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 로마서 1:1 -

샬롬선교회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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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A.D.57년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기독교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왜냐하면 신학, 철학 분야에서 큰 공헌을 한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이 편지의 로마서 13:11~14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1:17 말씀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눈을 뜨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재발견하여 개신교회의 초석을 다졌다. 또한 18세기 영국을 구원했다고 평가받는 존 웨슬리는 어느 집회에서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고 거듭났다. 그로 인해 영국에 새로운 영적 생명이 부어지고 부흥이 일어났다. 일본에서는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각각 이 로마서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로마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얻었다. 참고로 저의 외동딸도 우리 교회 개척 1년 차에 가정예배에서 로마서를 공부하던 중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 편지는 성경 전체가 투영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중요하고 근본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기대감을 가지고 맛보고 싶은데, 도대체 누가 이런 편지를 남겨준 사람일까, 로마서 1:1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원문에는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먼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1.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가?

 

당시에도, 그리고 최근까지도 미국, 아프리카 등에서는 '종제도'가 있었다. 종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가축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종으로 태어나면 평생 종였다. 이렇게 종은 강제로 끌려온 존재로, 그저 주인에게 복종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자유도 없고, 기쁨도 없고, 고통만 있는... 그것이 종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종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시 종제도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특권적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종()는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자기 인식으로서의 종의식이다. 그의 신앙적 정체성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이것이야말로 그의 기쁨이요, 삶의 보람이요, 영광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까?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7:58인데, 7장은 '스데반'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거기서 바울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물론 그때는 히브리어 이름인 '사울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혈통적으로는 유대인, 그것도 '베냐민 족속'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왕이 된 사울도 마찬가지로 베냐민 족속이었다. 바울의 부모가 이를 본떠서 아들에게 같은 이름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사울은 유대인 이름이고, 바울은 그리스어 이름이다.

 

바울은 문화도시인 '다소'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종교적으로는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청년 시절 조상의 땅인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가서 당시 가장 유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 유대교를 배웠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 길'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점점 더 침투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질 때도 그는 선동적인 인물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 집집마다 쳐들어가 남녀를 끌어내어 차례로 감옥에 넘기고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고 이를 멸종시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교회에 있어서 정말 무서운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왜 그토록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바울을 지탱하고 있는 토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으로 자신의 의를 추구했던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자신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자기 발로 꿋꿋하게 서 있고, 누구보다 훌륭한 행실과 실적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죄악된 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바울은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중 갑자기 마음이 바뀌는 전환을 경험한다. 그때까지 기독교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사람이 그보다 더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9:3-9]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2. 사랑의 종이란?

 

그는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것은 답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에서 진정한 자유를 그는 발견한 것이다.

 

다음 말씀은 삶의 주체의 전환을 기록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한 다음 말씀은 가치관의 전환을 기록하고 있다.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왜 바울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이를 잘 설명해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그곳을 열어보자. 출애굽기 21:1~6이다.

[출애굽기 21:1~6]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산하여 빌린 돈을 갚을 수 없고, 팔 물건도 없는 경우, 자신을 팔아 종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 위 구절에서 보듯이 종의 주인은 다른 나라들처럼 종을 평생 개나 고양이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있었다. 종은 6년간은 무급으로 일해야만 종의 값을 갚을 수 있다. 하지만 7년째가 되면 주인은 무상으로 풀어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매우 친절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7년째 되는 해에 그 종이 "저는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영원히 이 집 주인을 섬기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그 종과 주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주인은 그를 제사장에게 데려가 칼로 그 종의 귓불을 찔러 뚫는다. 이 절차를 밟으면 이 사람은 평생 그 집 주인의 종이 될 수 있다.

 

세상에 도대체 그런 종이 있을까, 6년 동안 공짜로 일해서 겨우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평생 종이 되는 것을 선택하겠단 말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사랑받는 주인이 있었다면 하는 이야기다. 그런 주인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주인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사랑받는 주인이라면 그 주인을 섬기는 종은 사랑의 종이다. 그런 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종 자신이 아니라 주인에게 있다. 얼마나 훌륭한 주인인가?

 

요한은 그의 서신서 요한일서 1:16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한일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여기에는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라는 것이 잘 요약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라고 요약할 수 있다.

 

+ 바울에 대입해 보면 이렇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 이 바울이 주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로마서 14:7~8]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의 종()이 되는 사람이다. 그것은 결코 비참하고 자유가 없는 삶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유가 넘치는 특권과 영광스러운 삶이다. 의무도 아니고, 강요도 아닌 자발적인 사랑의 종이다. '귀가 뚫린 종'처럼 평생 그리스도의 종으로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사랑의 종의 진정한 모범은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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