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왜성(蔚山倭城)은 울산광역시의 시가지에 남아있는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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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의 울산 부근. 물길이 갈라지는 부근에 울산왜성의 위치한 島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울산 지역에 일본군이 축성한 성이기 때문에, 울산왜성이라 불린다. 축성 당시 조선명나라의 연합군은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도산성(島山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조선 후기에는 모습이 시루와 같다고 하여 증성(甑城)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으며, 이에 따라 주변 마을도 증성리라고 불렸다.

울산왜성의 또다른 이름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울산학성(蔚山鶴城)이다. 조선 정조 때에 저술을 시작하여 고종 때에 간행된 《울산읍지》에 이 성은 신학성(神鶴城)이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으며[1], 이를 통해 이 성을 학성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조선 후기 때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도 이 성의 정식명칭을 울산학성으로 정하였고, 이곳에 공원이 조성될 때에도 학성공원이라는 이름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성과는 별개로 고려 때에 축성된 학성이 따로 존재하였다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여, 학성이라는 명칭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2] 이러한 견해에 따라 1997년에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때에는 정식명칭을 울산왜성으로 정하였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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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를 그린 일본의 병풍화. 병사들이 둘러싼 성이 울산왜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연합군에 의하여 충청도에서 진로를 가로막힌 일본군은, 1597년 9월 16일 한반도의 남해안으로 군사를 물려 방어에 나섰다.[3] 이 때에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성곽을 건조하였다.[4] 울산왜성 역시 이 때에 건조된 성곽 중의 하나로,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축성이 시작된 것은 1597년 10월 혹은 11월로 추측되며, 오타 가즈요시의 감독 아래, 모리 히데모토아사노 요시나가주고쿠 지방다이묘들과 가토 기요마사의 병사 일부가 공사를 맡았다.[5] 성벽의 자재 중 일부는 병영성과 울산읍성을 허물어 조달하였다. 공사가 마무리된 후, 같은 해 12월 4일에는 서생포왜성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지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일본군의 방어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6] 울산왜성의 위치는 정유재란 당시 최전선이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울산성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울산왜성을 거점으로 농성한 가토 기요마사는 두 전투에서 모두 연합군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1598년 11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철수하게 된 일본군이 성에 불을 질러, 성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후에도 한동안 조선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되었으며, 1624년부터 30년간은 군함 생산기지인 전선창(戰船廠)이 위치하기도 하였다.[7]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에 의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3년 1월 21일에는 울산학성(蔚山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97년 1월 1일에 일제지정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에 따른 등급조정으로, 다른 왜성들과 함께 사적에서 해제되었다.[8] 이후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면서, 공식명칭도 울산왜성으로 고쳤다.

현대에 와서 공원이 조성되고 도심이 확장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으나, 혼마루의 성벽과 강가의 일부 흔적에서 여전히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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