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치:아시아 대륙 중앙부의 광대한 지역.
범위는 일정하지 않으나 작게는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동(東)투르키스탄으로 불리는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와 서(西)투르키스탄으로 불리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4개 공화국 및 카자흐스탄 남부를 합친 지역을 가리키며, 넓게는 내 ·외몽골(몽골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 중국 칭하이성[靑海省], 티베트고원(高原), 아프가니스탄까지를 포함한다. 이는 강물이 외양으로 흘러나가지 않는 내륙 아시아와도 거의 일치한다.

-.네이버 백과사전-아시아의지역구분
중앙아시아 : 여기서는 넓은 뜻의 중앙아시아, 즉 ‘내륙 아시아(Inner Asia)’로 호칭되는 범위를 택한다. 보통 좁은 뜻으로는 동(東)투르키스탄과 서(西)투르키스탄, 곧 파미르 고원 서쪽의 투란 저지와 동쪽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만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몽골 고원 ·중가리아 분지 ·티베트 고원 ·카자흐스탄 평원을 합한 아시아 건조지대의 동반부의 뜻으로 사용한다. 북쪽은 시베리아, 남쪽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인도 아대륙(亞大陸)에 접하며, 동쪽으로는 대싱안링[大興安嶺]산맥과 중국 평야지역에, 서쪽은 카스피해(海)에 이르는 지역이다. 몽골, 중국의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등 시베이[西北] 지구, 티베트 고원,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의 5개 공화국이 포함된다. 이슬람 ·투르크족 ·대초원 ·건조지대 ·농경 ·유목으로 특징지어지는 지역이다.
중앙아시아에 속하는 나라 대부분은 옛소련에서 분리독립한 나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집트는 지역구분으로 할때 북부 아프리카에 속합니다.

-.중앙아시아의 지리적 정의
1) 1843년 독일의 지리학자 훔볼트(A.von Humboldt)는 동서로 만주의 흥안령 산맥과 카스피해, 북으로는 알타이 산맥과 남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사이의 광활한 지역을 최초로 중앙아시아의 지리적 개념으로 설정함.

2) 이러한 광의의 개념에 반하여, 구소련 학계에서는 중앙아시아를 슬라브계와 종족문화적으로 구분되는 튀르크인들의 집단 거주지역 즉 튀르크스탄(Turkistan)으로 규정하였음. 따라서 역사 지리적 용어인 튀르크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지역 개념을 대체하며 그 범위가 상당히 축소되어 구소련내 아시아계 국가(Asian republics) 지역 개념으로 사용되었음. 이러한 협의의 개념은 유럽에서도 소비에트 중앙아시아(Soviet Central Asia)로 받아들여져 사용되기도 하였음.

3) 구소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지리적 설정은 토양과식물 분포에 따라 북위 44도를 경계로 하여 카작스탄 남부와 구소련 중앙아시아 4개 공화국에 국한됨. - 중앙아시아와 카작스탄(Central Asia and Kazakstan)

4) 또한 광의의 개념과 유사한 의미로서 헝가리 튀르크학자 리게티(L.Ligeti)에 의해 주창된 내륙아시아(Inner Asia)라는 용어가 미국과 일본 지역에서는 혼용되어 왔음. 영국, 독일 등과 우리나라에서는 내륙아시아 또는 광의의 중앙아시아라는 용어의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음.

5) 유라시아(Eurasia)라는 용어는 지리적으로 하나의 대륙이라는 원래의 의미에서 유럽 및 아시아 전체를 넓게 지칭하나, 좁게는 상기한 중앙아시아에 헝가리등 동부유럽과 극동시베리아 지역이 추가되는 것으로 상정되기도 하며 카작스탄의 신전략적 개념으로 부상되고 있음.

6) 다양한 개념 분류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반적으로 중앙아시아의 개념은 카스피해 동쪽으로 러시아, 몽골, 중국, 아프가니스탄, 이란 및 터키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므로, 영토적 관점에서는 카작스탄, 튀르크멘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직스탄 및 우즈벡스탄의 5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포함되며, 카스피해 서쪽에 위치한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코카사스 3국, 몽골 및 아프가니스탄도 지정-지경학적 관련성으로 포괄적 의미에서의 중앙아시아로 취급될 수 있음.

7) 이러한 연관성을 반영하여 미국은 현재 5개 중앙아시아국가와 3개 코카사스국가를 포괄적으로 중앙아시아(Central Asia)로 분류하여 정책 대상지역으로 설정하고 있음
*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 북부, 홍해와 시나이 반도 일부에 걸쳐 위치한 나라. 이집트는 보통 중동지역에 포함됨.

2.중앙아시아의 역사(이슬람현황과 역사)
중앙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무슬림 집단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지난 50여 년간 중동 지역 이슬람 국가들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슬람과 중동 국가들을 거의 동일시되어 왔던 까닭에 다소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는 중동 동부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무슬림 국가는 의외로 중동에서 거리가 먼 인도네시아이다. 소아시아와 인접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 무슬림들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큰 무슬림 집단이 된다.

과거에 무슬림들과 비무슬림으로 구성된 구소련은 지구 전체의 1/6의 영토를 가진 국가로서 국제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국으로서의 위치를 지켜왔다. 그리고 구소련은 지나간 과거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빠른 템포로 국가의 구조와 사회 조직을 체계화하며 지속적으로 개혁을 단행해 왔다. 이렇듯 급속히 계속되는 사회 개혁이 필요했던 이유는 소련이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단행된 개혁이 구소련 내의 무슬림 집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과거 러시아 제국의 기독교 정교 팽창 정책과 공산 체제에서의 무신론 교육에도 불구하고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여전히 신실한 무슬림 집단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최근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과 이라크간에 일어난 걸프전쟁 때에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방 세계를 저주하며 알라신의 위대함을 부르짖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미래를 조금이나마 예견케 한다. 지금 우즈벡스탄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는 이슬람 신학교가 개설되고 계속해서 이슬람 사원이 재건되고 증축되고 있다. 갈수록 반러시아 감정이 격해지고 있는 중앙아시아에 반기독교 감정이 상승 작용을 하여 적어도 민간에는 이슬람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 제 1기(AD600-800)

불교도, 마니교도,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들로 나뉘어져 있던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 세력 확장은 호라산 총독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호라산 외곽 지역은 튀르크계 군소 부족 집단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705년 쿠타이바는 트란속시아나와 박트리아, 그리고 부하라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712년에 이르러서는 사마르칸드 지역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 진출의 결정적인 계기는 이후 발발한 탈라스 전쟁이다. 아랍 군은 중국의 중앙아시아 지배에 대해 반발한 돌궐계 부족들의 요청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주도하는 중국 군과 친 중국계 우이구르의 연합군 돌궐계 카를룩Karluk, 티베트, 아랍의 동맹군이 751년 한여름 중앙아시아 탈라스 유역에서 충돌하여 대대적인 국제전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랍 연맹 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중앙아시아 스텝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은 영구히 제거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이슬람의 위상은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 제 2기

무역로를 통한 팽창(AD800-1200) 9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이슬람 세계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주요한 두 개의 무역로를 따라 계속적으로 확장되었다.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볼가 강을 따라 형성된 무역로는 모피길(Fur Road)로 알려져 있고, 서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다른 또 하나의 무역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실크로드(Silk Road)이다. 9세기 초에 이슬람은 아랍 무슬림 상인들과 대사들을 통해서 오늘날 타타르Tatar 자치공화국이 위치한 볼가강 중류 볼가르 왕국으로 파고 들어간다. 10세기에 모피 길의 중심 지역에는 벌써 무슬림이 우세하였고, 이렇듯 모피 길을 따라서 확장된 이슬람은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는 우랄 지역 깊숙이 퍼져 나갔다.

한편 이미 탈라스 전쟁을 전후로 이슬람이 침투해 있던 중앙아시아에 이슬람 종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데는 850년경으로 현재 아프카니스탄에 위치한 당시 자불리스탄의 통치자 무함마드의 이슬람에로의 귀의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10세기 중반 이후에 당시 옥쿠스 강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페르시아계 이슬람 왕조 사만조의 중앙아시아 이슬람화 정책과 더불어 페르시아계 무슬림 상인들의 활동이 또한 스텝의 이슬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961년에는 동카를룩과 서카를룩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는데, 이 전쟁에서 이미 이전에 이슬람화된 서카를룩이 사만조의 지원을 받아 승리함으로써 동카를룩에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스풀러에 의하면 당시 아랍 이슬람 왕조가 압바스 왕조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10여만 천막의 돌궐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튀르키스탄까지 이슬람화가 이루어진 것은 그 이후 튀르크계 최초의 이슬람 왕조 카라한조(922-1211)시대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앙아시아 이슬람화는 종교적인 면보다는 문화적인 면이 강조된 다분히 형식적인 것이었다.

▒ 제 3기

몽골제국(AD1200-1300) 불교도, 마니교도,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들로 나뉘어져 있던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 세력 확장은 호라산 총독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호라산 외곽 지역은 튀르크계 군소 부족 집단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705년 쿠타이바는 트란속시아나와 박트리아, 그리고 부하라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712년에 이르러서는 사마르칸드 지역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 진출의 결정적인 계기는 이후 발발한 탈라스 전쟁이다. 아랍 군은 중국의 중앙아시아 지배에 대해 반발한 돌궐계 부족들의 요청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주도하는 중국 군과 친 중국계 우이구르의 연합군 돌궐계 카를룩Karluk, 티베트, 아랍의 동맹군이 751년 한여름 중앙아시아 탈라스 유역에서 충돌하여 대대적인 국제전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랍 연맹 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중앙아시아 스텝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은 영구히 제거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이슬람의 위상은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13세기초에 몽골제국의 부상과 함께 이슬람 세계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징기스칸 제위 시에 몽골 조정에 중앙아시아 서부에 위치한 콰레즘으로부터 민간 무역 사절단이 방문하게 되는데, 징기스칸은 사절단을 극진히 대접한 후 돌려보냈다. 그들이 돌아갈 때에 왕에게 드릴 선물을 지참하여 몽골 외교사절단이 함께 가게 되는데, 몽골 사절단 일행이 콰레즘 국경 수비대장 이날축에 의해 살해되었다. 또 당시 징기스칸은 자신의 친척들을 포함한 사절단을 파견하지만, 이 때 역시 콰레즘 왕의 지시로 몽골 사절단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슬람계 콰레즘 왕은 중앙아시아 동부 몽골리아에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는 몽골 세력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무례하게 처신을 한 것이다.

이에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 군이 콰레즘으로 진군하여 이슬람이 깊게 정착해 있던 부하라, 사마르칸드 등 중앙아시아 서부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이 때에 도망하는 콰레즘 왕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콰레즘 왕을 지원하는 아랍군을 쫓아 몽골 군은 중동까지 진격하였으며, 이슬람 제국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이슬람 왕조의 친,인척 모두를 살해하여 왕조를 근절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바그다드의 압바스 이슬람 왕조는 끝이 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소아시아로부터 중동, 중앙아시아 서부 스텝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에 정치적, 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최초의 튀르크계 이슬람 왕조인 셀축제국도 몽골군에 의해 몰락하게 되었다. 거만하고 무례한 페르시아계 이슬람 소왕국 콰레즘 왕에 의해서 자극된 몽골군의 서부 스텝 진군으로 인하여 13세기에 이슬람이 무자비하게 핍박을 받았으며, 이슬람 세계에 있어서는 전무후무한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되었다.
특히 징기스칸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에서 그 세력을 확장해 가는 몽골왕조는 계속해서 강한 반이슬람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몽골의 지배자들 중에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과 불교 신도들이 다소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3대 몽골왕과 그의 모친이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교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몽골 지배하에서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의 이슬람이 게속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수피즘의 운동이다. 수피 선교사들과 상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13세기 말엽부터 시작하여 14세기초까지 이슬람 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수피즘 운동의 영향으로 이 시대의 말기쯤에 큽착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의 몽골의 통치자들과 몽골 지배하의 튀르크계 장군들이 대대적으로 무슬림을 전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수피즘 운동은 16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동안 크리미아, 서 러시아의 스텝지역과 카스피 해, 노가이 호르드, 카작 스텝, 그리고 서 시베리아가 이슬람 세계의 한 부분이 되었다. 튀르크화된 몽골계 부족 노가이인들에 의해 전파되는 코카서스의 이슬람은 북상하여, 15세기말에는 카바르드인, 발카르인, 카라차이인과 동(東)체르케스인들에게도 전파되었다.
한편, 몽골제국 붕괴 이후에 몽골의 재창건을 꿈꾸며 일어난 티무르제국 통치 시대에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주로 수피파 무슬림들에 의해서 중앙아시아 전역에 넓게 확산되었다.

▒ 제 4기

러시아 팽창(AD1500-1900) 1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러시아제국은 완전히 무슬림화된 큽착 지역의 몽골 세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16세기 중반에 이미 동과 서로 크게 팽창하였다. 러시아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무슬림들을 무참히 핍박했는데, 무서운 이반이라고 알려져 있는 러시아제국 통치자 이반 4세의 무자비한 이슬람 핍박은 유명하다.
몽골제국 붕괴 후에 몽골제국의 튀르크계 장군들에 의해서 세워진 카잔공국, 아스트라칸과 서부 시베리아의 주요 무슬림 영역들은 17세기 말엽까지 러시아제국에 의해 완전히 합병되거나 정복되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17세기에 북부 코카서스(카프카스야)까지 전진하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 내의 무슬림들은 초기 몽골-튀르크 집권자들에 의해 정착했던 주요한 도시들과 강 주변의 옥토로부터 몰아내어졌다. 러시아 사람들에 의해서 채용된 소수의 튀르크계 장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튀르크계 무슬림들은 러시아인들에 의해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장기화된 러시아의 집권 하에서 많은 무슬림들이 기독교정교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것이 이반 4세로부터 가장 잔인한 핍박을 받았던 카잔공국의 튀르크계 타타르인들이다. 지금도 많은 타타르인들이 러시아정교를 믿고 있다.

한편 16-17세기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황제(무서운 이반)와 제 1 로마노프왕조의 이슬람 정복 시기에 러시아인들은 사회계층을 귀족, 종교지도자, 일반인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무슬림 귀족 계층은 기독교를 즉각 선택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와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기에 저항한 이들은 제거되었다.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은 도시에서 축출되어졌고 이슬람 사원은 파괴되었다. 1565년에는 수많은 대중들에게도 기독교 개종의 계획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자들은 짜르의 식민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러시아제국의 팽창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활동은 크게 제한을 받지 않았다. 특히, 18세기 후반 러시아 여왕 캐서린 2세의 통치 기간 중에는 오히려 이슬람은 발전하고 보호되었다. 선임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캐서린 2세는 중앙아시아를 문명화하는데 있어서 이슬람은 러시아정교보다 더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종교로 여겼으며, 유목민족의 정착화 정책에 있어서의 이슬람의 역할을 높이 인정하였다.

캐서린 2세는 새롭게 정복한 이슬람계 식민지 크리미아(크름 반도)에 대해서 파격적인 정책을 폈는데, 그녀는 이곳의 이슬람교도들에 대해서 그들의 소유권을 보호하고, 러시아인들과의 동등한 법적인 대우를 보장하였으며, 또한 종교 활동의 권리들을 보장하였다. 이 때에 크리미아 내의 모든 이슬람 사원에서 금요기도 시간에 이슬람 사회의 지도자 오스만제국 술탄 칼리프의 이름이 불리어지는 것조차 허락할 정도였다. 크리미아의 토착 상류층은 기독교 선택을 강요받지 않았으며, 사회적 계급과 특권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은 세력과 부, 그리고 세금 감면의 성직자 혜택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들은 역시 크리미아인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캐서린 2세의 통치기간 중 크리미아는 러시아인, 독일인, 그리스인, 발트인 등의 이민자들로 가득 찼고, 좋은 토지와 재산들이 비튀르크계 기독교인 귀족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1783년부터 1893년까지 백만이 넘는 크리미안 타타르인들과 크리미안 노가이인들의 거의 전부가 생활고로 인해 동족의 나라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하여 갔다.

한편 1782년에 캐서린 2세는 오렌부르그에 이슬람연합회를 창설하였다. 이슬람연합회의 의장은 러시아제국 내무대신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의장의 권한은 크리미아와 카작 스텝을 제외한 러시아제국의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시베리아 등 러시아 전 지역에 미칠 만큼 강했다. 캐서린 2세는 특히 당시 부유층으로 알려진 무슬림 볼가 타타르 상인들의 상업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녀는 선임 통치자들이 바쉬코르트와 시베리아, 카작 스텝에 적용하였던 모든 반이슬람적인 제한 조건들을 철폐하였고, 이슬람이 강하기로 유명한 비슬라브계 튀르크계 식민지 카잔 타타르의 상인들의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중요한 몇몇 계약들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튀르크계 타타르 상인들은 러시아와 러시아제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 상업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당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파간 신앙을 소유했던 바쉬코르트와 서시베리아, 카작 스텝 등지에 이슬람 사원과 이슬람학교를 세우고 이슬람을 전파하는 이슬람선교사로 크게 활약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카잔타타르인들, 특히 그들 가운데 상인들과 이슬람 승려들은 러시아제국 이슬람 사회의 확고부동한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캐서린 2세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그동안 형식적으로 이슬람화되어 있었던 카작, 바쉬코르트, 노가이인 등 튀르크계 유목민들과 반유목민인들 사이에서 이슬람이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한편 18세기 말기에 북 코카서스 지역에서 지금까지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에서 그 영향력을 크게 발하고 있는 순니파 수피계 낙쉬반드 포교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낙쉬반드의 출현으로 러시아제국 내에 튀르크계 부족들을 비롯한 비슬라브계 부족들 가운데 이슬람이 급격히 팽창하게 되어 러시아제국 이슬람 역사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 수피파 포교자들이 바로 1784년에서 1878년 사이에 러시아 정복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소위 무리드(Murid)운동이라고 알려진, 북코카시아 산지인들의 저항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체첸인들, 즉 서(西)체르케스인들이 호전적인 무슬림들이 되었는데, 오늘날까지 그들 후손들은 여전히 그러한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코카서스 정복을 끝낸 곧이어 1855년부터 중앙아시아 정복을 시작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원주민들을 러시아인화하거나 그 영토 내에 기독교정교를 바탕으로 한 러시아 문명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가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옴에 따라 러시아의 무슬림 정책에 다소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슬림들에게 러시아정교와 문화의 영향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니꼴라이 일민스끼라는 카잔 주재 러시아 선교사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는데, 후에 이러한 문화정책이 '일민스키 체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19세기에 있었던 무슬림 개혁주의 운동, 즉 이슬람 근대화 운동은 이러한 러시아의 문화정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 제 5기

혁명시기와 소비에트로의 인계(AD1905-1928) 1905년 러시아제국에서 종교자유를 선언하는 칙령이 발표됨에 따라 대다수의 튀르크계 이슬람 민족주의 집단들이 이슬람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1928년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소련 공산 정부의 반이슬람 정책들로 인해 러시아-소비에트제국 영토 내에서의 이슬람 확장은 중단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티무르)
1398년 9월, 조선왕조에서는 이성계가 그의 둘째 아들 방과[定宗]에게 양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바로 그 시기, 인도의 서북부 펀자브지방에는 난대없는 침입자가 등장, 이 지역을 휩쓸더니 다시 이해 12월에는 델리에 침입, 이 곳을 점령하고, 약탈과 방화,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다시 포로로 잡았던 10만명 이상을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육의 잔치를 벌리고,... 그 중 쓸만한 기술자와 보물만을 챙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성계가 왕위를 그의 아들에게 양위한 것은 강비(康妃)와의 사이에서, 늦게 얻은 두 아들(芳蕃, 芳碩)과 사위(경순공주 駙馬 李濟),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개국공신 정도전 등이 다름 아닌 그의 다섯 째 아들 방원(태종)에게 참변을 당하자(제 1차 왕자의 난) 이를 비관해서 였지만, 델리를 침범 약탈했던 이 난폭한 침입자는 몽골 왕실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티무르(帖木兒/1369 ∼ 1405), 그의 목적은 약탈.....이 기막힌 약탈사를 기야스 웃딘 알리 야즈디(Ghiyath-ud-Din ali Yezdi)라는 이란의 역사가를 시켜 이 자랑스러운(?) 일을 기록케 하였는데, "인도원정일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티무르왕조의 역사 원전이 되었습니다.

몽골계 남자 이름에 티무르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지요. 티무르가 투르크, 몽골 어계(語系)에서는 철(쇠/鐵)을 의미하고, 이는 곧 힘과 용기를 상징하기 때문에 초원을 무대로 유목 기마 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이름을 주술적(呪術的), 기복(祈福)의 의도에서 많이 붙였다고 합니다. 이런 의도와는 관계 없이, 몽골의 지배하에 있었던 고려후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에도 이 몽골식 이름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많이 쓰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는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은 빠앤 티무르(伯顔 帖木兒), 이성계의 조부 이춘(李椿/度祖)은 빨앤 티무르(勃顔 帖木兒)..., 델리를 약탈했던 이 무법자에게 붙여진 이름은 이랑 티무르(철의 절름발이/그가 어느 전투에서 오른다리를 다쳤다고 함), 그가 돌아간 곳은 그의 본거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입니다.

칭기즈칸에 의해서 성립(1206)된 몽골제국은 중앙아시아 일대 초원지대를 누비다가, 그의 손자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세우고(1271) 그 후손들에 의해서 약 백년간 중국을 지배, 그러다가 홍건적의 두목 주원장이 명을 세우고, 서달(徐達)을 대장군으로 삼아 20만의 병력을 보내어 원의 수도 대도[베이징]을 포위하자, 원의 순제(順帝)는 그의 비빈과 황태자를 데리고, 내몽고 상도로 도망한 것이 1368년, 이로써 몽골의 중국지배는 끝났지만, 서아시아 일대에는 칭기즈칸의 다른 후예들이 세운 칸(干, 可干)국 사이에 물고 뜯는 혈전으로 흥망 성쇠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하고,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날뛰던 티무르가 바르프에서 나라를 세운 것은 1369년, 이듬해 사마르칸트로 본거지를 옮겼다고 하는데, 나라를 세웠으면 나라 이름이 있어야 되지만,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티무르가 세웠다고 해서 편의상 티무르 제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로 되어 있는 이 사마르칸트가 고대에는 실크로드의 교역기지로 수 당 시대 중국에서 강국(康國)으로 불렀고, 이곳 주민들이 중국 서쪽에서 집단 생활을 하면서 상업에 종사, 강(康)씨 성(姓)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사의 난(756)을 일으켰던 안록산의 원래 성이 강씨였고, 이것은 그의 조상이 이 사마르칸트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들에게 더욱 관심을 높이는 것은 그곳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도 보인다고 합니다.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고,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약탈을 일 삼았는데, 이로써 중앙아시아 일대에는 그의 침략을 면하기 위해서 갖은 묘안을 다 짜내어야 했고, 당시 서아시아 일대의 패권을 잡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의 바야지트 1세가 변경을 침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원정, 1402년 7월 앙카라전투에서 바야지트를 격파하고 그를 포로로 잡는 기염을 토하였으며, 이로써 중앙아시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티무르는, 사절(使節)을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하여 그의 위력을 과시하였습니다.

1405년 70세의 나이에도 아랑곳 없이 다시 침략의 말머리를 동으로 돌려, 명(明)나라 정복 길을 재촉하였는데, 그러나 정복 길에 오른지 얼마 후, 오트라르에서 병사,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당시 명나라에서는 정난의 변을 치루고 3대 성조 영락제가 남경에서 즉위 한지 3년, 욱일승천(旭日昇天) 하던 시기로서, 영락제 역시 왕성한 정복욕으로 1410년 이후 친히 몽골을 정복한 것만도 다섯 번, 남정북벌(南征北伐)로 중국의 영토를 한 없이 넓혀 갔는데, 두 정복자가 마주쳤다면, 역사의 서술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나 티무르의 사망으로 이 세기의 대회전이 될 뻔했던 일은 없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명의 영락제가 그랬듯이 정복자 답지 않게, 그도 학자, 문인을 보호하고 산업을 장려하였다고 합니다.

티무르가 죽은 후 그의 손자 칼릴샤(哈里沙)가 뒤를 이었으나, 폭정으로 폐위되었고(1409), 문무를 겸비한 티무르의 제4남 샤로흐(沙哈魯)가 부왕 때부터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서부 헤라트의 태수로 있다가, 내란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자기의 본거지 헤라트를 수도로 정하고, 이란 일대를 지배하는 왕조를 재건하여 38년 간 통치하였는데, 이때가 티무르왕조의 전성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한때 마와란나하르를 영유하기도 하였으나, 거듭된 내전으로 1500년 우즈베크족에게 멸망하였습니다.

3.중앙아시아의 종교문화
-.인류 문명의 근원지인 중앙아시아

인류 문명은 지금으로부터 2만 년~1만 년 전 사이에 생겨나서 오늘날과 같은 문화로 발달되었다.
지금까지는 인류 문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명확하게 제시된 자료가 없으나 인류의 문명은 지구의 중심인 중앙아시아의 에베레스트산에서 시작되었음을 정확히 밝힌다. 이곳은 우리 한민족의 하늘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4천세계로 구천현녀께서 관리하던 곳이다. 중앙아시아의 히말라야 산맥으로 와서 다시 한텡그리산에서 천산산맥으로 내려갔다. 천산은 한인께서 최초로 한국을 세우신 곳으로 그 한국의 12지국 중 마지막인 수밀이국이 점차 세력을 넓히고 옮겨가서 오늘날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발흥시키면서 세계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원전 3500년경에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그 뒤를 이어 인도의 인더스 문명과 중국의 황하문명이 4대 문명 발생지로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이 4대 문명의 4대 발생지는 지구의 북반구에 위치해 있고 큰 강을 끼고 있으며, 기후가 좋고, 비옥한 옥토를 지닌 지역들이다. 문명은 산맥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오다가 강을 따라 발전되어 오면서 그 화려한 꽃을 피웠다. 중앙아시아는 인류 문명과 문화, 각 종교의 도래지이며, 에베레스트산이 지구의 중심지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동, 동남, 서쪽으로 인류의 문명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동쪽으로는 우리 민족이 천부사상으로 천손자손의 뿌리를 이어 오고, 동남쪽으로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로 이동해서 불교문화가 형성되었다. 서남아시아에서는 유대교, 기독교, 천주교 등이 형성되었다. 기독교는 점차 유럽으로 퍼져나가 아메리카, 아프리카로 다시 6대륙으로 파생되어 세력을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다종교는 다시 우리나라로 밀려들어 모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빠르고 깊숙이 삶에 침투되었다.

-.중앙 아시아 원시종교
중앙 아시아의 원시종교로 정령숭배와 토테미즘, 천신사상, 샤머니즘이 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가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겉으로는 이슬람이지 내면적으로는 토착신앙, 즉 무속적인 것과 조상숭배적인 요소가 많다. 이런 요소들 가운데 샤머니즘 즉 무속은 그들의 신앙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샤만 즉 무당이라는 말은 두 가지 분명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샤만은 영적인 지도자로서 영계로부터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계시를 믿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특성은 세계의 대부분 종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슬람교, 불교, 유대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등에도 이런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샤만은 다분히 카리스마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샤머니즘은 주술과 무속행위를 위한 특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샤만은 매우 신경질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무속행위에는 드럼과 템버린 등의 악기가 동원되며 무속적 음악이 불려진다. 그들은 또한 불을 사용하여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영들을 통제하며, 영들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그들은 굿을 통해서 악귀를 추방하거나 병자를 치유한다. 이러한 일을 하는 샤만은 중앙아시아와 남부 시베리아에 널리 퍼져 있다.

카작의 샤만을 박샤(bagsha)라고 부른다. 다른 중앙 아시아의 튀르크족들 가운데 박샤는 노래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카작의 박샤는 신경성 환자들이나 열병 환자들 그리고 류마티즘이나 마비 증세를 가진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병은 진(jin) 즉 귀신들이 가져다주는 것이다. 박샤는 주술을 통해서 자신을 황홀경에 몰입하게 하여 자신의 영혼을 악령들과 접촉하게 한 다음, 악령들로 하여금 박샤 자신의 의지에 굴복하도록 강요하여 병을 치료한다.

그들은 악한 신과 좋은 신 두 가지 종류의 귀신들이 있다고 믿고 있다. 좋은 귀신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나쁜 귀신들은 악을 행한다. 박샤들은 자신들에게 친숙한 혹은 개인적인 귀신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신이 죽을 때에 자신의 계승자에게 그 귀신을 넘겨준다. 대부분의 경우 계승자는 자신의 아들이 된다. 한편 카작인들과 키르기즈인들 사이에는 샤만 이외에 물라(mullah)가 있다. 물라는 이슬람 종교 승려로서 물라가 샤만과 다른 것은 샤만은 직접적으로 영들과 접촉하여 병든 자를 치유해 주는 반면, 물라는 병든 자를 위해 알라신에게 빌어 알라신의 힘으로 환자를 치유한다.

조상 숭배 의식이나 조상들의 영에게 제사 드리는 일은 중앙 아시아 원시종교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조상신들을 숭배하는 것은 샤만(무당)의 활동과 더불어 우리 나라의 고대 신앙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는데, 온곤(ongon)이라고 부르는 조상신 혹은 조상들의 영을 일컬어 카작인들은 아우락(aurak)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전병,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경우, 기근, 재해 등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샤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조상신께 부탁하여 어려운 일이나 고통에서 벗어난다.


-.종교문화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등장한 중앙아시아 5개국은 소비에트 체제를 경험한 '이슬람 문화'를 지닌 국가들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9.11 사태 이후 발생한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의 전쟁 당시에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이 미국의 공격행위를 비난했던 것과는 다르게,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비슷한 '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쟁기지 역할을 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던졌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물론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 약속이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 중동과는 다른 성격의 이슬람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글에서는 독특한 모습을 지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문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혹시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이슬람 문화를 배경으로 지녔다는 사전 지식을 가지고 중앙아시아 지역에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들은 공항을 나서자마자 자신의 정보가 잘못되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흔히 이슬람 문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차도르를 쓴 여인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기도시간을 알리는 사원의 스피커 소리도 들을 수 없으며, 도시 내에서는 오히려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 건물이나 루터회 혹은 기타 다른 종파들의 교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동이나 아프가니스탄이 스스로 '이슬람 국가'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반해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내세우는 것도 그 차이점일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점을 학자들은 '생활 이슬람'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생활 이슬람'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생활의 규범이 되어주는 이슬람'이라는 것이다. 즉,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종교적인 역할보다는 생활 규범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한국에서의 유교의 역할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고, 많은 생활 규범을 유교적인 바탕에 두고 있는 유교 문화권에 속하지만, 자신의 종교가 '유교'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비슷한 현상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이슬람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는 자신들은 '모슬렘'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알라를 믿고 있지는 않다는 모순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날 수 있는데, 이들은 이슬람을 종교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전통문화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모슬렘들은 식사 후에는 신에게(혹은 조상에게) 반드시 감사기도를 드리고, 차를 운전하다가도 사원이나 무덤을 보게 되면 핸들을 놓고 기도의 행위를 하며, 금식 기간에는 금식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이는 종교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조상들의 훌륭한 전통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이슬람'의 전통은 소비에트 체제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발생했을 당시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의 식민지였는데, 혁명을 계기로 이슬람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세력과 소비에트 체제를 형성하려는 세력의 대결이 벌어졌었다. 이슬람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세력은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들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소비에트 중앙정부는 급진 이슬람 세력은 탄압하면서 전통 이슬람 민족 문화는 보존한다는 이중정책을 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중정책은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나브루스(새해가 시작되는 날)나 하이드(한달 동안의 금식 후의 축제) 같은 이슬람 축제를 전통문화의 부흥이라는 명목 아래 부활시켰고, 이슬람 사원의 재건축이나 성지 순례의 참여를 정부 주도로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을 '와하비'라고 부르며 경계하고 있으며,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은 (사실이든 아니든) 모두 '와하비'라는 명목 아래 처벌되고 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정책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부의 이러한 견제가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이 큰 역할을 하였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은 잘 살던 국가가 이슬람 급진주의자의 장악으로 순식간에 후진국으로 바뀌었으며, 인권을 무시하고 주변 국가를 위협하는 위험한 나라로 비춰졌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급진주의자들이 언제 자신들의 국가마저 위협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발생한 미국과의 전쟁에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당연히 미국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한편, 중앙아시아 이슬람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매우 미신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전통 이슬람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이 지역의 이슬람 문화가 매우 이단적이라면서 불만을 토론하고는 한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전통 이슬람 지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점치는 행위를 매우 좋아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거리에는 새나 타로 카드를 이용해서 점을 보거나 손금이나 별자리를 보아주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이들 앞에는 항상 손님들이 줄을 서 있는 형편이다. 또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에는 유명한 점쟁이들을 찾아가는데, 이들을 만나려는 사람들은 너무 많아서 한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만나기가 힘들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의 경우에는 이러한 점을 치는 행위가 공식적인 의료활동의 영역에까지 미친다. 알마티의 한 민간 병원은 정부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집시들이나 점쟁이들이 의료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환자를 받아 점을 쳐서 무슨 병에 걸렸는지를 알아내고 처방이나 치료활동까지 하고 있다.(사진1 참조) 이들 민간요법 의사들은 2년에 한 번씩 신통력에 대한 자격 시험을 치루어 의사 자격을 유지한다고 하는데, 이들에게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로 병원은 항상 붐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또한 주술적인 의미를 지닌 부적을 지니기를 좋아한다. 상점에 가면 벼락맞은 뽕나무나 대추나무로 만든 목걸이를 파는데, 자신이 소원하는 것에 따르는 코란의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구입해서 항상 지니고 다닌다. 이러한 부적은 종이로 된 것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이 태어난 연도의 돈을 행운을 위해 지니고 있는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이와 같이 '특이한' 이슬람 문화라고 해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이 종교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중동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서는 무척이나 적은 확률의 사람들이 금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그 중 하루 다섯 번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매우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종교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장례식이나 할례, 혹은 결혼이나 탄생 같은 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이슬람 사제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성지순례를 소망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사진2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지역에 있는 샤히진다 묘. 메카와 메디나로 성지순례를 다녀오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곳을 세 번 방문하면 성지순례를 한 것과 같다고 생각되어진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대로부터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 불교 등 고대 세계의 거대 종교들이 꽃을 피웠었고, 결국은 이슬람교가 정착을 하여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토착 샤머니즘에 고대 종교들의 색채가 다양하게 녹아들었고, 소비에트 체제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은 소위 '이단적인' 이슬람의 모습을 띄고는 있지만, '이슬람 문화'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전통 문화를 이루는 중요한 배경으로 이해될 것이다.

내용출처 : [기타] http://segero.hufs.ac.kr/scripts/article_view.asp?JNAME=IANR&ISSUEID=114&SECID=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