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 용어 사용문제 신학부에서 1년 연구
중보기도는 오직 예수님께만 붙이는 용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묻는 헌의가 2004년 제89회 총회에 상정되었다. 그때 충회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중보기도" 용어 대신 "이웃을 위한기도"라는 용어로 사용하기로 결의 했다.

총회가 사용하지 않기로 한 <중보기도>에 대한 용어사용이 계속된 가운데 이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 금년 제93회 총회에 또 이 문제가 헌의됐다. 총회는 이 문제를 신학부로 보내 1년 연구해서 제94회 총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제94회 총회에서 신학부가 <중보기도>에 대한 용어를 어떻게 연구하여 내놓을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 현제 본 교단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총회 결의이다.


아래 글은 이미 발표한 <인간이 중보기도를 드릴 자격이 있는가?>라는 소재열 목사의 글이다.

예수님의 중보기도 / 인간이 중보기도를 드릴 자격이 있는가?

우리 한국 교회에 이상한 현상이 일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중보자 훈련 및 중보기도자 양성 일 것이다. 하나님과 너 사이에 내가 기도한 기도가 중보기도 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자”라는 슬로건이 우리 한국 교회에 보편적인 현상으로 외쳐지고 있다.


신학 용어 개념의 혼란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각종 신학과 그 용어의 개념들은 2천년 교회 역사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신앙 유산이다. 2천년 교회 역사의 전통으로부터 독립된 신학자와 목회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잘못된 이단적 가르침이 등장할 때마다 변호하고 변증하여 성경에 대한 체계적인 신학과 교리가 형성되었고 발전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신학과 교리를 무시하고 자신이 무엇인가 새롭게 재구성하여 내놓는 신학자와 목회자는 있을 수 없다.

특히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대한 대속 진리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복음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중보적 존재가 있을 수 없고 만약에 자신이 그 중보적 존재라고 할 때 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와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 즉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관해서는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은 우리 교회 역사가 이 부분을 충분히 논의하여 이슈화시키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에 예수님의 중보기도 사역을 인간이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단적 사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의 중보기도 에 대한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되고 다른 적절한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후손들을 위한 우리들의 신학 작업일 것이다.


인간의 중보기도에 대한 잘못된 근거

신학의 대 전제는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신학의 대전제가 변하지 않는 한 기도와 기도신학이라는 것도 이러한 전제에 규제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도로 하나님께 접근하고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단적 사상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이방종교에서의 기도와 우리 기독교에서의 기도가 다른 점이다.

기독교에서 말한 기도란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고 무엇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의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과의 인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기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쉽게 구약 성경에 등장한 각종 인물들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했듯이 우리들도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구약의 인물들이 기도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는 의미와 용어로 말한 적이 없다. 우리 인간이 그것을 중보기도라는 용어로 정리했고 우리들도 그런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고 해서 인간의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발생된 것 같다. 백번 양보해서 구약의 인물들이 드린 기도가 중보기도일지라도 그 중보기도를 오늘날 우리들의 중보기도로 적용하면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적용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칼빈은 기독교 강요(제 2권 6장)에서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위격”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보자라고 정의하면서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아야 한다”라는 제목 아래 첫째, 중보자의 필요성, 둘째, 구약 백성들에게는 중보자를 떠난 하나님은 없다고 계시해 주셨고 구약의 중보자는 예언된 기름부음 받으신(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 중보자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라고 했다(기독교 강요 제 2권 6장, 202~206, 김문제 역). 그리고 계속해서 칼빈은 구약의 신앙과 소망은 중보자인 메시아의 약속 가운데 근거한다고 했다. 따라서 구약의 중보자 개념은 메시아의 중보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지 오늘날 우리들이 중보자, 내지는 중보 기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인 제사장 개념에 대한 오해

종교개혁의 3대 원리 가운데 하나가 만인 제사장 이라는 사상이 있다. 또한 성경이 이를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은 이 사상을 어떻게 오해하느냐면 마치 이신론(理神論), 혹은 이원론(二元論)과 같은 사상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으니 이제 예수님은 우리들과 상관없이 너희 알아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서 구원도 받고 기도도 하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구원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한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신학적, 성경적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이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의 이름 으로 기도하는 것인가? 인간이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인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지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그것은 예수님만이 중보 기도자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왜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가? 하나님은 오직 중보자이시며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고 계신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맺는 말

누가 인간의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하는가? 하나님 과 너 사이에 어찌 내가 중보자로 개입하여 너를 위한 나의 기도가 하나님께 중보기도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에게만 붙여야하는 용어를 우리 인간에게도 붙인다면 우리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왜 하필 중보기도라는 용어로 고집을 부리는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으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라고 했듯이 \"위하여 기도\"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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