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와의 재회

창세기 331~22

샬롬선교회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곁을 도망치듯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형 에서를 두려워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두 사람의 재회는 야곱이 에서에게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뜻밖에 이루어지게 된다.

 

32장에서는 에서가 소식을 듣고 야곱을 맞이하기 위해 사백 명의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은 이상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는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야곱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인지, 성경은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다만, 이삭이 에서에 대해 예언했을 때,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창세기 27:40)라고 했으니, 에서가 싸움(무력)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점에서는 야곱은 대조적이다. 야곱은 칼로 싸워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버지 이삭을 계승하고 있다. 아버지 이삭과 다른 점은 야곱이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부를 쌓았다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20년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각기 다른 걸음을 걸어왔다.

 

32장에서는 에서와의 재개에 무서워한 야곱이, 허벅지 뼈가 위골된 후에, '어떤 사람'에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축복하지 아니하면'의 두 동사가 32장의 강의형의 상태였다. 33장에서 그 하나님의 '축복'이 형제 재개의 장면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가, 그 예증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에서 볼 수 있다.

늘 그렇듯이 33장에서도 히브리어 성경이 적고 있는 강의형을 살펴보겠다. 33장에서는 세 개의 동사가 강의형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세 개의 강의형 동사를 살펴봄으로써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에서를 대면하여 엎드려 절한 야곱

 

3, 6, 7절의 '절하다'라고 번역되는 '--'(שָׁחָה)는 강의형의 형태이다. 이 동사는 본래 '엎드리다'라는 뜻인데, 재귀태로 쓰이면 '절하다'로 번역된다. 야곱을 비롯하여 야곱의 아내도 아이 모두 에서에 대해 절한 것이다. 야곱의 경우는 무려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하고 있다. 이는 형 에서에 대한 사과와 화해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형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두려움에서 나온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일곱 번이나'는 당시 왕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 행위라고 한다. 그런 행위를 형에 대해 한 것은 이상하다고도 할 수 있는 부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만큼 야곱은 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며, 야곱은 밤새워 하나님의 축복을 구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걱정보다 낳기가 쉽다', 실제는 야곱이 걱정했던 것에 이르지 않았다. 야곱이 홀로 씨름을 했다. 혼자서 앞당겨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외삼존 라반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이 추적하는 라반에게 꿈속에서 야곱과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지만, 여기서는 에서에 대해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는 기술은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야곱에게는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2. 야곱을 맞아,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입을 맞춘' 에서

 

4절에 에서가 야곱을 만나러 달려와 야곱을 안고 목에 껴안고 입을 맞추며 둘은 울었다고 한다. '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바크'(חָבַק)가 강의형의 형태이다. 이 말은 구약에서 13번 사용되고 있다만, 창세기에서는 3번이다. 처음에는 야곱이 부모님을 떠나 외삼촌이 있는 파란 아담에게 가는데,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맞이하려고 '안고' 입을 맞추었다(29:13) 그리고 33:4에서는 형 에서에게 안겼다. 또 한 부분, 이번에는 야곱(이스라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두 아들을 포옹한 사실을 48:11로 기록했다. 그리고 이 세 번 모두 강의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형인 에서는 야곱과는 달리 단순 솔직하고 명쾌한 사람이다. 그런 만큼 장자의 권리도 축복을 빼앗긴 것을 이미 잊어버린 것 같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적합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성격적으로는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동생인 야곱에 대해 전혀 과거의 일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응어리진 듯한 발언도 보이지 않다. 단지 그리움만이 전면에 나오고 있다. 여기 야곱의 생각과는 정반대인 모습을 볼 수 있다.

 

3. 자신의 '여행을 계속하려는' 야곱

 

세 번째 마지막 강의형은 14절의 "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에 나오는 '-하르('נָהַל)로 창세기에서는 처음 등장하는 동사이다. 본래는 '이끌다, 동반하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강의형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자신의 무리를 행보대로 천천히 데리고 가다'라는 의미로, 양을 사는 양치기의 일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애굽에서 속죄를 받은 백성을(15:13), 또 바벨론에서 귀환시키는 백성의 무리를 온순히 인도(이사야 40:11)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유명한 시편 23편의 2절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인도하다''-하르'(נָהַל)의 강의형이다.

 

에서가 자신이 사는 세일을 향해 선두에 서서 나아가려고 하는 호의도, 또 호위로서 자신의 부하를 제공하려고 하는 호의도 야곱은 잘 거절했다. 그것은 야곱이 자신의 걸음을 계속해 가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형의 보호 아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걸어야 할 여행을 자신과 자신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의 페이스에 맞추어 책임지고 이끌어 갈 것이며, 그들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갈 것을 표명한 것이, '-하르'(נָהַל)의 강의형이다.

 

한 번은, 야곱이 에서에게 세일로 갈 것을 말했지만, 아마 아직 에서를 믿지 못했다는 면도 숨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에서와의 연결을 최대한 피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야곱은 에서가 사는 세일로는 향하지 않고 숙곳로 가서,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다. 야곱은 밧단아람을 나와 여기에 처음으로 자신이 있을 곳을 정한 것이다. 또한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았다. 아마도 여기에 장기간 머물렀을 것 같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시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33장에 있는 세 개의 강의형의 동사를 살펴봄으로, 이 장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에서와의 사이에 있던 응어리를 하나님에 의해 여기에서 고쳐져, 야곱이 본래 걸어야 할 길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에 대한 취급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 가지만, 32장과 33장의 사건은, 야곱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야곱의 자신에게 일깨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적 개입을 알게 된 야곱은 세겜에서 제단을 쌓고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이라고 명명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 이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야곱의 신앙 고백적 간증으로 제단을 구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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