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더러운 계보

창세기 38130

 

창세기 38장은, 요셉을 죽이는 것보다는 이스마엘인에게 파는 편이 이득이라고 다른 형제를 설득해, 말하자면 요셉의 생명을 구한 유다와 그 가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무엇 때문에 이 38장이 여기에 놓여 있는가? 야곱의 넷째 아이였던 유다의 가계는 머지않아 메시아를 낳는 가계가 된다. 다윗의 집안으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진다. 마태복음의 제1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유다에, 다말에 의해서..'라고 되어 있다. 유다는, 유다 왕국, 및 유대인이라고 말해지는 민족의 뿌리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뿌리인 유다에는 창세기 38장에 기록되어 있는 경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걸림돌이 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나약함이나 어리석음을 숨김없이 그대로 다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진실한 서책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강의형의 동사를 살펴보면 등장인물의 각각의 속셈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한다.

 

1. 후계의 자식이 없던 다말

 

유대에서는 옛날부터 결혼한 형이 자식이 없는 채로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 후사를 시킨다고 하는 의무(관습)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부친인 유다와 며느리의 사이에 아이를 낳는다고 하는 것도 결코 죄악으로 간주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손에 이윽고 다윗이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것이다.

 

유다가 가나안인의 딸과 결혼한 것. 동생인 오난이 아버지로부터 형수인 다말에게 들어가라고 하는데, 동생인 오난은 다말에게 들어갈 때마다 의도적으로 후사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오난은 동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셈이다. 그것 때문에 여호와를 노하여 죽었다. 형 엘도 여호와를 노하게 해서 죽었다. 동생이 죽으면, 당연히 이번에는 세 번째 세라에게 차례가 돌아오지만, 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친정으로 돌아간 다말은 당연히 세라가 크면 자신과 결혼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순순히 돌아간 것 같다(11). 그러나 유다에는 다말에 대한 책임을 다할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유다는 죽은 두 아들이 다말과 관계되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2. 다말의 획책

 

유다는 아내가 죽고 상이 끝난 후, 어느 축제에 나간다. 그 말을 들은 다말은 유다에 의해 후사를 얻으려고 획책한다. 다말은 유녀로 모습을 바꾼다. 다말에게는 장래의 운명을 건 연극이었다.

당시에는 가나안 제사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풍속을 위해 의식적인 성교를 하는 '신전창부'가 있었던 것 같다. '신전창부'는 우상인 아세라 여신을 대리하며, 그 여신과의 성교는 그 여신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여기서는 '신전창부'(新共同訳)'유녀'(新改訳)로 번역하는 것 같다. 다말은 그 모습을 가장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미 자신에게는 아내가 없다고 하는 해방감으로부터 축제 기분으로 행한 유다의 행위는, 큰 죄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까지 읽는 것만으로도, 유다의 계보는 확실히 '더러운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말의 계략에 유다는 쉽게 넘어간다. 다말은 유다가 가지고 있는 도장(印鑑)과 그것을 목에 매는 끈, 그리고 지팡이를 '숫염소 한 마리'(단수)를 받는 보증으로서 받아 자신의 거하는 곳에 돌아간다. 유다는 나중에 새끼 염소를 보내면 쉽게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한 번의 행위에 의해서 임신을 한 것이다. 다말의 획책은 성공했다.

그리고 약 3개월 후, 다말이 매춘에 의해서 임신하고 있는 것이 유다의 귀에 들어간다. 설마 자신이 그 상대라고는 알지 못하고, 유다는 다말을 태워 죽이라고 하지만, 앞의 물건들의 소유자에 의해서 자신이 임신한 것을 전하기 위해서 유다에게 심부름을 보낸다. 이것을 본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다말은 무사히 쌍둥이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분명히 다말은 가나안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서 이 사건을 본다면 이방인인 가나안 사람도 결코 구원의 예외가 될 수 없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침공을 위한 정찰을 위해 두 명의 사자(使者)를 여리고에 보내는데, 그 사자를 숨겨 목숨을 구한 것은 바로 가나안 유녀 라합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의 자손 살몬의 아내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보아스가 태어나고, 보아스도 모압인의 여자 룻에 의해서 오벧을 낳고, 이세, 다윗으로 결연되고, 다윗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 의해서 솔로몬을 낳고, 이윽고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다.

 

3. 참으로 이상한 하나님의 배제(配剤)

 

성적인 면에서 유다에는 약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점에서는 같은 형제의 요셉과는 전혀 다르다. 요셉은 자신이 섬기고 있는 남편의 아내에게 유혹되었을 때, 단호하게 그것을 물리친다. 누가 봐도 요셉이가 더 훌륭하다. 그런 요셉의 계보에서야말로 예수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이 좋듯이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유다의 계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이 38장의 명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다말'('--' תָּמָר)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대추야자'를 뜻한다. 많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이다. 그녀로부터 유대인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하나님의 배제이다.

 

보충.

 

창세기 40장에는, 야곱이 임종 시에 12명의 아이들을 축복한 기사가 있다. 그 안에서, 9~10절에는 유다에 대한 예언적인 축복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는 사자의 아들. ···· 왕권은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팡이는 그 다리 사이를 떠나지 않는다.'라고. , 미래에 있어 지상을 지배하는 자는 유다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예언이다. 여기에는 유다가 형제들의 사이에 서서히 지도권을 잡아, 리더적인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 예언되고 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하면 먼저 그가 미디안인들에게 요셉을 팔려고 형제들을 설득해 요셉의 생명을 구했다(창세기 3726~28)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가 창세기 38장에 기술되어 있듯이 부끄러운 행위도 오점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그 유다가 전부족의 지배자로서 축복받게 된 것은, 요셉의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베냐민의 대신으로서 제공한 것에 의한다. 유다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용서의 다리가 되었다.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유다가 '사자(獅子)'라고 불리는 것은 힘의 탓이 아니고, 그의 자기희생에 있었다. 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유다로부터 나온 사자'로서, 우리의 대신으로서 자신을 바치셨다.

 

다윗도 유다족의 출신이며, 전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왕으로서 기름을 부었다. 유다족은 광야를 행할 때, 선두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유다라고 하는 호칭의 유래에 대해서, 창세기 2935절에 의하면 레아는 제4자가 태어났을 때, '이번에는 주를 찬양하자'라고 해 '유다'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유다는 히브리어의 '--'를 어원으로 해 '감사' '찬미'의 의미이다. , 우리에게 하나님에게의 감사와 찬미를 가져오는 존재야말로 유다족의 특징이며, 그 안에서 나온 사자(獅子)야 말로 메시아이다.

 

http://meigata-bokushin.secret.jp/index.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