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자랑스러운 복음을 전하다"

- 로마서 1:15-17 -

샬롬선교회

[로마서 1:15-17]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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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이 바울의 소원은 '갚아야 할 빚을 지고 있다'는 빚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공동역은 이 구절을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 번역하고 있다. 바울의 복음 선교의 사명은 이 강렬한 '감당해야 할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바울이 "헬라인이나 미개한 자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나"(이것은 히브리인 특유의 수사법으로 '모든 사람, 모든 사람에게'라는 의미)라고 기록했듯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포함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든, 지혜가 없는 사람이든, 타고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진리이다.

 

예수님이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요구하고 많이 맡은 자는 많이 요구하리라"(누가복음 12:4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은 바로 그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이다. 이 바울의 빚짐, 책임감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의식은 성령께서 촉발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꼭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말하는데,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말 속에 '선교''교육'이라는 교회의 두 가지 사역의 양대 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빚짐의식과 동시에 또 다른 이유를 들고 있다. 그것은 16절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확신이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소극적인 표현이다. 그것을 적극적인 표현으로 바꾸려면 어떤 표현이 어울릴까? 그것은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식이다. 바울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γάρ)을 두 번이나 사용하여 그 이유를 설명한다. "복음은 ...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17절도 마찬가지로 접속사 ''을 통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고, 그 의는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이번에 다룰 16~17절에는 '복음', '믿음', '구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의'와 같은 중요한 어휘들이 정리되어 있다. , 이 두 구절은 로마서 전체를 요약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노라)

 

바울은 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을 분명히 표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어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수치스러운 죽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죽음에서 부활도 본래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1) 복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말한다. 이 편지가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을 생각하면 '유대인을 비롯하여 헬라인에게도'라는 표현이 의아하지만,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적 수사법이라고 이해하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이방인인 헬라인(로마인도 포함)보다 유대인이 먼저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복음을 접했기 때문에 그것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로마서 9~11장에 '접붙임 사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넘어지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있지만,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될지라도'(고전 1:23)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 복음은 걸림돌이 된다.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시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표적'은 메시아로서 이방인의 지배에서 구출해 줄 현실적인 메시아를 의미한다. ,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기대와 동떨어진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 지혜(최고의 가치관)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헬라인은 이방인의 대표이다.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존재를 (가장 가치 있는 존재)으로 여기는 자에게 복음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만들 뿐 아니라,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약한 자, 보잘 것 없는 자, 하찮은 자, 멸시받는 자, 아무것도 아닌 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신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의 힘과 능력을 찬양하는 이방인의 문화에서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세상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이야기도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이야기였다. 사도행전 17:16~34에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중심 도시인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적 배경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그것도 유대적 가치관과 다른 헬라적 가치관의 중심도시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실존적 심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혹은 '생존과 방어를 추구하는 마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심리를 배경으로 이야기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 모든 민족, 모든 역사, 모든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회개를 명령하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조롱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듣자"고 말하면서 바울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바울은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류된 형태로 끝났다. 이것은 전도의 실패이다. 이를 바울의 '아테네 쇼크'라고 한다.

 

(2) 바울의 '아테네 쇼크'

 

바울의 '아테네 쇼크'는 복음 선교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다. 그래서 복음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쉽다. 부활이라는 사실은 가볍게 이야기하고(부수적인 이야기로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랑이나 평화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실수나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여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2.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의 첫 번째는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원어로 '두나미스 세우-'(δύναμις θεοῦ), 즉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이다. 복음에는 그런 잠재적 힘이 있다. 노벨 박사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 그리스어 '듀나미스'이다. 어떤 단단한 암반도 부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세상에서는 힘이 있는 자가 승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을 추구한다. 그 힘은 다양하다(지력, 능력, 재력, 권력, 기술력, 통찰력 등).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어떤 교육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복음에는 그 능력이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따라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항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내면에는 어떤 노력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죄의 힘이 원리(법칙)처럼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7:15~24]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24절의 절규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죄의 원리가 아니라 성령의 원리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근차근 배워나가겠다. 여기서는 복음에는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다이너마이트)이 역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능력이 모든 믿는 자에게 역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예외는 없다. 이 복음의 능력을 얻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역사할 수 없다.

 

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에서 중요한 어휘이다. 왜냐하면 ''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에 따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이다.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로마서 3:22)뿐이다.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

 

'''구원'과 동의어이다. 복음에는 ''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계시되어 있다.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바울은 편지 속에서 가르쳐 간다. 복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피의 구속, 화해, 예수님의 부활, 생명의 영에 의한 원리(율법), 구원의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몸의 구속, 심판, 영원한 생명 등이 포함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특히 '몸의 구속'은 미래의 일이지만, 믿는 자는 그 소망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그 소망은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 '압도적인 승리자'(로마서 8:37)가 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참여한 자는 복음(=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예수님)을 자랑으로 여기며 그분을 높이고 그분 안에서 살며 그분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선교사역은 교회의 중요한 사역이다.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선교와 교육은 교회의 양대 축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야 했던 것이다.

 

+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디모데후서 4:1~4]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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