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 전 사도들을 '베다니'로

- 누가복음 24:50~53 -

샬롬선교회 


[누가복음 24:50~53] “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누가복음 9:51)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아페시스(용서)의 여정의 최종 지점은 '하늘로 올리우심'이다. 십자가도 부활도 그 통과점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승천은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에서 '하나님(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는 것'이다. 그 자리는 모든 지배, 권위, 권세, , 주권 위에 있는 자리이며, 모든 이름 위에 높이 올려지는 자리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예수의 이름'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통치하신다. 머지않아 그곳에서 이 땅에 재림하실 텐데, 그때 재림의 장소는 승천하신 곳이다. 그 장소는 '감람산'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이다.

 

누가복음 24:50~51“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반부의 '떠나가셨다'는 것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앞부분에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가셨다'고 되어 있는데, 왜 예수께서 사도들을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실 필요가 있었을까? 그 필연성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 이번 '상고'의 핵심이다.

 

1. '베다니'인가?

 

이 부분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일 수도 있지만, 사실 여정의 마지막인 '승천'을 앞두고 사도들을 굳이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셔서 그곳에서 승천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新改訳에서는 '베다니까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다른 번역을 비교해 보면 상당히 미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어쩌면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다.

新共同訳'베다니 부근까지'

口語訳柳生訳フランシスコ会訳岩波訳'베다니 근처까지'

山岸訳(エマオ)'베다니의 방향으로'

バルバロ'베다니로'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모두 '베다니'라는 고유명사는 공통적으로 '베다니'로 되어 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그곳을 본거지로 삼아 여러 번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약 2.8km 떨어진 올리브 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마가복음 11:1, 누가복음 19:29). '베다니'라는 지명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여기서는 특별한 설명은 없지만, 예수님은 그곳으로 '데리고 나가심'으로써 사도들에게 그 의미를 깨닫게 하려고 하셨던 것 같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그 일거수일투족에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반드시 어떤 계시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굳이 사도들을 베다니로 데리고 나간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2. 베다니에는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가 있었다.

 

누가복음 10:38에는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마르다라는 여인에 의해 기꺼이 환영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선교 사역이 점점 거부당하는 가운데 이 '환영'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예수님을 기꺼이 집으로 맞이한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세리장 삭개오'이다. 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한 눈에 보려고 하는 그를 예수님은 눈여겨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기로 하였으니"(누가복음 19:5~6)라고 말씀하시자, 삭개오는 서둘러 내려와서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축복을 주셨다. 후대에까지 전해지는 놀라운 사건이 그곳에서 일어났다.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마르다의 집에도 주님과 놀라운 관계가 생겨났다.

 

3. 베다니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가 있었다.

 

성경은 베다니의 마리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사도들이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장차 죽어 장사 지낼 예수님에게 미리 장례를 위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바르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가 실제로 죽어 무덤에 안치된 후에도 다른 마리아들처럼 예수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그녀의 깨달음은 놀랍다. 그만큼 그녀의 귀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동생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마리아의 '듣는 것'에 대한 헌신성은 그녀의 삶의 방식 그 자체였고, 결국 그 라이프스타일은 사도들(제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도행전 1:14에서 사도들은 다른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전념'했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는데, '전념하다'라는 동사는 '프로스카르테오' προσκαρτεω이다. 이 동사는 끊임없이, 변함없이, 꾸준히, 꾸준히, 열심히, 그리고 계속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깨어서 확실히 실행한다는 강한 의지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한곳에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한 가지 일에 전념(專心)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마리아 스타일'이다.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비밀을 풀어주시는 것이다.

 

'베다니'의 어원적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무화과나무 집', 혹은 '고민의 집', '가난의 집'으로도 알려져 있다.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헌신성은 구약시대부터 이어져 온 '가난의 영성'이 가져다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예수님 자신도 사무엘을 낳은 한나를 비롯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영성의 흐름,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가 물려받은 영성의 흐름 속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 영성은 '가난한 자의 영성'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도 그러한 영성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초대교회)에게도 이 '가난한 자의 영성', '마리아 스타일'이 흐르게 된다.

 

4. 베다니는 요한이 세례를 베푼 곳이다.

 

올리브 산 동쪽 기슭에 있는 베다니와는 별도로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요단강 동쪽에 '베다니'라는 곳이 있었던 것 같다(요한복음 1:28/3:26/10:40). 요한이 여리고 지역에서 선교를 했다는 것은 군중들이 유대 전역과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마가복음 1:5 참조). 오늘날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전승상의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동남동쪽으로 약 9km 떨어진 '엘 마가타스'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그곳은 기독교 초기에는 요르단 강 동쪽에 위치했지만, 후대에 이르러 강을 건너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서쪽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어쨌든 '베다니'는 어떤 의미에서 상징적인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요한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사람들에게 회개를 설교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은 세례 요한과 닮은 구약시대 선지자 엘리야가 승천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강을 건넌 곳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으로 죽어갈 때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10:40). 그곳도 사실 '베다니'라고 불렸던 곳이다(요한복음 1:28). 그렇다면 '베다니'는 매트릭스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베다니'라는 행성 주위를 여러 위성들이 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부활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처럼 '베다니'는 생명을 회복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사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회개가 일어난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나이다'라고 외치게 된다. 그 외침을 들으신 주님은 다시 이 땅에 참된 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요약(베다니로 '데리고 나가심)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베다니'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매우 예언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베다니'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본 뜻, 즉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회개를 가져오는 상징적인 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그곳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것을 암시하는 '데리고 나간다'는 말씀이 바로 누가복음 24:50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한다.

 

https://meigata-bokushin.secret.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