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크신 긍휼

- 누가복음 1:57-80 -

샬롬선교회 


마리아의 찬송에 2, 그리고 사가랴의 찬송에서 누가는 '긍휼'로 번역되는 '엘레오스'ελεος라는 명사를 1장 안에 5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엘레오스'ελεος는 신약성경에서 27, 누가복음은 6번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동사 '엘레오-' ελεέω는 신약에서 29, 누가복음은 4(16:24/17:13/18:38, 39)를 사용하고 있다.

 

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1:54 “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1: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1: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

 

또 한 곳인 누가복음 10:37에서는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을 것 같으냐?"라는 질문에 율법학자가 "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긍휼'은 강도 만난 사람을 실제로 보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긍휼은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복음에서 이 '긍휼'은 누가복음 18:38, 39를 제외하고는 명사도 동사도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기사에서 발견된다. 특히 1장의 '긍휼'은 직접적으로 사가랴의 불임부인 엘리사벳과 처녀 마리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큰 역사를 가리키지만, 마리아와 사가랴의 예언적 찬가 속에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드디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말하고 있다.

 

1. '긍휼''은혜'('카리스' χαρις)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에서 '은혜''긍휼'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영어에서 전자는 grace, 후자는 일반적으로 mercy로 번역된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성경에는 그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한 구절은 없지만, 동사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하는 곳에는 반드시 구체적인 하나님의 행위를 촉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7:11 이후에서 10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간구했을 때,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다음 장 18:35에 등장하는 한 소경이 예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쳤을 때, 예수님은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내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 주님의 긍휼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긍휼의 역사로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 애정이 바로 '은혜' 카리스 χαρις라고 하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의 근원, 혹은 본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동기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은혜가 있고, 긍휼이 있는데, 인간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의 궁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구원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애정)가 있다. '은혜''사랑' '아가페' αγαπη와 거의 동의어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사랑도 교환 가능한 어휘라고 할 수 있다.

 

2. '은혜''긍휼''평강'의 관계 -바울의 인사말에서

 

바울이 편지 인사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패턴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서,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디도, 빌레몬)이다. 베드로도 그 편지에서 이 패턴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기록한다. 그것은 디모데가 목회적 사역에 대한 연약함을 느꼈기 때문인데, 바울은 자신을 예로 들면서 자신도 본래 그런 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자, 이보다 더한 죄인은 없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대하며 복음의 사역을 맡겨 주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주님의 긍휼로 인해 지금 자신이 이런 사역을 하고 있음을 말하며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제로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기억하면서 제자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일방적인 호의, 동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긍휼'은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사건이며, '평강'은 히브리적 색채가 강한 샬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총칭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순환하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에서 출발하여 '긍휼'의 행위를 행하시고 '평강'('평화'도 같은 원어)라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주시는데, 인간 편에서 말하자면 '긍휼''평강'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되는 순서가 된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담대하게 '긍휼'을 구할 수 있고, 그 결과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자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 적이 있다. 소경이 주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던 것처럼, 바울도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기도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주님의 대답은 이렇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12:9)라는 말씀이었다.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근원이지만, 그 구체적인 표현으로서의 '긍휼'은 우리가 바라는 형태가 아니라 '연약함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고린도후서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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