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


서 론


Ⅰ. 1536년 판 강요가 나오기까지

(1532-35)


A. 기독교 강요 초판의 전주곡


1.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의 딜레마


기독교 강요가 쓰이게 된 이면에는 프란시르 1세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버티고 서 있다. 존 칼빈이 프란시스1세의 진노에 처음으로 직접 맞닥뜨리게 된 것은 1533년11월 1일 ‘모든 성자들의 날’(All Saint' Day)이후였다. 그 날 파리에서는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의 파리대학 총장 취임이 있었다. 그때 그가 행한 연설은 사실상 마태복음 5:1-12에 관한 강해 설교였다. 칼빈이 그 설교를 작성했는가 혹은 최소한 그것에 일익을 담당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이다. 칼빈이 당국자들에 의해 그 설교문 작성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갑자기 파리에서 도망해 버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콥의 연설 말미쯤에 다음과 같은 복음에의 초청이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마5:11).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진리를 담대히 말하지 않고 감춥니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몸은 죽이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까? 몸은 죽이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까?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피흘려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사탄의 결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그분의 이름 때문에 가장 미미한 고난을 받는 것조차도 꺼려하는 인류의 배은망덕함이여! 세상과 사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고 하는 자들을 이단, 미혹케 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어 왔습니다...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 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이러한 연설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콥과 칼빈은 파리에서 도망쳤다. 12월 10일 프란시스는 이처럼 성동적인 멧세지의 장본인들인 이단 종파를 어떻게 체포하여 처벌할 것인가에 관한 교서를 파리 의회로 보냈다. 프란시스는 콥 사건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충성스러운 친구들이여!...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도시, 파리, 우리 왕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에 의해 심히 불쾌하고 심기가 불편합니다. 우리 왕국의 최고의 대학에는 저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 하여 그것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써 유감스러운 처벌이 행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짧은 서론에서 칼빈이 프란시스 1세에게 호소하는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되는 정치적 사건들과 교회와 국가 관계의 그 복잡한 역사를 상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 배경과 정치적 주역들의 성격을 대충 훑어 볼 수 있을 뿐이다.

프란시스 1세는 자신의 통치 기간 전체에 걸쳐 계속적인 공격을 당한 군주였다. 그는 자기 왕국의 총화를 위해 우유부단하고도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투쟁했다. 몇 안 되는 자신의 통치 기반들 가운데 하나인 교회체제에 대한 프로테스트가 자신의 왕국 한 가운데에서 점증하게 되었을 때 그와 그의 중요한 종교 자문관들은 그것을 선동으로 간주했다. 황제로 선출되지 못하는 바람에 좌절하고, 세 번씩이나 이탈리아 원정에 실패하고(그 중 한번은 로마시를 야만적으로 약탈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첫 번째 라이벌인 찰스 황제에 의해 한동안 마드리드에 투옥 당하기도 하고, 끊임없는 침략의 위협에 시달리고, 자신의 영토 일부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동안 프란시스 1세는 정말 처절한 정도로 도움을 필요로 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한편으로 자국 내에서는 “루터 잔당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1534년 1월에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1515년 레오 10세와 종교 협약을 체결했으며 1533년 마르세유에서 클레멘트 7세와 협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그는 한 때 자신과 찰스 사이의 결투에 의해 제국의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제안하기까지 했으며 자신의 기독교 대적들에 대항하여 술탄과 동맹을 맺기까지 했던 것이다. 프란시스 1세의 통치는 전반적으로 우유부단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정책이라고 해서 어떻게 자신의 성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이 다루어야할 했던 사람은 이처럼 불안정한 군주였다. 프랑스 왕의 집요한 외교활동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1534년이었다. 1월에 프란시스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군주들 사이에 은밀한 조약이 체결된 후 5월과 8월 사이에는 독일 스위스 신학자들과 교회의 재연합에 관한 협상이 있었다. 프란시스의 수행원인 길롬 뒤 벨라이(Guillaume du Bellay)가 협상했던 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중에서 프랑스 왕의 거짓된 평화 제의에 의해 좀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스위스 개신교도들이었다. 종교개혁은 이미 스위스 도시들로 전파되었고 드디어는 서부에 있는 불어권 지역에까지 파급되었다. 비록 아직 제네바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많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고국에서의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스위스로 가서 거기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제 화체설의 발전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화체설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제로, 육체적으로 느껴지게 임재하신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화체설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에서 최초로 공인되었다. 그것은 중세 교회, 특별히 프랑스 교회에 위협이 되고 있던 알비겐파들(Albigensians)의 반(反) 성직, 반(反) 성례 교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공식 채택되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데는 두 세대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는데 그것이 공식화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두 대전(Summae) 에서였다.

미사와 그것에 수반되는 사제들의 기적은 사방에 있어 모든 중세 교회 체제의 기둥이 되었다. 병제(Concomitance)의 교리에 따라 평신도들로부터 성찬시에 잔을 박탈하게 되자 교회와 국가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떠한 도전도 받지 않고 견고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것의 성경적 타당성과 그것에 수반되는 측면들-일곱 가지의 성례제도, 면죄부, 공덕사상, 성자들의 기도 등등-에 대해 의심을 픔게 되면 교회와 국가에 의해 벌 떼 같은 공격을 받게 되었다.

14세기 말 화체설에 대항한 위클리프의 용감한 반대 운동은 당시 교황권이 약화되고 분열된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저지를 받았다. 심지어 성만찬을 개혁하려는 후스의 온건한 노력조차도 정죄를 받아 후스는 1415년 콘스탄스에서 순교 당해야 했던 것이다.

1517년 루터의 논문들이 이 성역을 문제 삼게 되었을 때 그리고 1520년에 그가 「교회의 바빌론 유수」를 통해 중세의 교회 체제에 결정적인 일격을 날렸을 때 억압적이고 비성경적인 교회의 중심 교리에 대한 비평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비평에 있어 상당히 온건했다. 그것은 그의 동반자인 스위스의 쯔빙글리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견해는 벽보의 선언문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개혁파들이 수행했던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위험한 비평 행동은 미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점이라는 것이다. 이 인기 있는 문서가 급속도로 유포되는 중에 그것의 저자들은 당장 여러 곳으로부터 반격을 받기 되었다. 이를테면 로버트 세노 같은 소르본느의 신학자는 그것이 프랑스에 나타난 이후 줄곧 루터주의를 진압하려고 애를 썼다(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또한 고위직에 있는 카톨릭 인본주의자들은 왕과 함께 경고의 깃발을 쳐들었다. 왕은 자신의 정치적 계획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민중들은 미신적인 정통적 신념에서였든지 혹은 교회의 개혁에 흥미가 있어서였든지 그것에 반응을 보였다.


2. 칼빈의 세네카 주석(1532)-프란시스 1세이게 보낸 최초의 변증서인가?


칼빈이 복음적 그리스도인으로 중생한 것은 프랑스 역사가 이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였다. 이제 우리는 그의 처음 살펴보기로 하자. 1532년 4월에 그는 최초의 저서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세네카 주석」(the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그의 종교적 순례의 첫 번째 발걸음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 인본주의자 주석과 그리스도인인 칼빈의 관계에 관해 쓰인 글들이 많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 있게 그것을 그의 신앙과 관련시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거기에는 종교적인 언급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 가지 난점은 칼빈의 신학적 견해가 절대 변하지 않았으며 그가 1559년의 「기독교 강요」최종판에서 기록한 내용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구별 없이 적용된다는 오래 묵은 인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신앙을 표현한 문헌들 전반에 걸쳐 일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의 사상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변화되고 재고되고 개조되었다. 그의 「강요」의 주요한 다섯 개 개정판들을 잠시만 비교해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의 칼빈을 회심하기 전의 칼빈, 즉 세네카 주석을 썼을 때의 칼빈과 비교해 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1536년 판 강요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켜서 그것의 빛 속에서 세네카 주석을 고찰한다면 색다른 면모가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강요」는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저 유명한 편지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칼빈이 프랑스에 있는 개혁주의 동포들을 대신해서 1535년의 격랑기에 왕에게 보낸 유창한 호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편지와 그 뒤에 나오는 신학 논문, 특별히 마지막 장은 프란시스에게 그리스도인 군주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관원들을 위한 거울”, “그리스도인 군주를 위한 교훈”등을 위한 이러한 연구는 16세기에 가장 흔했던 문학 장르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 치고 자신들의 학자적 탁월성과 정치적 혜안을 군주들에게 과시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란시스 1세에게는 길롬 뷰데(Guillaume Bude)가 있었고 필립에게는 에라스무스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내의 혁명적 기운들과 타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의 위협이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겁을 집어먹은 통치자들의 억압적 폭정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민감하고 온건한 사람들은 정치적 처신의 모델을 찾기 위해 고대의 문헌들을 샅샅이 뒤지게 되었다.

로마 제국 역사를 통해 네로보다 더 악한 폭군은 없었지만 그가 황제로 즉위할 때에 즈음하여 그 보다 더 훌륭한 정치적, 도덕적 교훈들을 소유했던 황제도 없었다. 칼빈이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또한 어쩌면 프란시스1세에게 올바른 통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옛날 스토아 학자들 가운데 네로의 자문역을 담당했던 사람의 저술에 손을 대 보려 했다는 것은 있을 법 한 일이 아니겠는가? 최소한 이미 상당한 윤리적 민감성을 소유했던 명목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마도 칼빈은 자신의 온건하고도 박식한 작은 주석이 왕의 주의를 끌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3. 칼빈의 신학적 순례의 첫 단계


우리는 이미 칼빈의 세네카 주석에는 뚜렷이 종교적인 교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 초기의 저서를 가지고서 칼빈의 회심을 논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를 취급하는 것이 심히 주저된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많은 위대한 학자들을 곤혹케 한 문제이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해답을 얻지 못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한 칼빈 자신의 침묵, 그 자신의 저술들 속에 직접적인 자료들이 빈곤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생애 가운데 이 결정적 시기에 있어 그의 행적에 관해 우리가 가진 정보들 속에 있는 신비한 차이들로 인하여 그의 회심 일자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은한 일이다. 존 맥네일(John T. McNill)은 아마도 그것이 1534년 4월 5일과 1534년 5월 4알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것은 칼빈이 자시에게 주어지던 성직록(benefice)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학자인 카노지(Ganoczy)는 그 보다 더 늦은 연대를 주장한다. 다행히도 연대 추정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회심의 내용과 구조가 중요할 따름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그의 회심에 관한 우리 지식의 원천들을 공식적으로 검토하기 전에 그의 세네카 주석 속에 있는 종교적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근본적으로, 그가 회심하기 직전에 세 가지의 종교적 질문이 이 젊은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이교와 기독교 사이의 차이점, 더 광범위하게 말한다면, 미신과 진정한 종교의 차이점이다. 둘째는, 인간 영혼의 기원과 성격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통치에 관한 질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섭리적 틀 속에서 인간 권위의 위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B. 칼빈의 회심의 내용과 성격에 관한 고찰


1. 문헌에 나타난 그의 현실



칼빈은 어디서 자기 자신의 회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가? 다소 후대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가장 주요한 저술들 가운데 하나인 그의 시편 주석에서 아주 간단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회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 1539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는 복음주의적 평신도들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회심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추기경 사돌레(Sadolet)가 제네바 시를 향해 진정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호소를 한 것에 대한 칼빈의 유창한 반론 속에 나타나 있다.

추기경 사돌레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향한 자신의 호소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는데 거기서 한 충성스러운 카톨릭 교도는 자신의 마지막 신앙고백을 하는 반면 한 프로테스탄트 교도는 헛되이 마지막 호소를 하고 있다. 칼빈은 그것을 교묘하게 역전시킨다. 사돌레에 의해 묘사된 분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그는 자신을 회심 후에, 오류에 대항해 투쟁하는 성직자로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이상이 칼빈의 회심에 관한 자료로 흔히 인용되는 두 개의 문헌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내가 “칼빈 신앙의 핵심”이라 부르는 것을 첨가시키고 싶다. 그것은 1536년 판 강요의 제 1장 처음 몇 페이지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아마도 「삐에르 로버트의 신약에 대한 서문」을 전체적으로 첨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많은 위대한 회심들 속에는 그 체험의 “계기가 된” 어떤 특별한 성귀가 있다. 그처럼 권능 있는 본문들의 긴 목록을 열거할 필요 없이 루터에게 그러한 작용을 했던 로마서 1장 17절만 생각해도 충분한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칼빈에게는 그처럼 분명한 기록이 없다. 어떤 특정 구절이 칼빈을 그처럼 움직였는가 어떤가를 논하는 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바울의 로마서가 그의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신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구절이나 혹은 최소한 한 본문을 뽑아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물론 로마서 1장리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롬1:18-25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 구절만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롬1:18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히도 아니한다”는 구절인 것이다. 혹은 아마도 롬1:21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하는 것이다.

왜냐고? 칼빈의 경건의 중심 되는 면모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중심 되는 지식이다. 그것은 1536년 판에 처음으로 언급되었지만 1559년에는 그것이 그의 사상의 조직 원리가 되다시피 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요약하여 칼빈을 하나님의 탁월성 혹은 능력들(“virtutes")을 열거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역동적인 것이여서 속성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1536년판 강요의 1장 서두에 나타난 이 목록은 로마서 주석(1540) 1장 21절에 나타난 것들과 거의 동일하다. 로마서에 있는 동일한 본문은 칼빈의 「추기경 사돌레에 대한 답변」(1539) 속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제시함으로써 사돌레가 자신의 편지 속에서 칼빈의 고백이라고 모함했던 그 거짓 고백을 대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칼빈은 그가 반발했던 그 거짓 신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실로 그분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부르지만 그들은 당신께서 당신의 위엄에 합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셨던 그 영광을 다른 것들에게 돌리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자기들이 경배하는 성자들만큼이나 많은 신들을 상상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것에 대한 강조 이야말로 칼빈의 경건에 있어서 중심 되는 주제들인 것이다.

칼빈의 회심을 가능하게 한 성경적 근거를 보다 광범위하게 살펴보자. 루터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칼빈에게 있어서도 그의 신앙의 비결을 지탱해준 것은 시편과 로마서의 주옥같은 글들이다. 루터가 쓴 최초의 주석은 시편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의 두 번째 주석은 로마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1517년의 체험이 있기 수년 전에 쓰여진 것들이지만 그 체험의 준비 단계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쓴 최초의 수적은 로마서 주석이었다. 사실상 「기독교 강요」 그 자체가 로마서 주석을 확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의 시편 주석은 그보다 훨씬 뒤에 쓴 것이지만 그것은 가장 뚜렷이 개인적인 주석이다(때로는 다윗의 입을 빌어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소문에서 칼빈의 회심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하고 있는 유일한 문헌이기도 하다. 동시에,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한 양이 종교적 작품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로마서와 시편은 「강요」속에 종교적 작품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로마서와 시편은 「강요」속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성경이기도 하다.

라틴어 최종판에서 로마서는 최소한 598번, 시편은 580번 인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칼빈이 시편을 ”영혼의 모든 부분을 해부한 것“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그가 시편에 얼마나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시편을 개혁교회의 찬송가로 삼고 있다. 루이 구마(Louis Goumaz)는 「강요」의 신학을 그의 주석들의 해석과 상호 관련시키는 틀을 제시하면서 칼빈의 회심에 있어서의 성경의 결정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성경은 칼빈의 회심을 위한 도구였다...그 속에서 자신의 종교적 성품을 형성한 양식과 그의 인문주의적이고 법률적 정신에 공감되는 문서를 발견했다.”


2. 신학적으로 재조명해 본 그의 회심-구원의 역사


부처와 파렐의 격려를 얻은 칼빈의 사촌 삐에르 로버트는 1535년 2월 12일에 신약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끝마쳤고 1535년 6월 4일에 노이샤텔에서 그것을 출판했다. 칼빈은 그 책을 위한 두 개의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하나는 라틴어로, 하나는 불어로 된 서문이었다. 우리가 그의 회심 체험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의 초고라 부르는 것은 불어로 된 서문이다. 1535년 1월경에 칼빈은 바젤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늦게 잡더라도 그 서문은 그 해 초로 연대를 잡아야만 한다. 그때 그는 모든 정력을 「기독교 강요」초판을 저술하거나 완성하는데 쏟고 있었다(그것은 1535년 8월 23일에 완성되어 1536년 3월에 출판되었다).

신약에 대한 서문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바울-어거스틴의 요약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인간의 창조...양심(이방인들)과 율법(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자비...계속적인 배도...구주의 오심...복음의 부르심이 그것이다. 이 서문은 왕들과 관원들과 주교들과 목사들에 대한 호소로 끝을 맺는다. 그들이 복음의 올바른 전파와 교회의 건전성을 지지하라는 호소인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칼빈의 회심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으로서 이 짧은 논문의 중심 되는 부분은 우리가 “복음의 요청”이라 이름 붙인 부분이다. 칼빈의 사고 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 즉 그를 이끌어 철학자들의 지혜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도록 만든 그 통찰은 인간의 타락이 차지한 결정적 위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지혜를 찬양하고 영혼에 대해 명상하는 철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타락(강요1, 15, 8)은 연약한 인간의 지혜가 그리스도의 신적인 지혜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칼빈은 다른 곳에서 후자를 그리스도의 철학(Philosophia Christi)이라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을 주어 핍박의 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추구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의 표상이 수렴된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모든 것, 우리가 표현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모든 성경은 우리를 불러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한다.”

이처럼 복음을 읽음으로 칼빈은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모든 구원의 역사를 묵상하는 대로 나아간다. 그것은 모두 이 간단한 서문, 즉 자신의 회심에 대한 칼빈의 최초의 신학적 반성 속에 포함되어 있다. 칼빈이 왜 인문주의자로서의 경력을 포기했는가 하는데 대한 이유를 자기 자신의 말로 들어보자.


그리하여 진정한 경건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감각을

가지게 된 이후,

나는 갑자기 진보에의

커다란 욕망으로

불붙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내가 다른 공부들을

전적으로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훨씬 느슨한 태도로

그것들에 임하게 되었다.

[칼빈의 경건, p. 8]


칼빈의 회심 전체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의 “제2탄”은 1535년 상반기 중에 불과 몇 주 혹은 몇 달 간격으로 제1탄을 뒤따라 나왔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칼빈 신앙의 핵심”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1536년 판 「강요」 제1장의 처음 아홉 페이지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신약에 대한 서문」과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 보다 덜 성경적인 첫 번째 문서보다 훨씬 더 신학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두 종류의 지식들”로 시작되어 율법-성문이든 불문이든-으로 옮겨갔다고 “다른 길”, 즉, 그리스도로 결론을 맺는다.

칼빈의 회심을 요약함에 있어 그 후의 모든 칼빈주의를 위해 중요한 구절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살펴보거나

혹은 내 눈을 당신에게로

향할 적마다...


인간 정신의 이 두 가지 움직임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대조적인 지식, 오직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연결할 수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죄인 사이의 간격을 일깨워 준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통해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율법에 관한 자신의 비평을 담은 장의 처음 몇 페이지에서 그것을 집중된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에 출간된 「강요」의 개정판들은 이러한 사상들이 중보될 강요의 전체에 확산되어 일종의 중심 원리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 오직 여기에 칼빈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일관성 있는 신학적 요약 속에 그것들이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진실하시며, 능하시며, 살아 계시는 분이다. 모든 것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그는 인자하시며 온유하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조상인 아담은 모든 덕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가 타락하여 죄에 빠짐으로 그 형상은 지워지고 말소되었다. 그는 모든 덕을 박탈당하고 대신에 그것에 상응하는 악들을 가지게 되었다. 아담에게서 태어난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그의 뜻을 행하기에 무력하며 영원한 죽음을 받기에 합당하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자비로우신 아버지는 율법을 가져다주신다. 기록되지 않은 율법을 양심에 주시고 다음에는 기록된 율법을 주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우리가 그분에게 빚지고 있는 것에 대한 증인을 주셨다. 그것은 양심인데 마음에 새겨진 율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기 사랑에 의해 눈이 가리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의에 이르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는 고로 우리는 여전히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자비로 또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영역에서 도움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들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선물을 받기 위해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아야만 한다. 그분은 통해서만 아버지 안에 있는 영원한 축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약은 칼빈의 신선한 상경 연구의 결과일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통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바쳐진 깊은 신앙의 고백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주석과 설교와 종교개혁을 위한 k방면의 활동들의 원천이 있는 것이다.


Ⅱ.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


A. 교리문답서인가 혹은 변증서인가?


1. 원래의 의도는 교리문답서



칼빈이 회심한 후 새로운 성경연구에 착수했을 때 즉시 그가 직면한 임무는 참된 신앙을 갈구하는 자들을 지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참 교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별반 경험 없는 자신에게로 모여들자,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나를 조용히 있도록 두지 않으신다”고 결론지었다.

프랑스에서 행한 그의 초기 설교에 대해서는 자료의 불충분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그의 마음이 훌륭한 교리 문답서를 작성해야 할 필요성에 쏠려있었음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1535년과 1536년 초기 사이 바젤에서의 짧은 체류 기간에 자신의 신학적 연구의 첫 결심을 저술했다. 책의 긴 부제가 그 내력을 나타내 준다: “기독교 강요,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망라하였다. 경건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다... .”

칼빈이 고안한 교리문답서 중 어느 만큼을 문서화했는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없으며, 또 이 문제는 여기서의 당면문제가 아니다.

프랑스의 개혁주의적 전통에서 교리문답서 저술가는 칼빈 이전에는 드물었다. 루터의 책을 번역한 것 이외에 불어로 된 것으로는 기욤 파렐(Guill aunme Farel)과 프란시스 랑베르(Francis Lambert)의 개요서들이 있었다. 파렐의 저서는 바젤의 개혁주의자 외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권유로 1525년 바젤에서 초판된 후, 재판을 거듭했다. 두 번째인 랑베르의 책은 1529년에 저술되었다.

그러나 파렐의 저서가 불어판 개혁신앙 문답서의 효시이며, 칼빈의 신학적 입장이나 관심을 도일하게 내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저작은 문체나 구성이나 내용 어느 것에서도 파렐의 것과 유사한 점이 없다. 칼빈은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저술 의도를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종교적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간단하고 초보적인 교리의 형태로...


이것이 칼빈이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던 의도였다. 그가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하여 외국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고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로 썼기는 했으나, 분명히 동포들에게 적합하도록 불어판을 속간할 작정이었다. 현존하는 기독교강요의 첫 불어판은 1541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1539년의 라틴어 제2판을 번역한 것으로서, 제네바에서의 목회 경험을 살려서 저술한 질의. 응답식의 교리문답서였다.


2. 기독교강요가 변중서로 되다.


그러나 간단한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던 계획은 뜻대로 될 수 없었다. 이 의도를 변경시킨 학살사건의 중심에는 매우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기에는 기존의 교회 내에서 정화운동을 하려는 온건한 노력에서부터 사회의 전 구조를 공격하는 급진적인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이 분출되었다. 그러나 온건과 과격을 엄밀히 분류하기란 사실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 1세는 당시 프랑스에서 발홍 하고 있었던 모든 혁신적인 경향이 국가와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소르본으 대학 측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간을 숙청함으로써 자국 내에 거주하는 독일인 개신교도들에 대한 처리문제로 외교상의 난처함에 봉착하더라도, 정책적으로 모든 문제를 국가의 안전과 연관된 문제로 상정하고,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과 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런 방안의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로 몰아 부치거나, 무식한 오합지졸로 보았다. 또는 그들의 운동은 국가의 내적 질서에 대항하는 무정부적 행동과 반란으로 정죄 했는데, 이 관점은 프란시스 1세가 독일 개신교도 군주에게 보낸 각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 군주에게 보낸 각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재세례파와 똑같아서 선동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각서는 독일인들의 염려나 불안을 진정시키기보다는, 프랑스의 온전한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급진적 개혁가들로부터 신학적. 정치적으로 자진 이탈하여 여타의 동료들과 구분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더 급진적인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 칼빈은 두 가지 형태로 응답하였다. 먼저 그는 1534-5년에 써서 1542년에 출간한 <사이코파키니아, Psychopannychia>에서 가장 위험스런 국면의 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 다음에 더욱 포괄적인 저술 작업을 하여 1536년에 기독교강요를 펴냈다. 이 두 저서를 차례로 살펴보자.

칼빈은 자신의 첫 신학적 논문인 <사이코파니키아>의 주제로서, 죽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택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죽음과 마지막 부활 사이에 영혼은 잠들어 있거나 죽는다고 하는 교리의 신봉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칼빈은 이 잘못된 교리로부터 동포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프랑스의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이 이단적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카톨릭교도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하여 이 교리를 반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같은 카톨릭교리를 거부하는 것이 압제적인 면죄부제도를 극복하는 열쇠이듯이, 영혼불멸설을 표방하는 것은 영혼사멸설을 주장하는 광신적 경향으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을 구별짓는 필수요건이었다. 그리고 칼빈은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이 영혼불멸교리의 신학적 전제로 삼았다. 하나님께서는 향존하시듯이, 그 형상인 영혼 역시 잠시라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이코파키니아> 자체는 몇 단계를 거쳐서 저술되었다. 초고는 1534년 오를레앙에서 익명의 친구에게 헌정한다는 서문을 담고 있다. 이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글이 교회의 통일성과 사랑을 교란시킨다는 오해를 받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이 있으며, 사랑을 유지하는 관건은 신앙을 신성하고 순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해에 그는 초고를 복사하여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개혁주의자 볼프강 카피토(Wolfgana Capito)에게 보내어 출판 여부를 문의했다. 1534년 말에 칼빈에게 보낸 답장에서 카피토는, 종교분쟁이 들끓고 있는 때인 만큼 이 논문은 접어두고 건설적인 성경 주석을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고 제안했다. 칼빈은 <사이코파니키아>에 대한 카피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기독교강요를 완성한 후 1535년 바젤에서 이 논문을 개정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칼빈은 자신과 동포들이 프랑스의 정치 질서를 파괴하고자 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문인 프랑스 왕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원래는 교리문답서를 작성할 의도였음을 시사한 후, 그는 제2의 목적을 추가하게 된 까닭을 직접적이고도 열정적으로 피력했다. 여기에서 그는 사악한 무리들의 횡포에 직면하여 그들에게 건전한 교리의 본질을 가르쳐 교훈 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시편 주석에서도 더욱 날카로운 어조로 동일한 내용을 서술했다. 그러므로 칼빈으로 하여금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쓰게 한 동기는 두 가지였다. 즉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문답서의 필요성과 박해를 중단하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의 실상을 왕에게 탄원해 알려야 하는 필요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목적 때문에 칼빈은 이중의 신학적 대응자세를 취했다. 제도화된 로마 카톨릭을 거부함과 동시에 극단적 분파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칼빈의 향후 신학의 행로가 결정되었다. 그것은 좌단과 우단 사이의 중도를 견지하는 것으로써, 현명한 절충이 아니라 독자적인 성경연구에 근거한 확신이었다. 이후 그의 신학체계상의 발전은 이 초기의 경향을 확대하고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B.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


1. 기독교 변증들 가운데 하나


그 초창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와 유대인의 배척 그리고 이단의 위험에 부딪혔을 때, 교부들은 기독교를 위한 변증서들을 저술하여서 신학에 창조적 자극을 주었다. 또한 변증가들은 로마의 국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불복종은 정치적 반동심이나 전복의지가 아니라, 창요적 특색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여야 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고대 철학의 모조품이라고 하는 비방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오히려 후대에 파생된 이교들의 원형임을 증명했다. 칼빈 역시 초대교회시대의 변증가들 처럼, 변증적 노력으로써 실제로 신앙을 새롭게 종합하였다. 자신이 체계화한 신앙을 신종(新種)이라고 하는 소르본느대학 신학자들의 악평에 대하여 그는 이것이 진정한 사도적 메시지이며, 그들의 신학이야말로 말기적 변종이하고 주장했다.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은 군주정체를 전복하고자 획책한다고 하는 트집에 대해서는 복음주의의 정치적 충절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프란시스Ⅰ세에게 보내는 서한은 저스틴과 터툴리안, 오리겐, 그리고 유세비우스의 변증서들과 나란히 둘 수 있는 것이다.


2. 헌사의 내용


서한의 구성을 살펴보자. 칼빈이 처음에는 단락을 나누지 않았으나, 1559년 판에 따라서 여덟 부분으로 나룰 수 있다.

(1) “본서를 쓰게 된 배경”으로서, 두 가지의 저술 목적을 기술한 후, 왕의 관심을 촉구한다.

(2)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하여 탄원한다.

(3) 카톨릭교도들이 개혁신앙을 비난하는 네 가지-새로운 것,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 기적에 의해 확증되지 않은 것- 반론에 대해 논박한다.

(5) 교회론에 대한 카톨릭의 오류들을 열거하고, 교회의 본질을 논증한다.

(6)그러면 교회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카톨릭교회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칼빈은 순수한 설교와 합법적 성례의 바울적 표지를 주장한다.

(7) 복음전파로 인해 소란과 변혁이 일어났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답변한다.

(8) 마지막으로 칼빈은 자신의 호소가 실제로 왕에게 전달되거나 왕을 움직일 가망성을 재어 본다.

기독교강요의 맨 끝에서도 세상의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사람에게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이것이 기독교강요의 “정치적 뼈대”이다. 요컨대, 본서는 서로 대립되는 종교적 두 경향들, 즉 복음주의 신앙과 로마 카톨릭의 교리 및 관례 사이의 긴장, 그리고 복음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 사이의 신장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이제 1536년 판에 실린 여섯 장들을 살펴보자.


C. “교리문답식” 장들(1-5장)의 분석


중세 말시의 문답식 문헌의 관례에 따라서 칼빈도 기독교강요를 십계명(1장), 사도신경(2장), 주기도문(3장), 성례(4장)의 순서로 구성하여 설명했다. 여기에 카톨릭의 미사에 대한 논박을 추가하고(4장 끝부분), 소위 다섯 가지 하는 “거짓 성례”를 부정했다(5장). 마지막 장에서는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적 권력에 관한 논문들을 실었다.

1. 1장: 율법에 관하여. 십계명을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제 3.4.5.10계명은 적용하거나 실례를 들어서 더 충분히 논의하고, 나머지 계명들은 간략하게 의역하고 있다. 결론부 에서는 율법의 효과와 칭의 문제로 연결시킨다.

2. 2장:믿음에 관하여.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는 주로 빠졌는데, 믿음의 본질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 논문, 사도신경의 해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에 관한 부분으로 짜여졌다. 로마 카톨릭교도들과 재세례파와 반(反)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강한 대비가 장 전체에 걸쳐 있다.

3. 3장:기도에 관하여. 이 장은 마틴 부쳐(Martrn Buccer)의 <복음서 주석, 1530>에 크게 힘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의 대조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수다한 인간 중재자 사이의 대조이다. 전반적으로 카톨릭 예배의 허구와 복음주의 예배의 순수성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대조 점들이 다루어졌다.

4. 4장:성례에 관하여. 이 장은 네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세 단락은 1559년 판의 성례장의 순서(4. 14-18)와 대개 일치한다. 먼저 성례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세례와 성찬 그리고 결론부로서 두 가지 주(主)의 성례의 집행을 짤막하게 논의한다. 성례 전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쯔빙글리와 카톨릭의 견해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례를 믿음의 증서에 찍힌 “봉인들”이라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박약한 이해력을 고려하셔서 조정하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세례에 관해서는 재세례파와 도나투스파적인 주장 킻 카톨릭의 견해를 모두 반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상징이며 표식”이라고 하는 쯔빙글리식의 견해를 암시하고 있다. 한편 성찬에 관한 논의에서는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성찬에 대해 그 때까지 있었던 무수한 논점들을 섭렵하여 나름대로 소화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는, 미해결의 문제들을 오랫동안 토론해 온 것처럼 곧바로 논쟁에 들어간다. 셋째로, 칼빈은 다양한 분파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별도의 더 충분한 신학적 논쟁을 앞질러간다.

성찬에 대한 기존의 두 이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성례의 존엄성을 지나치게 찬양하면 미신에 빠지기 쉬우며, 반대로 성례의 가치와 유익을 냉랭하고 시시하게 다루면 성례를 경멸하게 된다. 칼빈이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성찬에 대한 논쟁을 야기 시킨 주 원인은 사람들이 잘못된 관점으로 의문을 품은 데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것으로 되는가?”라고 의문했어야 했다. 그는 미사숭배를 거부하며,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재세례파나 카톨릭식의 고행 또한 거부한다. 그리고 쯔빙글리의 합리적인 축소론(the rationalistic reductionosm)에는 반대하지만, 실제적 현현과는 달리 영화롭게된 몸의 축약이라는 의견에는 찬성한다. 칼빈은 천상과 지상 사이에 있는 무한한 심연을 기이하게 연결한 이 하나님의 능력의 편재를 “마치” 육체적 현현인 것 “처럼” 받아들인다. 성례는 단순히 믿음과는 별개인 표적도 아니며, 성례 자체가 믿음의 역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과 성례는 협력한다. 이러한 논거는 칼빈 당대나 이전의 신학적 주장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의 근저에는 신학과 기독론상의 상이점이 내포되어 있다. 칼빈은 신자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어떤 신학적 견해나 예배의 관례를 거부하는 강한 목회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올바른 성례의 집행에 관해 논의한다. 성례 신학과 관례상의 정오(正誤)를 갈기는 시금석은 성경의 권위인 것이다.

5. 5장: 다섯 거짓 성례에 관하여.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도 거의 전부 수록되었다. 물론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성례론과 의식들을 비판하는 데 주력한다. 시헹 중인 각 “성사”의 전거를 조사한 후, 그것의 실제 내력과 올바른 지침을 가르쳐 준다. 견진례와 종부성사, 혼인성사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논의하고, 고해성사와 신품성사는 길게 다룬다. 이 장과 6장의 중간부인 교회의 권능 편에서 칼빈은 중세 교회체계의 토대를 핵심적으로 상세하게 논파한다.


D. 6장: 프란시스Ⅰ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결론인가?


1. 개괄적인 고찰


프란시스Ⅰ세에 대한 헌사와 1536년의 기독교강요의 최종 장을 비교해 보면, 이 장이 왕에 대한 탄원의 사실상의 결론임을 알 수 있다. 1-5장은 칼빈의 원래의 의도대로 근본적으로 교리문답서이나, 세 단락으로 구성된 6장은 특별히 왕에 대한 호소와 관련된 것이다. 첫 단락인 ‘기독교인의 자유’에서는, 이 자유가 세속적 영역이 아닌 영적 영역에 속한 것임을 성경의 근거를 들어서 설명한다. 둘째, ‘교회의 권능’부분에서 칼빈은, 인간이 고안한 교회법과 관습은 이 자유를 침해하므로 거부하며, 또 카톨릭의 제도가 세속 권력의 일부분까지 탈취하였다는 사실을 왕에게 논증해 보이고자 한다.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자기 영내를 다스리는 세상 군주라는 두 왕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권세와 관련된 세 번째 부분인 ‘세상정치’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충성, 그리고 재세례파의 잘못된 견해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전적인 거부를 왕에게 확신시키며, 궁극적인 영적 결정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6장에서 칼빈은 특히 프란시스 왕에게 복음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소르본느대학 신학자들의 악영향으로부터 왕을 분리시키기 위해 그들의 신학을 반박한다.


2. 세부적인 내용


A. 기독교인의 자유

자유의 문제는 6장의 중심적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전장에 걸쳐서 칼빈은 법률조항을 계속 늘려가는 것과 법은 모두 거부하는 것 사이의 중도적 방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불법적인 규제에 묶이지 않음과 동시에 무질서한 방종으로 치닫지도 않는 영적 자유를 변론한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세 가지를 의미한다. 법으로부터의 자유, 법의 강제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양심의 자유, 그리고 “아무래도 좋은 것들”에 대해 처신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연약한 형제나 이웃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절제하며 사용해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인습으로부터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서 영적 통치와 세속적 정치적인 통치를 구분하였고, 이로써 ‘기독교인의 자유’부분은 두 왕국에 대한 논의의 서론 격이 되는 셈이다.

B. 교회의 권능

교회의 규율에 대한 칼빈의 관점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 재세례파나 무조건 수용하는 카톨릭교도들의 관점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그는 주로 카톨릭의 주장에 대해 성경적. 역사적 반증들을 제시하면서 반박한다.

C. 세상정치

본서의 마지막 주제인 ‘세상정치’에서는 재세례파를 훨씬 더 현저하게 다룬다. 이 종결부를 보면, 칼빈은 프랑스의 충성스런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이 어떤 것이며, 또 군주로서 직무상 처신하는 방법을 프랑스 왕에게 가르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세상 정치의 필요성을 논의한다. 이미 언급하였던 영혼과 육체에 관한 재세례파의 오류는 정치적 영역의 구별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칼빈이 참 신앙을 확립하고 보호하는 것이 세속 권위의 역할이라고 했을 때, 이는 모든 통치체제를 거부하는 재세례파와 또 이 역할을 횡령하는 카톨릭을 의식하고 기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나 제네바 시(市)의 문제에 있어서나 그는 정교하게 교회가 정부의 균형을 유지시켰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세상 정치를 다루는 둘째 항은 ‘관원’과 ‘법률’과 ‘백성’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가 관원들을 지칭하여 “신 같은” 지배자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관원에 대해 고도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그에게 “통치하는 권위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성스런 소명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소명 가운데서도 가장 영예로운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경건에 이반하여 이 거룩한 일꾼을 대적하는 혁명분자들은 바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다. 칼빈은 재세례파의 잘못된 성경의 유추 및 적용을 분석하면서, 관원과 법률과 백성의 상호작용을 구별하는 근본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뒷부분을 채운다. 관원의 임무는 공공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임무 수행을 위해 합법적인 사형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올바르게 지도하려면, 과도하게 엄격하지도 않으며 관대함을 과장하지도 않아야 한다. 왕은 분노나 탐욕을 조절해야 하는데, 국고는 “대개가 바로 백성들의 피”이기 때문이다. 세상 정치와 법률 편에는 <세네카 주석 Seneca Commentary>의 내용과 유사한 것이 많다. 이것은 칼빈이 이 주제들에 대한 정통적 견해를 복음주의적 견지에서 재정립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법률 편에서는 먼저 일부의 과장된 견해를 논박한 후, 그 대안으로써 유명한 구분을 제시한다. 도덕법과 의식법, 그리고 재판법의 세 층이다. 도덕법은 자연법과 양심의 법을 천명한 것이며, 의식법은 1장, 5장, 6장 2부에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재판법을 주로 설명한다. 공정이 모든 법률의 목표요 한계이다. 최후의 주제는 백성인데, 관원과 법률은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지나친 소송욕과 재세례파의 재판 경시의 두 극단적 예를 든 후, 하나님께서 주신 관원과 법정을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위하여 공정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기독교강요의 말리에서 칼빈은 신민이 군주에게 어떻게 복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프란시스Ⅰ세와 자기 동포들에게 동시에 말하고 있다. 관원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그가 어떠하든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사악하거나 압제하는 지배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보복하신다. 그러나 결국 칼빈은 프란시스Ⅰ세와 박해받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진정한 왕은 오직 한 분뿐임을 상기시킨다. 지배자에 대한 복종 때문에 하나님께 불복종하게 되는 경우라면, 그 때 “우리는 마땅히 사람에게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책의 마지막 몇 줄은 헌사의 종결부를 배반향시키고 증폭시키고 있다.


헌 사


지극히 위대하시고 지극히 영명하시며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의 왕 프란시tm 폐하에게 존 칼빈은 주안에서 평강과 문안을 드립니다.


1. 이 책이 쓰여진 배경


지극히 영광스런 왕이시여, 제가 처음 이 저술에 손을 댔을 때 폐하에게 바쳐질 어떤 것을 쓴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일이었습니다. 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함으로 그것에 의해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우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이 일에 착수하였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책 자체도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가르침의 형태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악한 사람들의 격노가 당신의 영토에서 너무나 멀리 파급되었기 때문에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장소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일 내가 가르치기에 착수한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동시에 폐하 앞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것으로부터 폐하는 오늘날 칼과 불로써 폐하의 영토를 교란시키는 저 미친 사람들이 불같은 성화로 반대하고 있는 교리의 속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저는 그들이 투옥, 추방, 재산 몰수, 그리고 화형에 처해야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박멸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바로 그 교리의 대부분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주저 없이 고백하는 바입니다.

정말이지 너는 그들이 우리의 명분을 당신에게 가능한 한 혐오스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끔찍한 보고서들로써 당신의 귀와 마음을 가득 채웠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자비하심에 합당하게, 만일 단순히 고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면 말로나 행위로나 무죄한 자가 남아 있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당신은 고려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증소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이 교리 즉 제가 지금 당신에게 말씀드리려 하고 있는 내용이 오래 전부터 모든 계층의 표결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며 많은 법정의 판결에 의하여 대적들의 맹종과 능력에 의해 격렬한 배척을 받아 왔으며 부분적으로 그들의 허위, 트집, 중상에 의해 날치기로 또한 음흉하게 억압을 받아 왔다는 것을 말할 뿐일 것입니다. 한번 들어보지도 않고 기 교리에 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선고를 내리는 것은 순전한 폭력인 것입니다. 부당하게도 그것을 반역과 악행으로 고발하는 것은 사기인 것입니다.

지극히 존귀한 왕이시여, 아무도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불평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중상 모략들이 매일 당신 앞에 고해지고 있는지 당신은 증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 교리가 모든 질서와 시민의 정부를 전복하고 평화를 깨뜨리고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모든 신분과 재산을 박탈하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려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고발의 극히 적은 일부만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끔찍한 소문들이 널리 유포되고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그 교리와 그것을 만든 자들은 수천 번 화형과 십자가형을 당해 마땅하다고 세상은 판단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사악한 비난들이 믿기워지고 있는 때에 그 교리에 대한 일반의 증오심이 일고 있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협력해서 우리와 우리의 교리를 정죄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자기들이 집에서 가져온 편견들을 판결로서 선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고백에 의해서나 혹은 확실한 증언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사람을 아무도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의 직무를 완전히 유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슨 죄에 대해서 입니까? 이 정죄된 교리에 대해서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무슨 권리고 그것이 정죄 되었습니까? 이제 그들의 변호의 핵심은 바로 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심지어 속삭일 수 있는 권리조차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2.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탄원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무적의 왕이시여, 저는 정당하게 당신에게 이 송사를 충분히 심리해 주시기를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 송사는 지금까지 적법한 절차 없이, 사법적 엄숙함보다는 폭력적인 열기에 의해 취급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서 개인적인 변호를 함으로써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록 제가 저의 조국을 지극히 사랑하는 인지상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추방되어 있는 것이 크게 유감스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주장, 즉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을 기꺼이 붙들고자 합니다. 이 주장은 현재 폐하의 왕국에서 완전히 짓밟히고 철저하게 버림받은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폐하의 승인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바리새인들의 폭정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주장이 수난을 받고 있다는 그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경건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크게 득세를 해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추방되고 흩어져서 비록 소멸까지는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려져 있고 묻혀져 있으며 빛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련한 교회는 잔인한 살육에 의해 피폐되거나 혹은 추방을 당해 유배 중에 있거나 혹은 협박과 공갈에 압도당하여 감히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광분해서 이미 기울어 가고 있는 벽을 강타하고 그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박멸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무도 그러한 광분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고자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무지한 자들의 오류와 경솔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온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오류와 경솔을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진리라 부르고 있으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지혜의 신비를 부여해 주시지 못할 만큼 야비한 자들은 아니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현명하신 왕이시여, 그처럼 정당한 변론에 대해 당신의 귀나 마음을 닫아버리지 않는 것이 당신을 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아주 중요한 문제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땅위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그 영예로운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에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걸려 있을 때에는 말입니다. 실로 이 문제는 당신이 듣고 인지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당신의 왕관의 영광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정말이지 이러한 생각이 진정한 왕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는 것 말입니다(롬13:3).

만일 자기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왕이 있다면 그는 왕의 법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왕국이 하나님의 홀, 즉 그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 않는데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번영하기를 바라는 자는 스스로 속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흩어진다”(잠29:18, 한글 성경에는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로 번역되어 있음: 역자주)고 선포하는 하늘의 음성은 거짓말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비천함에 대한 경멸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노력을 단념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천하고 낮은 미미한 존재들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물론 비참한 죄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도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고전4:13 참조)이거나 혹은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천한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그의 자비 외에 자랑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고후10:17-18참조) 그것에 의해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이 말입니다(딛3:5참조).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우리의 연약함뿐인데(고후11:30; 12:5, 9참조) 그들에세 있어서는 단지 고개짓으로 인정하는 것 조차도 커다란 불명예기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기가 꺾임이 없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능력들 위에 우뚝 솟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삼으셔서 “바다에서 바다까지 그리고 강들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2:8; 71:7, 벌게이트역) 그리하여 그는 그 철과 놋 같은 힘으로, 그 금은 같은 광채로 전세계를 쳐서 그 입의 막대기로 마치 토기를 부스러뜨리듯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의 통치의 장엄함에 관해 예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단2:32-35; 사11:4; 시2:9종합). 사실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거짓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삼아 사악하게도 그것을 더럽힌다고 소리칩니다. 폐하께서 소유하신 분별력을 발휘해서 우리의 고백을 읽어보시면 그것이 얼마나 악의에 찬 무고이며 파렴치한 말들인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당신의 열심과 주위를 끌기 위해, 혹은 최소한 당신께서 우리의 고백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것을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바울이 모든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롬12:6), 그는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제 만일 우리의 해석이 이 믿음의 규칙에 의해 평가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 우리는 미덕이 전혀 없는 벌거숭이이며, 하나님에 의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죄의 종들이며, 그분에 의해 비췸을 얻기 위해 눈먼 자이며 그분에 희애 교정을 받기 위해 절름발이이며, 그분에 의해 지탱되기 위해 약한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보다 더 잘 부합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고전1:31; 고후10:17 참조)? 우리가 이러한 것들이나 이와 유사한 것들을 말하면 우리의 대적들은 참견을 하면서 불평하기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자연의 맹목적인 빛과 가상의 준비들과 자유 의지와 영원한 구원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는 행위들, 심지어 그들의 적선을 통한 구원까지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찬송과 영광, 덕, 의, 그리고 지혜가 하나님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생수의 샘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책망 들었다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요4:14). 오히려 “자신들을 위하여 웅덩이를 팠는데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정 웅덩이를 판” 사람들이 심하게 책망 받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렘2:13).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형제요 구속자로 인식되는 곳에서 하나님이 구속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심을 확신하는 것보다도 더 믿음에 가깝고 좋은 것이 아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롬8:32) 그분으로부터 모든 행복하고 성공적인 것을 자신 있게 기대하는 것 보다 더 좋고 믿음에 가까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면서 소리치기를 그러한 확실한 신뢰는 교만과 자만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자랑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안에서 자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외에는 허세를 극복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고후 10:17; 고전1:31; 렘9:23-24참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왕이시여, 우리가 주장을 전체적으로 간단히 검토해 보시고 만일 “우리가 수고하고 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기”(딤전4:10) 때문이며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요17:3)임을 믿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분명히 발견하실 수 없거든 우리를 사악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사악한 자들로 여기십시오. 이러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곤장을 맞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당하면서 끌려 다니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추방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을 다녀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난에 찌들리고 무서운 저주를 받고 중상모략을 받기도 하고, 가장 치욕스러운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대적들을 보십시오(나는 사지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시와 의도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잠시동안 어떠한 열심히 그들은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종교를 등한히 하고 멸시하도록 즉각 허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것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인정받는 자리를 차지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무슨 신념을 견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그들이 일컫는 바) 맹목적 신앙으로 자기의 마음을 교회의 판단에 맡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명백한 불경에 의해 더렵혀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도 그들에게는 별로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교황청의 수위성과 거룩한 어머니 되시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손가락을 드는 자만 없다면 말입니다. 왜 그들은 미사, 연옥, 성지순례 따위의 시시한 문제들을 위해서 그토록 모질고 독하게 투쟁하는 것입니까? 아주 분명한 신앙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 속에 참된 경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말입니다. 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저희 신은 배요”(빌3:19) 저희 부엌이 저희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제거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심지어 사람도 아니라고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겨우 부스러기만을 씹고 있다 할지라고 역시 그들 모두는 한 솥의 밥을 먹고 있으며 그 솥은 그러한 연료가 없으면 단지 식을 뿐 아니라 점점 얼어붙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배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자가 자기 신앙을 위한 가장 열성적인 옹호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한가지 목표를 향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지배권을 보존하거나 혹은 자기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진지한 열심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3.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논박-새로운 것, 불확실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과 기적들의 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공격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비난하며 거기에 온갖 이름을 붙여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그것이 증오와 의심의 대상이 되게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새롭고” 또 “최근에 생성된” 것으로 부릅니다. 그들은 그것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것으로 비난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슨 기적에 의해 뒷받침 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그토록 많은 거룩한 교구들의 동의와 아주 오래된 전통에 대항하여 전통을 부정해 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교회에 대항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종파 분리의 죄를 범하는 것임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도무지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수세기 동안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인정하라고 우리를 몰아 칩니다. 드디어 그들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열매에 의해서 정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종파들과 아주 많은 불온한 소란들과 터다란 무질서를 낳았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실로 그들이 속기 잘하고 무지한 대중들 앞에서 버림받은 주장을 매도하기란 극히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도 말할 기회를 얻에 된다면 방종하고도 낯두껍게 거리낌없이 쏟아 붓는 이 비난들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그것을 “새로운”것이라 부름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새로운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롭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도 가의 복음도 다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는 바울의 설교가 고대의 것임을 나는 사람은 우리에게서 아무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던 것은 인간의 불경건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우리가 그것을 되찾았으므로 그것이 오랜 약사를 가진 것이라는 주장이 마땅히 인정되어야 합니다. 동일한 무지가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께서 자기의 선지자를 통해 탄식하신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그것의 불확실성을 조롱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파로써, 또한 그들 자신의 생명의 대가로 그들의 교리를 인쳐야 한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살후2:9-10참조).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지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파성수조 단순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즉,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마24:24). 그리고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살후2:9).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고후11:14). 옛날 이집트인들은 예레미야를 경배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때 이집트에 장사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제사도 드리고 신적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를 오용한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처럼 그의 무덤을 숭배함으로써 뱀에게 물려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살후2:11)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신13:2이하).


4. 교부들이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반대한다는 부당한 주장들


게다가 그들은 부당하게도 고대의 교부들이 우리를 반대한다고 주장합니다(나는 보다 나았던 교회시대의 고대 저술가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그들 자신의 불경건에 대한 지지자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교부적 권위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면 승리는 우리편에 있습니다. 이 교부들은 현명하고 우수한 글들을 많이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경우에는 그들에게도 일어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그들의 후손들이 지혜와 판단력과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함과 오류들만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부들이 썼던 훌륭한 글들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설명하거나 혹은 왜곡시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황금 가운데에서 쓰레기를 모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를 교부들의 대적이요 교부들을 멸시하는 자라고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만일 그것이 우리의 현재 목적이라면,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부분일 교부들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이 우리의 것이며(고전3:21-22) 우리를 섬겨야 하며, 우리를 주관할 수 없으며(눅22:24-25) 우리는 모든 일에 예외 없이 순종해야 하는(골3:20참조) 그리스도 한 분에게 속해 있다(고정3:23)는 것을 항상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교부들의 저술에 정통해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종교에 있어 어떤 확실한 것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사람들도 많은 것을 몰랐으며, 종종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서로 의견이 대립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우리 조상들에 의해 설정된 경계를 범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공연히 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합니다(잠22:28). 그러나 동일한 규칙이 전답의 경계와 신앙의 순종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45:10)란 말로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풍유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옮기면 불법인 지 계표를 설정한 “조상들”로서(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사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잠22:28)? 제롬은 이 구절들을 이렇게 해석했으며 그들은 그의 말들을 그들의 교회법전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대적들이 그들의 이해력에 따라 조상들이 설정한 한계를 보전하고 싶어한다면 왜 그들은 그것들을 그처럼 멋대로 범하는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마시지도 막지도 아니하시며 따라서 쟁반도 컵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교부는 신성한 의식에는 금이 필요 없으며 금으로 산 것이 아닌 것들은 금으로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그들이 의식을 행할 때 금이나 은이나, 상아나 대리석이나 귀한 돌이나 비단을 즐겨 씀으로써 이 한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것을 사치스럽게 장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기 먹는 것을 삼가는 날에 자기는 자유롭게 고기를 맛본 어떤 사람을 저주했을 때 그들은 경계를 범한 것입니다. 한 교부는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수도승은 살인 청부업자 같은 자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교부는 수도승들이 비록 명상과 기도와 공부에 열심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수도승들의 게으른 창자들이 매춘 굴 즉 수도원에 두고 다른 사람들의 물질을 포식하게 했을 때 그들은 또 경계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새긴 형상을 보는 것은 몸서리칠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 한 교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 안에 형상이 없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을 때 그것은 그러한 한계 안에 머무르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일이었습니다. 또 어떤 교부는 말하기를 장례식에서 죽은 자에 대해 인간적 도리를 다한 후에는 그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계속적인 염려를 부추김으로써 이 한계들을 범하고 있습니다.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말하기를 진짜 몸이 성찬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몸의 신비가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말씀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것을 진짜의 실제로 간주할 때 그들은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성찬에는 참석하고 다른 종류의 성찬에는 불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찬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교부는 강력히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고백함에 있어 자기들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강요를 받더라고 주의 보혈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앞의 교부가 출교의 벌을 내리고 뒤의 교부가 타당한 이유로 책망한 바로 그것을 불가침의 법률로 권장했을 때 그들은 이 지계표를 옮겨 버린 것입니다. 어떤 애매한 문제를 판단한 때 분명하고도 명백한 성경의 증거 없이 이편이나 저편을 드는 것은 경거망동이라고 단정한 분도 교부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 수많은 제도들, 교회법들, 그리고 교리적 결정들을 제정했을 때 그들은 이 한계를 망각한 것입니다. 다른 이단들 가운데서 모타누스가 최초로 금식법을 강요했다고 해서 몬타누스를 꾸짖은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주 엄격한 법률로 금식을 명령함으로 그러한 한계를 훨씬 지나쳤던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고서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순결이라고 선언한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다른 교부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제들에게 독신을 심하게 강요함으로써 이 한계를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성경이 “그를 들으라”(마17:5)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귀를 기울여야 하며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거나 행한 것에는 신경 쓸 필요 없이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 위에 그리스도 외에 어떤 주인들을 세움으로써 자기 자신들이 이 경예안에 머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궤변론자들의 궤사에 의해 더럽혀지고 변론자들의 언쟁에 말려드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궤변론자들의 변론보다 더 악하고 끝없는 논쟁으로써 성경의 단순성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외에 평생을 아무 하는 일없이 보내는 그들은 이 경계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교부들이 다시 살아나서 이러한 자들이 사변적 신학이라 부르는 그러한 논쟁을 듣는다면 그들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교부들의 멍에를 거부해 버렸는지를 일일이 열거하려 한다면 내 이야기는 끝이 없어질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이 교부들에게 잘 순종하는 자녀들로 보이기 바라지만 말입니다. 정말이지 몇 달 몇 년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너무나 비겁하고도 썩어빠진 뻔뻔함으로 감히 우리를 책망하기를 우리가 옛날의 경계를 침범해 나아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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