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함께한 사라의 죽음

창세기 231~20

샬롬선교회

 

그동안 배워온 아브라함의 신앙 생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일생이 175세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평안한 노년을 맞아 장수를 다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가 137세 때 아내 사라를 잃는다. 남편으로서 자신의 아내를 장사하기 위한 묘지를 구입하여 묘를 만드는 일. 또 아버지로서 아들 이삭을 위해 며느리를 맞는다는 신앙 문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다. 그것이, 이번 23장과 다음의 24장에 취급되고 있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아브라함과 그 아내를 묻기 위해 상당한 집념을 갖고 무덤을 구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겠다.

 

1. 사라를 위해 애통하고 눈물지은 아브라함(1~2)

 

2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에 대하여 애통하고 슬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새로운 일면을 보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이 때만큼 격렬하게 감정을 나타낸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울었다고 적혀 있는 곳은 이 부분뿐이다. '애통하고 울었다'라는 말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라는 말이다. 아내의 죽음에 그는 통곡한 것이다. 그가 사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라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성경을 잘 관찰하면, "아브라함이 들어가서"라고 되어 있으니, 사라가 숨을 거둘 때 아브라함은 집을 떠났을 수도 있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그 일로 애통하고 울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라와는 백 년 가까이 함께한 평생의 반려자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 해 온 것이다. 갈 곳을 모르고 출발한 신앙의 반려자, 오랜 기간 자식이 주어지기를 갈망했던 인내의 반려자,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함께 겪은 반려자이었다. , 어릴 적의 일이나, 고향의 일, 옛 추억을 이야기할 때는 단지 그녀와 만이 같은 생각에 잠길 수 있던 반려자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사라에 대한 눈물은 당연하며 자연스럽고, 또 아름답기도 하다.

 

신앙이 깊어지면 슬퍼하거나 애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건전한 애통이 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치게 감정을 억압하면 자신에게 어떤 해를 끼치게 된다. 정신적인 면에서 혹은 신체적인 면에서나 말이다.

 

우리는 그 생애에,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인물과 사별하거나 혹은 이별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경험을 한다. 사람이 아니라도, 애착이 있는 것, 혹은 사회적인 입장이나 지위, 환경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상실하면, 나름의 슬픔을 경험하게 되는 법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맡고 있던 회사의 사정으로 갑자기 전근을 명령받거나 혹은 해고되거나 한 경우, 그때까지 관계가 있던 인간관계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또 믿어 온 사람이 뒤에서 자기 험담을 하는 것을 듣거나 약속이 깨졌을 경우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애통하지 않을 수 없는 비탄에 잠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상 다반사적으로 어떤 상실의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어떠한 형태로든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지으며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아브라함도, 그리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 제자 베드로도, 그리고 바울로 그랬다.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은 부끄러울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혼자서만,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는, 어쨌든 감정을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쏟아 버리는 것이 비탄을 이겨내는 마음의 일이며, 그것이 곧 긍정적으로 사는 자세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그런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면,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우거자(寄留者)'로서의 자기인식(4)

 

사라를 위해 통곡하고 울었던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일어났다(3). 언제까지나 슬픔 속에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죽은 자의 곁에서 일어나' 남겨진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 사라를 매장하기 위한 묘지를 취득하려고 하지만, 4절에서 그가 자신을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헷 족속 앞에 나서 자신이 '나그네', '우거한 자'인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나그네', '우거한 자'는 임시로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고향을 가지고 있지만, 잠시 동안, 이국의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이 지상의 걸음을, '우거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상 생활은 여행 생활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고향은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 3:20)고 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향은 하늘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져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세상에 우거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가 현실의 발자취 속에 구체적으로 반영된다. 그러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고백하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

 

(1)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졌다는 사명적인 자각을 가지고 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으니 빨리 하늘나라로 가셔도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사명과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내가 택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각이야말로 '내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고 고백하는 삶의 방식이다.

 

(2)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세상 것을 대충대충 하라는 말은 아니다. 일시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영원적인 것)을 보고 사는 것이다. 땅 위의 것은 머지않아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라고 한다.

 

죽음에 즈음하여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한 푼이라도 옷 한 벌도 가져갈 수 없다. 우리는 벌거벗은 세상에 태어나고 또 벌거벗고 떠난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단 하나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말씀)뿐이다.

 

(3) 하늘에 보물을 쌓는 생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태 6:19, 20)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란 알기 쉽게 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에 보배 쌓기'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는 '나그네'이며, '우거자(寄留者)'라고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싶다.

 

3. 묘지에 매장하는 것의 신앙적 의의 (4~20)

 

'나는 나그네, 우거자'라고 자각한 아브라함이 이 지상에서 손에 쥔 부동산은 묘지였다. 아브라함이 이 묘지를 사유의 것으로 매입 경위가 4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묘지를 취득함에 있어 그 방법에 상당한 집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위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처음 아브라함이 그곳에 살던 헷 족속에게 묘지 협상을 벌였을 때 그들은 "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라고 매우 호의적인 대답이었다. 그리고 자주 '드린다'라는 말이 나온다. , 그래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냥 '호의를 받자'라며 저라면 공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정당한 절차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하려고 한 것이다. '공짜만큼 무서운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이 지불하는 것이므로, 상대방도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지만, 400 세겔이라는 가격을 제시했다. 정확한 환산은 할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비싼 액수였던 것 같다

 

아브라함이 왜 그토록 집념을 부려 묘지를 취득하려 했을까? 사실 그러한 태도 속에 배워야 할 신앙의 교훈이 숨어 있다. 두 가지를 들어보겠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의 징표로서

 

첫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무덤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예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땅 한 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 땅에 무덤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의 표현,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앙의 표시였다고 생각한다. 이윽고 하나님은 이 땅을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는 사유의 묘지를 얻은 것이다.

 

참고로 헷 족속(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제시한 돈, 400세겔이라는 금액은 창세기 2313~15절에 나오는, "13. 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15.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라는 말씀과 창세기 15:13-14에 나오는,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숫자와 일치한다. 이윽고 그 땅은 헷 족속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땅이라는 신앙고백으로서의 의미가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왜 무상 제공에서부터 단번에 은 400세겔이라는 고액 금액을 제시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배후에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생각하면 그 의미가 보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취득한 막벨라의 묘지에 묻힌 것은 사라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 그들의 아들 야곱, 그의 아내 레아이다(창세기 49:29~32, 50:13). 그들은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에 서서 이 무덤에 스스로 지명하고 들어온 것이다. 그걸로 신앙적인 정체성을 실현한 것이다.

 

(2) 부활에 대한 신앙의 증거로서

 

아브라함이 무덤의 취득에 얽힌 신앙의 교훈 중 두 번째 것은 아브라함이 곧 부활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정중하게 사라를 매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겨내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죽음에 영원한 이별이 아니다. 무덤은 곧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때까지의 임시숙소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죽은 시체를 정중하게 모셔오라고 말씀하셨다. 일본처럼, 저주받지 않도록, 허점이 없도록 그러는 것이 아니다. 혹은 자손의 수호신으로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정중하게 묻는다면, 주님이 재림할 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외 없이 썩는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그때의 영광을 기대하며 땅에 묻는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사건을 통해, 부활의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하나님에게 바치고자 했다. 이 사건을 히브리인에게 쓴 편지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부활의 신앙으로 정중히 아내 사라를 무덤에 묻었듯이 우리도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의는 하나님이 약속한 바를 성취할 힘이 있음을 굳게 믿음으로써 의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 신앙에 의해 ''로 인정받는다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로마 4:24)라고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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