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가정에 일어난 축복의 계승

창세기 26:34~27:46

샬롬선교회

 

창세기 27장 정도로 아슬아슬하고, 드라마성이 풍부한 장은 성경책 어디를 찾아봐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언제나와 같이, 여기서도 강의형이 사용되고 있는 동사를 찾아보면, '축복한다'라고 하는 말이 15회나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는 리브가가 야곱에게 '아버지가 에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6)라고 하는 가운데 '말하고 있다'라고 하는 말이 강의형(피에르태의 분사형)이다. 게다가 그 내용은 '축복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한 군데, 19절의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한 말 '나는 장남인 에서입니다. 저는 당신이 말씀한 대로 했습니다.''말씀하다'가 피에르태이다. .또 한 부분, 이삭이 야곱에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었느냐'(20)'빨리'도 피에르형이다. 아버지 이삭이 놀라고 의문을 품는 장면이다. 이와 같이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축복한다'라고 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아찔한 순간들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마음이 실현되고 마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 이것이 27장이다.

 

1. 다양한 시각으로 명상하기

 

27장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된다. 그래서 단순히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것, 그건 나쁜 일이다. '거짓을 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합시다'라거나 애당초 부모의 편애가 가정을 무너뜨려 버렸다거나 목적이 좋아도 수단이 나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등의 교훈적 수준의 이야기로 이 27장을 끝내서는 안 된다. 그런 교훈적인 가르침이 날아가 버리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계획의 실현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실현할 수 있는 계획이다. 여기에 다양한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직물(織物) 뒤의 원단(生地)만 보고 있어도 하나님이 완벽하게 엮어내는 직물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27장에 등장하는 가족 각각의 입장이 되어 명상을 할 때,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하, 각각(이삭, 리브가, 야곱, 에서)의 시점에서 이 27장을 명상해 보고자 한다.

 

(1) 아버지 이삭의 경우

 

하나님의 축복(약속)을 계승한다는 문제는, 이삭의 경우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축복해 준 축복의 계승자가 된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잘 다스려 준 덕분이다. 의형인 이스마엘만 해도,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내 거두라로부터 태어난 6명의 의형제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모두 아버지가 축복의 계승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해 주셨기 때문에, 이 문제의 곤란함에 말려든 경험이 없다.

 

또한 이삭의 장점은 온유하며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래서 만약 아내 리브가로부터 '형이 동생을 섬긴다'는 계시(예언)를 들었어도, 혹은 듣지 못했더라도 스스로 동생 야곱을 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온유함'이라는 좋은 면이 그의 계승 문제에 있어서 약한 면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축복의 계승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이삭은 집안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음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고 서열에 따라 축복하는 것이 그의 성격상 이치에 맞는 것 같았다. 바꿔 말하면 압박을 받게 되는 일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만약 자기가 이삭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물어봐야한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계승자가 한 명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지만 여러 명 중에서 유일하게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계승하는 내용의 가치가 높을수록 승계 문제는 어느 시대에나 어떤 상황(가정, 단체, 국가)에서도 심각한 진통을 겪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삭은 자신이 속은 것에 의해 계승이라는 책임을 순조롭게 지켜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곱과는 달리 장수하여 180세까지 살았다. 참고로 아버지 아브라함은 175, 파란의 삶을 살았던 야곱은 147세였다. 요셉은 이집트에서의 생활로 11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어머니 리브가의 입장에서

 

어머니 리브가가 취한 행동은 전에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다. 축복의 후계자로서는 형의 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 임신했을 때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은, '형이 동생을 섬긴다'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는 아마 상정(想定)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삭이 에서를 축복한다는 말을 엿들었을 때 급한 행동을 취했다. 야곱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에서가 될 준비를 한 것이다.

 

리브가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배경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왜 이삭의 아내가 되었는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인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친족 중에서 자기가 인도받았다는 것, 장인 아브라함이 그 일을 매우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이삭의 아내가 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서는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27장의 마지막 절에서 남편 이삭에게 말한 리브가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27:46)

 

그 만큼 리브가의 행동은 자신의 정체성 위기에 직면한 순간적인 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리브가는 아직 소망이 있는 야곱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건 것이다.

 

(3) 야곱의 입장에서

 

갑작스런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에 따른 야곱. 여기서의 야곱은 어머니의 말대로 하였다. 어머니가 이렇게 까지 이 문제에 대해 자신에게 가담해 주시리라고는 야곱은 생각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야곱은 마지막까지 형 에서로 행세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준비는 어머니께서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대화 중에 네 번 야곱은 식은땀을 흘리는 장면이 있다.

 

첫 번째, '누구냐, 너는'라는 물음에 '저는 맏형인 에서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두 번째,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었느냐'라고 이삭이 놀라서 물었을 때, 세 번째 '네가 진짜 내 아들 에서인지 너를 만져보고 싶다'라며 만졌을 때, 네 번째 '... 정말로 너는, 내 아들 에서이냐'라고 다짐받았을 때.

 

마르틴 루터는 '만약 이때 내가 야곱이었다면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야곱은 뻔뻔스럽게 '에서입니다'라고 끝까지 속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후원이 있었지만 축복을 가로채는 데는 상당한 배우가 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 야곱은 자신의 본분을 이곳에서 십이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삭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리브가의 친정으로 가던 도중에 처음으로 여호와와 개인적으로 만나서, 여호와로부터 아브라함, 이삭에 이은 직접적인 축복을 받는다(창세기 28장 참조). 여호와는 야곱에게 전혀 책망하지 않다.

 

(4) 에서의 입장에서

 

에서가 사냥하여 만든 별미는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그 준비가 여기서 원수가 된 셈이다. 사냥하여 만든 별미가 어머니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또한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결혼할 때에도 자신이 아브라함 이삭과 흐르는 하나님의 축복(약속)의 중요성에 무관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된다면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을 가장 걱정하고 있던 것은 아버지 이삭보다도, 어머니 리브가였다. 그 어머니의 순간적인 계략에 의해 축복은 야곱에게 가로채졌고, '형이 동생을 섬긴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실현되고 만 것이다.

 

애초에 부모님이 결혼 문제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야 할 축복을 빼앗긴 것을 계기로 아버지 이삭의 의형인 이스마엘에게 가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이미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에서의 방심·가벼움이 축복을 빼앗긴다고 하는 결과를 스스로 초래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2.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은 아무도 모른다.

 

27장을 명상하면서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실현의 구체적인 과정은 예측 불가능하고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모두에서 말할 수 있는 진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모든 흐름 속에 담겨 있어서 스스로 그것을 조작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스스로 실현시켜 버린 것처럼 말이다 .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스스로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미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로마서 11:33,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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