약성경 이사야 53장과 시편 16편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신약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서 나타나셨다. 또 이 사실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전파한 바이었다. 또 하늘의 천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을 보기를 원한 바이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들이므로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을 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