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

 

 

0958920a6ba88208f519f0e63ad699af.jpg대한예수교장로회 공의회가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교의 설립을 1901년 5월 15일 결의함에 따라 평양 대동문 옆 마펫(한국 이름은 마포삼열:馬布三悅)선교사 자택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가 개교되었다. 초대교장으로는 마포삼열 박사가 취임하고, 방기창, 김종섭의 두 학생이 첫 입학생으로 입학하다. 


제1회 졸업생으로 제1회 졸업생 서경조(徐景昨), 한석진(韓錫普), 양전백(梁甸伯), 길선주(吉善宙), 이기풍(李基豊), 송린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7명을 1907. 9. 17일 배출하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합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키로 하고, 1907넌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선교사 33명, 한국인 장로 36명. 찬성원(캐나다와 호주 선교사) 9명. 계 78명이 모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노회를 조직하였는데 목사 안수를 받아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북장로회 단독의 신학교로 출발했으나 1906년에 이르러서는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와 연합으로 학교를 운영하여 명실공히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 신학교로 성장했다. 1925년 10월 20일  제2대 교장으로 라부열 (R.L. Roberts) 박사가 취임하여 오다가 1938년 신사참배문제가 제기되고 총회가 이를 가결하게 되자 신학생들과 학교운영을 맡고 있던 선교사들이 이에 반대하고 나서는 등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1938년 9월 20일 2학기를 개설하지 못한 채 폐교되었다.

 

이후 1945년 9월 8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32회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인준된 조선 신학원이 교수들의 신학사상이 자유주의화 되어가자 제 35회 총회는 1948년 6월 서울 남산에서 개교하여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한 장로회신학교를 인준하였다.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가 취임하다.


평양신학교는 이후 교단의 분열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신대학교, 고신대학교 등의 전신이 되었다.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http://blog.daum.net/7gnak/15718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