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총리로 발탁된 요셉

창세기 411~45

 

41장은 요셉 이야기 전반부 클라이맥스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시기를 당해 애굽으로 팔려가, 거기서 바로의 꿈을 밝혀내고, 게다가 위기에 대비한 구체적인 제언을 함으로써 애굽의 총리로 발탁된다고 하는 예상 밖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출세(성공) 이야기이다.

 

2년간의 침묵을 거쳐 요셉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애굽왕 바로가 꿈을 꾸고, 그것을 해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처럼 이 41장에서도 동사의 강의형을 픽업해 본다. 네 명의 등장인물에 각각 강의형이 사용된다.

 

1. 꿈을 꾼 바로

 

+ 41장은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1)로 시작한다. 바로는 두 가지 꿈을 꾸었는데, 마음이 불안해져서 애굽 내의 주법사와 모든 지혜로운 자들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했다. 여기에 'סָפַּר(-)'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40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 동사가 쓰였다. , 그 꿈을 모두 정확하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중요한 사항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 꿈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경에서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요셉 이외에 다니엘 정도이다. 꿈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요셉이 꾼 꿈(39장의 두 가지 꿈)의 의미는 아버지 야곱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이해되었던 것 같다. 특별한 해명은 없었다. 그러나 40장 감옥에 갇힌 바로 두 정신(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해석하여야 했다 그걸 요셉이 해석하여준 것이다.

자신의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는 바로를 보고, 술 맡은 관원장이 2년 전에 자신의 꿈을 해석하여준 청년을 떠올린 것이다. 이때의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9)는 곳에 'דָּבַר(-)'이라는 강의의 형태가,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요셉에게 꿈을 '말하매'(12)라는 곳에 'סָפַּר(-)'이라는 강의형이 사용되고 있다.

 

+ 바로는 즉시 요셉을 불러와 요셉에게 자신이 꾼 꿈을 '이르되'(17)에는 'דָּבַר(-)'의 강의형이 사용되고 있다. 바로가 왜 이곳의 '이르되', 8절처럼 '-'의 강의형이 아닌 '-'의 강의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하나의 견해는 바로는 요셉에게 꿈 자체를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바로 자신의 꿈에 대한 인상이나 그것을 들은 모든 점술가와 현인들의 반응까지 포함시켜 이야기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문에서는 이와 같이 미묘한 사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2. 바로의 꿈 해석과 제언으로 권위 있는 지위를 부여받은 요셉

 

그러면, 여기서부터 요셉의 이야기가 급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셉은 다음과 같이 바로의 꿈을 해석했다

 

(1) 꿈의 해명

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27.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 바로가 꾼 꿈은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내용은 매우 심각한 내용이다.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그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한다는 것을 알리는 꿈이었다.' 그것이 요셉이 하나님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2) 7년간의 미증유의 대기근에 대처하는 요셉의 제언

 

33.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 요셉은 꿈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이윽고 애굽을 강타하는 기근 때문에 '준비하라'고 구체적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준비하다''-마슈(חָמַש)'ׁ라는 동사에도 강의형이 쓰이고 있다(34). '-마슈(חָמַש)'ׁ의 본래 뜻은 '(수확의) 5분의 1을 징수한다'는 뜻이지만, '편대를 짜서' 싸움에 임한다는 뜻도 있다. 구약에서 5번의 사용하며, 전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창세기 4134절뿐이다. 신개역(新改訳)에서는 위기에 대처하는 '조직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요셉의 제안은 실제 식량의 비축과 이를 시행하기 위한 '조직화'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 순간적인 판단으로 다가올 7년간의 미증유의 대기근에 대비하여 그 전 7년간의 풍년 중에 애굽 전체 수확의 20%를 징수해 보관한다는 지혜가 요셉에게 주어졌다. 그 일 자체가 신기하다. 바로의 말처럼 요셉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으로 보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 요셉의 제언은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라고 되어 있다(37). 꿈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을 위한 대처법까지 즉석에서 제언할 수 있다니, '하나님의 신이 위로부터 요셉에게 격렬하게 내렸다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바로는 이렇게 말했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39-41)

 

+ 41절 원문은 '나는 애굽 땅의 모든 위에 당신을 세웠다.'이다. 이것이 요셉의 꿈의 해석과 구체적인 제언을 들은 바로의 속단이었다. 그 증거로 바로는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42~43). 반지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도장의 반지로서 왕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되는 물건이다. 그것을 바로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빼어 요셉에게 주었기 때문에 대단한 신뢰이다. 이로 인해 요셉은 애굽을 지배하는 최고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야말로 예상 밖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개이지만, 실은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 요셉에게 주어진 직책은 '총리'라고도 '재상'이라고도 '총리대신'이라고도 한다. 이때 요셉은 30. 진정한 관리자로서의 실력을 인정받는 지위에 올랐는데, 그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이미 아버지 야곱에게 있던 때부터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시키고, 보디발의 집이나 감옥에서도 관리능력을 기르도록 인도하셨다. 전 애굽을 다스리는 지혜와 힘도 그 관리 능력의 연장선이었던 것이다. 백성들에게 기근이 닥쳤던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스스로도 하루하루를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 여기에서는 물질적 식량의 기근이 문제로 되어 있지만, 영적 기근이 머지않아 닥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의식이어야 한다.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오늘의 요셉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3. 무엇을 해도 형통하는 삶

 

+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편 1편에도 표현된 것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3)라는 비유적인 실례이다.

 

+ '형통하리로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צָלַח(-라하)', '성공하다, 일이 잘 진행되다, 성취하다, 번성하다, 하나님의 영이 격렬하게 내린다.'라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히필형, 즉 사역형 능동태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주체가 항상 하나님께로 있음을 의미한다. 창세기 39장에서는 '형통한 자'(2),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3)이라고 되어 있다. 진정, 요셉의 생애 전반을 보는 한, 그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형통한 사람', 'אִישׁ מַצְלִיח(-마츠리아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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