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생애 최대 실패

창세기 16

샬롬선교회

 

창세기 16장의 사건은 믿음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의 생애 가장 큰 실수였다. 아브라함은 이 실패로 13년간 하나님의 부재 경험을 해야 했다. 하나님의 부름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도 일절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가정 내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4010년 후의 오늘에 이르러도 그 문제는 질질 끌고 있다.

 

실패 없는 삶, 실패 없는 신앙생활은 있을 수 없다. 16장과 같은 사건은 신앙인 누구나 반드시 일으키는 문제이다. , 그것은 하나님이 내린 약속을 우리 쪽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데서 오는 실패이다. "실패는 성공의 근원이다"라는 격언이 있듯이, 우리는 수많은 실패의 아픔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윽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나라를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을 기쁨으로 삼고, 밤낮으로 그것을 흥얼거리는 생활 방식을 형성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이 고백은 스스로의 실패를 통해 배운 결실이었다.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교육적 프로그램 속에 실패의 경험이 헛되지 않게 짜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패 그 자체는 괴롭고 아픔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곧 이득이 되어,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기 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실에 항상 마음을 두고 싶다.

16장 아브라함의 실패에서 교훈으로 삼을 몇 가지를 배우고자 한다.

 

1. 실패의 요인과 그것이 가져온 것

 

12, 13, 15장에서 너의 자손은 모래의 수만큼 별의 수만큼 될 것이라는 '자손 번영' 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다. 하나님의 일방적 약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실현하시는 것임을 아브라함은 아직 알지 못했다. 하나님을 따른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약속과 현실의 간극은 너무 커서 아이는 한 명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하려고 한다. 하나는, 그래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주님의 시간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단지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역시 우리 쪽에서도 지혜를 이용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방식이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후자의 방식을 택했다.

 

우리의 문제는 기다린다고 하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행동을 일으켜 버리는 일이 많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원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것은 신앙의 시험이다. 신앙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대는 기다림을 통해 인내심을 갖게 된다. 변화가 없어도,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항상 평온한 마음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실패를 통해서 알게 된다.

 

아브라함의 실패 요인은 '사라의 말을 들어주었다'는 점에 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의 실패도 아내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함께 있던 남편에게도 주었기 때문에 남편도 먹었다는 점이었다.

 

아내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인 획책으로 하나님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남편에게 제안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세기 16:2) 아브라함은 사래의 말을 들어준 것이다. 여호와의 약속은 "네게서 태어나는 자가"라고 하였으므로, 아내 사래에게서 태어나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아이라면 여호와의 말에 반하는 것은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아내 사래가 자기 나름대로 숙고한 후에 한 제안이었다. 이처럼 자연스럽고 너무나 상식적인, 가장 가까운 사람의 설득력 있는 제안을 물리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선택한 방법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사태는 사래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더 나쁜 결과가 되었다.

 

2. 하갈에 대한 여호와의 긍훌 - '애타-로이-' (당신이야말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하나님)

 

사건의 문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남(하갈)에게 더 큰 기대를 품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초 아내 사래와 여자 노예 하갈 사이에 좋은 신뢰관계가 있었지만, 하갈이 아브람의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하갈은 안주인인 사래를 업신여기게 되면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바로 예상 밖이란 이것이다. 불화와 분쟁이 야기되었다. 안주인인 사래는 하갈을 괴롭혔다. " 학대하였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히브리어의 '--' עָנָה의 강의형(強意形) - 16장에서 강의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사는 이 '--' 1회뿐이다 - 으로, '몹시 괴롭혔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곧 이집트에서 당할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예고하는 창세기 15:13에도 사용되는 어휘이다.

 

'매정하게 대한다, 괴롭힌다, 학대한다' 여주인을 견디지 못하게 된 임신부 하갈은 거기서 도망쳤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 하갈을 발견하고,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죄를 지은 아담에게 여호와께서 너는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과 비슷하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16:9)고 말하며, 그녀에게서 태어난 자손에 대한 축복을 말하였다. 이는 하갈이 안주인을 겸손하게 섬기는 것이 진정한 해결임을 알려준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이 임신하고 있는 아이는 남자 아이이며, '이스마엘'이라고 이름 지으라고 말했다. 탄생 전에 명명된 것은 구약에서는 이 '이스마엘''이삭'뿐이다.

 

이 부름에 대해 하갈은 '애타- אַתָּהאֵל로이- רֳאִי'라고 말한다. 곧 당신이야말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눈앞의 괴로움이나 곤란을 피해 도망치려고 하는 자에게 이 '애타-로이-'라는 고백은 태어나지 않는다. 하갈은 안주인의 냉혹한 취급을 불러일으킨 자신의 오만함과 황야에서의 고독 속에서 자신에게 말씀해주시는 여호와를 만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세기 16:8-9)라고 말씀하실 때, 결코 그것은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씀 속에서 하갈은 자신을 돌아봐 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닐까?.

하갈도 노예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분간하지 못하고, 안주인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보였고,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하갈도 실패의 아픔을 겪었고, .여호와는 그녀를 그 실패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이다.

16장은 이와 같이 예상치 못한 고통, 실패의 아픔이 담겨 있다.

 

정리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예수)께서 분명 실패로 보이는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자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실패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눈빛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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