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요셉에 대한 미움과 질투

창세기 371~11

샬롬선교회

 

창세기 37에서 마지막 50장까지는 야곱의 집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 역사 속에 요셉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놓여있다. 신개역으로 '역사'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 'תוֹלְדֹת로 가족의 '계보, 경위, 유래, 족보'로도 번역된다. 창세기에는 10가지 '--'가 있다.

 

372절에 있는 '야곱의 역사'에는 야곱의 본인이라기보다는 야곱의 아이들 (특히 요셉)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야곱의 죽음과 장례가 마지막(49,50)에 기록되어 있다. 야곱이 이집트에 간 것은 130(47:9)였다. 야곱의 일생은 147세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보낸 연월은 17년이라는 것이 된다. 그 동안 이집트에 갈 때까지 야곱의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기록한 것이 37~50장이다.

 

1. 야곱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미움

 

성경은 아버지 야곱이 "다른 형제들 중 누구보다 요셉을 사랑했다"고 적고 있다. "사랑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미워하다 שָׂנֵא""시기하다 קָנָא"라는 말이 눈에 띈다(37:4,5,8,11). '사랑한다'는 말도 다른 성경에서는 '귀여워한다'로 번역하고 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성경에서는 모두 '사랑한다', '미워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유태적인 표현인 것 같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라는 표현도 말라기서에 나왔는데, '사랑하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 중간 표현이 없는 것 같다.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는 것과 그 병폐에 대해 우리가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실이 생기는 사랑과 미움의 드라마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가정에서의 사랑과 증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형제 가인과 아벨,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벨이 바친 물건을 눈여겨보고 카인이 바친 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초의 살인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레아와 라헬, 그리고 요셉과 그 형제들은 저마다 하나 밖에 없는 축복, 하나의 가독권, 혹은 한 남편의 사랑을 놓고 사랑과 미움을 겪어왔다. 더 나아가 브닌나와 한나 등, 역사를 본다면 애증의 씨앗은 부족함이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가족, 그 가족 안에서 인간의 죄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일어날 리가 없다)'라고 제멋대로 믿으며 현실을 파악하려 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발목이 잡히게 될 것이다. 예수님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 10:34)라고 하여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에 못을 박고 있다.

 

37장에서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고 있다. 그러나 야곱으로서 보면, 원래 자신이 사랑한 것은 라헬뿐이며, 와삼촌 라반에게 속아 레아를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서 많은 아이를 낳았다는 것, 그것이 라헬에게도 영향을 주어 레아와 라헬의 애증에 각각의 여자 노예도 말려들게 하여, 결과적으로 많은 아이가 태어나 버렸다. 그러므로 야곱으로서는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요셉(11번째 아들)은 특별히 귀여웠을 것이다. 각각의 입장을 생각하면 옳고 그름을 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악을 논하는 것 속에, 그 사람의 선악의 기준이나 가치관이 비춰질 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의 선악을 초월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2. 요셉의 꿈에 '마음을 두었다'는 야곱

 

37장에는 요셉이 꾼 꿈이 두 번 적혀 있다. 그것은 참된 꿈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인 것은 분명하다. 첫 번째 꿈에서 형제들은 요셉을 점점 미워하게 되는데, 다음 꿈에서는 질투하게 된다. 형제들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요셉의 태도에 대해서, 아버지 야곱은 주의를 재촉하지만, 동시에, 이 꿈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라고 하다.

 

덧붙여서, '기억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 שָׁמַר이다. 본래는 '지키다, 유지하다, 감시하다, 조심하다'라는 뜻이다. LXX (70인역 성경)에서는 여기의 '-''디아테-를레오-' διατηρέω의 아오리스트로 번역하였다. '디아테-를레오-' διατηρέω가 신약성경의 누가복음서 2:51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예수님이 했던 말이나, 예수님께서 한 말씀 - ,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에서 사용되었다. 덧붙여서, 누가 2:19"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는 말은 '슨테-레오-'συντηρέω로 신약 성경에서는 4(마태 9:17/마가 6:20/누가 2:19/5:38), , 누가 5:38에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그러면 양쪽 모두 안전하게 될 것 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리스어 성경의 네스트레 원본 N27에는 없다. '디아 테-레오-' διατηρέω'슨테-레오-' συντηρέω도 친류의 동사이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 속에 숨겨진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의미가 강한 말이다.

야곱이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11)는 표현은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하나님의 섭리를 암시하고 있다. 우리도 이 꿈을 마음에 두면서 앞으로의 전개를 생각하여 보자.

 

인간의 눈에 보이는 사건은, 직물로 말하자면 옷감의 뒷면을 보고 있는 것과 같아서 언뜻 보아 무엇이 거기에 짜여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겉으로 직물을 본다면, 거기에 어떤 디자인을 넣으려 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역사를 인도받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신앙에 이르기까지는 조금 세월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받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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